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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장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심우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철학.에세이.한시.기타자료/유익한 글모음

독일여행가가 본 120년전 조선

by 靑野(청야) 2019. 1. 23.

                             

● 들어가기 앞서


오스트리아 출신 

독일인 헤세 바르텍은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책을 집필하던 전문 여행가다.


그런 그가 120년 전,

1894년 조선 땅에 왔다.


공교롭게도 1894년은 조선 역사에서 

큼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진 해였다.


1월 동학농민운동


6월 갑오개혁


8월 청일전쟁


그 중에 갑오개혁과 청일전쟁 사이에

조선을 방문한 것이다.


전문 여행가라서 그런지, 그의 견문록은

단순한 관찰에 치우치지 않고


정치와 사회체제와 맞물려 

상황을 엿보고 있고


동시대의 다른 나라와 비교하며

날카로운 메시지까지 들려주고 있어


"아! 이래서 조선이 발전을 못했구나."


라는 메시지를 

시도 때도 없이 각인시켜주고 있다.


과연 어떤 내용이길래 그런가?

한번 알아보도록 하자.




조선의 일상 생활


● 멀리서 본 서울


① 서울로 가는 길


총칼로 무장한 일본군이 

주변을 순찰하고 활보를 하고 다녀도


조선의 농부들은 

밭에서 평화롭게 일하고 있다.


이들은 일본군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하긴 왜 그런 

걱정을 하겠는가?


일본군보다 조선 정부가 

더 심각한 피해를 끼치고 있는데,


조선 정부는 마지막 푼돈에

마지막 쌀 한 톨까지 빼앗아가지 않았나. 

(헤세 바르텍, 조선 1894년 여름 p.75~76)

 


서울로 연결된 길은 

매우 초라하고 다니기가 힘들어


처음 서울을 방문하는 

이방인을 놀라게 했다. (p.76)



② 서울의 첫인상


서울은 아마도 호텔, 여관, 찻집이 없는

지구상에서 유일한 '수도'일 것이다.


이곳에 체류가 허락되는 유럽인은

오직 외교관과 선교사뿐이다.


하지만 10년 전만 해도 

외교관과 선교사들에게도 폐쇄된, 


전혀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땅이었다. (p.77)



③ 남산 위에서 본 서울


남산에서 내려다 본 서울은

마치 황량한 황무지와도 같았다.


땅바닥과 거의 구분이 안 되는 

납작한 황토빛 초가집 투성이에


도로도 없고, 고층 건물도 없고

나무들과 정원도 없었다.


형언할 수 없이 슬프면서도 

기묘한 이 광경은 


야성적으로 솟아 있는 주변 산들로 인해

숭고한 인상마저 준다. (p.77)

 

▲ 서울 도심에는 기와집이 많았지만, 외곽으로 갈수록 초가집이 많았다


그런데 황토빛 도시에서

오아시스 같은 곳을 발견했다.


푸른 나무들도 보이고

여기저기 번듯한 기와집도 보였다.


 헤세 바르텍

"저 건물들은 뭡니까?"


 통역

"왕궁입니다."


 헤세 바르텍

"왕궁이라고요? 저게?"


왕궁이라는 말에

다시 느낌이 180도 달라졌다.


그러니깐 이 작고 

눈에 안 띄는 건물들이


500년 동안 조선을 지배해왔던

이씨 왕조의 궁궐이라는 것이다!


나는 시암(태국), 버마, 캄보디아에서와 같은 

왕궁을 기대했는데, 

▲ 19세기 시암의 왕궁


내 눈앞에 보인 것은 

정말 초라한 규모의 건물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여행했던 곳에서는

아무리 도시 외관이 초라해도 


높다란 사원이 최소한 하나씩은 있었는데, 

이곳은 아예 없었다. (p.81~82)



● 가까이에서 본 서울


① 가까이에서 본 서울


가까이에서 본 흙집은

역시나 초라했다.


