우리 집의 아침은 늦게 밝는다.
일흔 네 살의 남편과 예순 아홉의 아내가 사는 집,
출근 길이 바쁜 직장인도, 학교에 늦을 학생도 없으니
남창의 햇살로 눈이 부실 때까지 마음놓고 잠에 취한다.
노경에 들면 초저녁잠이 많아 저절로 아침 형 인간이 된다는 데
우리 내외의 수면 형태는 여전히 젊은이 같아 잠의 유혹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러나 얼마든지 게을러도 괜찮은 나이, 늦은 아침을 맞이할 때마다
나는 내게 찾아온 노후를 예찬한다.
식사 준비도 간단하다.
잡곡밥에 국 그리고 김치와 생선 한 토막이 전부다.
나는 남편에게 초라한 밥상을 내밀며 자랑이나 하듯 말을 한다.
"조식(粗食)이 건강식인 것 아시지요?"
조악한 음식이라야 노후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핑계를 대며
적당히 소홀한 식탁에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중얼거린다.
늙었다는 것은 정말 편한 것이구나.
식후의 커피처럼 황홀한 것이 또 있을까.
우리 집의 식탁이 놓여 있는 북쪽은 전면이 유리창인데
찻잔을 들고 건너다보면 앞집의 남쪽 정원이
마치 내 집 마당처럼 눈에 들어온다.
나는 가꾸는 수고 없이 그 안에 가득한 꽃과 나무를 즐긴다.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
사무에 분주한 젊은이에겐 어림없는 일이다. 한유의 복은 노후의 특권이다.
느긋하게 조간을 본다.
아파트 분양시장에 며칠 사이 수십 조원에 이르는 자금이 몰렸다는
기사를 읽는다. 이익이 있는 곳이면 벌떼가 되는 군상들,
권력을 잡기 위한 사투의 현장은 전쟁터를 능가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내게는 어느 낯선 행성에서 벌어지는 일 같이 아득하다.
일상에서 초연해 지는 것이 "늙음"의 은총인가.
만용이 사라지고 과욕이 씻기어 나가고...
인생에서 어느 시기를 제일 좋은 때라고 말할 수 있을까.
뛰어 놀고 공부만 하면 되는 어린 시절일까.
드높은 이상(理想)에 도전해 보는 열정의 청춘 시절일까.
아니면 가정을 튼실히 이루고 사회의 중견이 되는 장년 시절인가.
도전하고 성취하고 인정 받는 그 런 시절은
가히 인생의 황금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좋은 시절에 나는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하나를 이루면 둘을 이루지 못해 불행했고
경쟁의 대열에서 낙후되는 것 같아 불안했으며
내게 있지 않는 것을 찾아 헤매느라고, 내게 있는 것을 잃어버렸다.
그러면서 패잔병처럼 밀리고 밀려 추락의 끝이라고 생각한
"노후"라는 땅에 당도했다
그러나 내가 도착한 "노년"은 축복의 땅이었다.
잃을 것이 없는 빈손 때문이 아니라, 얻으려는 욕망이 걷힌 빈마음으로
풍요의 고장이었고 비로소 "최선"이 바로 보이는 밝은 눈의 영토였다.
책임에서도 의무에서도 자유로운 나이,
세상에 있으되 세상에 묶이지 않는 평화와 고요가 가득한 곳이었다.
어제는 결혼 4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늙어 무력해진 남편과 주름진 얼굴이 추한 아내는,
일찍이 젊은 시절에는 나눠보지 못했던 가여운 눈빛으로
서로의 백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손을 잡고
노후를 공유하고 있는 현재를 감사했다.
<옮긴글: 유선진(수필가)의 '노년은 젊음보다 아름답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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