다 쓰러져가는 집에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단 말인가?


기와집이라곤 

드문드문 보일뿐,


그것들도 초가집과 같은 

2.8m 높이 정도로 작고 납작했다. (p.90)


서울을 통틀어 2층 높이의 건물은 

두세 채에 불과할 것이다.


또 흙벽으로 이루어진 집들은

나무 기둥들이 죄다 굽고 휘여져 


마치 의도적으로 

직선을 피한 것처럼 보였다. (p.79)



② 허물어진 성곽


그나마 서울에서 

가장 인정받을 만한 건축물은 성곽이다.


중국의 여느 도시들처럼

서울도 20km 길이의


엄청난 성곽에 둘러싸여

팔방으로 문이 뚫려 있다.


그리고 이곳의 성문이

바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이 문들은 땅거미가 지는 저녁때 닫혔다가 

이른 아침에 다시 개방된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엄격해야 할까?


도시의 성곽은 여기저기 무너져 있고, 

전혀 수리할 생각도 하지 않는데 말이다.

 


쓰러져가는 성곽 주변에는

이곳을 지키도록 배치된 


수십 명의 보초병들이 있는데

이 부대 정도면 


단 며칠 만에 

파손된 곳을 고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들은 하루종일 

빈둥거리고 있을 뿐이다. (p.79~80)



③ 문화재 보존 현실


서울의 옛 절 터에서

하얀 석탑 하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더러운 흙집 사이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는데


나는 이 석탑을 보기 위해

똥으로 가득 찬 골목길을 철벅이며 걸어가야 했다.


또 서울의 다른 곳에서

4.5미터 높이의 기념비를 발견했는데


아름다운 조각으로 장식된 이 비석은

돌로 만든 거북이 위에 서 있었다.


하지만 기념비는 온통 오물 투성이었고

무너져가는 흙집의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였다면 오물을 닦아내고

안전 격자를 둘러 소중하게 다루었을 터였다. (p.82)

▲ 광화문 앞 해태 위에 올라선 아이


신분 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양반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비석치기'라는 놀이가 행해졌으니,

비석에 돌멩이를 던져 맞추는 놀이였는데


당시 조선에는 곳곳에

송덕비, 충신각 등 비석이 널려 있었지만


수탈을 일삼는 양반네들의 

덕을 기란다고 비석까지 세웠으니


송덕비 앞을 지나갈 때면

욕석을 늘어놓기 일쑤였고


때로는 발길질을 해대며

울화통을 풀기도 했고


아이들에게는 아예

'비석치기'라는 놀이까지 생겨난 것이다.


비석을 깨뜨리기도 하고

똥칠을 하는 경우도 있어서


조선시대 비석들은

수난에 시달려야 했다. 



● 오물로 가득찬 도로


① 서울의 거리 풍경


서울의 길은 좁기 때문에

그 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다른 길들을 여럿 놓아야 했으니

길이 마치 미로 속과 같았다.


집들은 오물과 쓰레기를

그대로 집 앞에 버려 상당히 더러웠고


7~8세의 발가벗은 아이들이

길에서 그냥 용변을 보는 일이 흔했다.


여름철 집 안은 너무 덥고 습하고 

어둡고 해충도 많아서


사람들은 모든 집안일을 

길거리에서 처리하고


밤이 되면 집 앞의 땅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잔다.

▲ 지게를 베게 삼아 낮잠자는 일꾼


하지만 여기저기 치우지 않은 쓰레기가

조그만 산을 이루고 있고,


피해갈 수 없는 

더러운 녹색 웅덩이들이 있었다.


비라도 오면 복사뼈까지 

진창길에 빠지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곳이다. (p.91)


이런 모습은 모로코의 탕헤르나 페스, 

혹은 중국의 광저우와 비슷했다. (p.84~85)



② 서울의 거리 청소


그러면서도 서울은 결코 

건강에 해로운 곳이 아니며 전염병 발생도 드물다.


그 이유는 겨울이 매우 혹독하여

추위가 전염병의 등장을 막고


여름에는 엄청난 비가 쏟아져

오물을 씻어가기 때문이다.


그래도 남은 오물들은 

개들이 먹어치운다.


이곳의 개들은 가장 충실하고 

집도 잘 지키는 쓰레기 청소부다.


음식 찌거기, 심지어 인분조차도

쌓이자마자 개들의 차지가 된다. (p.85~86)



③ 서울에 대한 소감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도시 중에서도

서울은 확실히 가장 기묘한 도시다.


25만 명이나 거주하는 

전 세계 대도시 중에서


5만여 채의 집이 대부분 

초가지붕의 흙집인 곳이 또 어디에 있을까?


거리로 그대로 하수를 내다 버려

도랑이 되어버린 도시가 또 있을까?


서울은 산업도, 굴뚝도, 

유리창도, 계단도 없는 도시,


극장과 커피숍이나 찻집, 공원과 정원,

이발소도 없는 도시다.


집에는 가구나 침대도 없으며

대소변을 직접 거리로 내다 버린다.


남녀 할 것 없이 모든 주민들이 

흰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다른 어떤 곳보다 더 더럽고 

똥 천지인 도시가 세상에 또 어디에 있을까?


종교도, 사원도, 가로등도, 상수도도, 

마차도, 보도도 없는 국가가 또 어디에 있을까? (p.83~84) 



● 개고기를 즐기는 대식가


① 개고기가 인기있는 이유


조선인들은 개고기를 

유난히 좋아한다.


'양념에 무친 개 머리고기'나 '개꼬리곰탕'은

조선인들의 별식이다.


푸줏간 주인은 매일 개고기를 팔려고 내놓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정부는 서울에서 매일 소 한 마리만

도축하도록 허용하고 있어, 


많은 인구에 비해 육류의 양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p.85~86)



② 엄청난 대식가


조선인들이 '대식가'라는 점에서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이웃이 자신들보다

세 배나 더 많이 먹는다고 말하는데, 


중국인, 일본인, 조선인이 

거의 같은 비율로 살고 있는


항구 도시 제물포에서 보니,

정말로 그랬다.


중국인과 일본인은 일정한 시각에 식사를 하는 반면,

조선인들은 아무 때나 먹는데,


믿을 수 없이 많은 양의 밥이 

커다란 붉은 고추 한 줌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진다. (p.86)

▲ 왼측에서부터, 현대 → 80년대  70년대  50년대  구한말 밥그릇



● 흰옷만 입는 사람들


① 흰옷만 입는 사람들


조선인처럼 깨끗함과 불구대천의 원수인 민족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특이한 점은 이들은 오물 한가운데 살면서도 

흰옷을 입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몸이 지저분해져도 

목욕을 하지 않고


머리카락과 수염에는

결코 가위를 대지 않으며,


거주지는 묵은 때와 

해충으로 가득하다. 


그런데도 이들의 민족의상은 

아랍인들의 의상보다 더 하얀색이다!


바지저고리, 치마저고리, 버선,

속옷, 외출용 도포까지 모두 하얗다.


그러니 불쌍한 여인네들은 

빨래하고 다림질하는 데에 하루의 반을 써야 한다.



② 유럽의 의상을 볼 수 없는 곳


오늘날 아랍인, 페르시아인, 인도인들까지도

에나멜 가죽으로 된 구두를 신고


중국인이나 태국인들까지도

평소 중산모를 쓸 정도로


유럽 의상이 전 세계에 퍼졌지만

조선에서는 어느 것 하나 볼 수 없었다. (p.203)



③ 화려함을 거부하는 여인들의 복장


이 나라에서는 아무리 귀부인의 옷이라도 

무늬가 새겨진 옷감을 본 적이 없다.


기생이나 무희의 경우 

화려한 색의 옷을 입지만 


옷에 무늬가 그려진 것은 

결코 본 적이 없다.

▲ 조선시대 기생

▲ 에도시대 게이샤


▲ 청나라 궁녀



다만 특이한 것은, 유아복 같은 것을 입는

조선 여인들의 옷 스타일이다.

 

모든 옷이 너무 짧고 꽉 끼어서

어쩔 땐 보기 민망한 수준이 되어버린다. (p.203~204)


하지만 누구를 위해서

여인들은 외모를 가꾼단 말인가?" 


조선의 여자들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남자들의 노리개였다가, 


나중에는 

노예 상태가 되고 마는데.. (p.204)



● 남성들의 게으름


① 남자는 놀고, 여자는 일하고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비좁은 골목길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남자들이 일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남자들은 하루 종일

곰방대를 입에 물고 빈둥거리거나,


골목길 한가운데 옹기종기 모여 앉아 

노닥거리거나 낮잠을 잤다. (p.87)

 


반면에 조선에서 여성이 

한가롭게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으며


남성과 함께 있는 것도 

본 적이 없다.


남자들이 집 앞에서 잠을 자거나

담배를 피우고 노는 동안 


여자들은 집 안이나 마당에서 

쉬지 않고 일을 했다.


힘든 일도 척척 해냈다.

끙끙거리며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고, 


어린시절부터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살았던 여인네들은,


이런 놀라운 장면도 

곧잘 연출한다.

 


밭에서 일을 했고, 무거운 짐을 날랐다. 

또 밤늦게까지 길쌈을 하고 다림질을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보면

이미 조선의 여인들은 일을 하고 있었다. (p.201)


바로 여기서,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 민족일수록

문화 수준이 낮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p.87)



② 남자도 담배, 여자도 담배


조선의 여성들은 짐 싣는 동물보다 

나은 존재가 아니다. 


그녀들의 유일한 친구는 

곰방대처럼 보인다.

 

▲ 아이를 안고 소타는 여인네, 한 손에는 곰방대가 쥐여있다


조선의 남녀는 다른 어떤 나라 사람들보다 

담배를 많이 피운다. 

 

▲ 아버지 등에 업힌 딸도 편안하게 한모금

 

길 가다가 곰방대를 들고 있지 않은 남자를

만나기란 드문 일이며, 


잠자거나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

하루 종일 담배를 피워대는 것 같다. (p.87)

 



③ 일을 열심히 해야할 이유가 없다


사실 조선인들은, 열심히 일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무엇을 위해 일한단 말인가?


조선 남자의 욕구는 

그리 크지 않다.


그저 조그만 집에

소박한 살림 도구면 족하다.


만약 담배나 약간의 고기를 

살 돈이 필요하다면


잠시 다른 집에 머슴 일을 하거나

아내에게 며칠간 머슴 일을 시키면 그만이다.


만일 그들이 정말로 많은 돈을 번다면

곧 관리들에게 빼앗길 것이다.


관리들이야말로 조선의 몰락과 가난함의 

가장 주요한 원인이니,


그들로 인해, 조선은 '이윤 추구'와 '노동의욕'

'모든 산업'까지 질식되고 말았다.


 

"싹 다 쓸어가자."


고로 서울보다 일을 적게 하는 도시는 

이 세상에 아마도 없을 것이다. (p.87~88)



④ 호객행위가 없는 나라


인도, 중국, 일본 등지를 여행하다 보면

어떤 도시들이나 


이방인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상점마다 온갖 귀중품을 펼쳐놓는다.


"이것 좀 보고 가요.

싸고 정말 좋습니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오히려 내가 

상인을 불러서 물건 좀 보자고 부탁해야 했고


그러면 상인들은 

주섬주섬 조악한 물건들을 꺼내 놓는데,


모자, 곰방대, 종이, 칼, 부채 

놋쇠 그릇 따위가 전부였다.


예술가나 수공업자들은 

서울에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물건을 만들어봤자

살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p.88)



● 여성들의 기구한 삶


① 여자들은 천한 존재


이슬람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조선 여성들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집안 깊숙한 곳에 머물고

가까운 친척들만이 이들에게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친척들도 

실제로 그러는 경우는 많지 않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천한 존재이므로


그들과 대화하거나 소통하는 것은 

품위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201)



② 귀여운 댕기머리의 정체는?


조선의 남쪽에 있는 부산을 통해

이 나라를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빈둥거리는 조선인들 틈에서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들을 보았다.


이들은 남자들과 아주 친한 것처럼 행동했고

자유롭게 돌아다녔으며


자기들끼리는 물론 

남자들과도 시시덕거렸다.


이들은 바지저고리를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여인들은 예쁘고 신선한 얼굴과 

등 뒤로 흘려내려 땋은 머리 덕분에 금세 눈에 띄었다.


나는 덴마크인에게 

이 예쁜 아가씨들에 대해서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흥겨운 얼굴로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조선에 처음 온 사람은 

항상 그런 질문을 하지요."


"소녀처럼 보이는 이 아이들은 

사실은 남자들입니다."



"정말 아가씨라면 당신은 

결코 쉽게 볼 수 없을 겁니다." (p.202)



③ 이름없는 여인들


여자아이들은 다른 자매들과 

구별되기 위한 목적으로 이름을 부여받으며,


그 이름은 결혼할 때까지 유지될 뿐,

부모와 친척들만이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들은 

'아무개의 딸', '아무개의 자매'라고 불리고


결혼을 하고 나면 

그 이름조차도 없어진다.


또 아이가 생기면 그때부터는 

'아무개의 어머니'라고 불린다. (p.204)



④ 남녀유별의 사회


유럽에서는 조선인의 풍속이 

일본과 비슷할 거라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일본에서는 남녀 간의 왕래가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로운 반면,


동양에서 조선만큼 

정숙한 여인들도 없었다.


조선에서 상류층 남자는 

부인과도 자주 왕래하지 않았으니,

▲ 상류층 양반가에서는 7살이 되면 남녀칠세 부동석을 실천했다


이슬람 국가에서처럼 

남자들은 집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사랑방에서


방문객이나 친구를 맞이하며, 

여자들은 함부로 드나들 수 없게 한다. (p.205)

 



⑤ 양반가의 규수들


만약 외간 남자가

지체 높은 여인의 집에 침입이라도 한다면


여인은 

소리를 지르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죄가 있든 없든 

남자가 집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 


이름을 더럽힌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거주하는 곳은 

법을 집행하는 사람조차도 들어설 수 없기 때문에


죄를 져 쫓기는 처지에 있는 양반들에게는

좋은 피난처가 된다.


다만 대역죄의 경우에는 

예외가 인정되며,


이 경우 모든 가족뿐 아니라 

여자도 죄인 취급을 받고 노비로 내쳐지게 된다. (p.205)


만약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여인들의 거처로 향하는 문이 닫힐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다가 

집안으로 들어올 수 있고


만약 집주인이 

지붕을 고치려 한다면,


우선 이웃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이웃집 규방의 문과 창문을 닫도록 준비시켜야 한다. (p.206)




조선의 사회 제도


● 조선의 교육


① 조선을 짓누르고 있는 중국의 학문


조선이 중국이 아닌 다른 민족을 

이웃으로 두었더라면


오늘날 조선인들은 기본 교양과 교육에서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것이다.

 


이 나라는 수쳔 년 동안 

오직 중국하고만 밀접한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거대한 중국 제국은 

조선인들의 정신적인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중국에서는 옛 경전을 연구하고 아는 것을 

학식의 최고로 여겼는데, 


이는 조선도 사정이 마찬가지여서

다른 학문과 지식들은 완전히 경시되고 있다. (p.210)

 


때문에 조선의 학문은

마치 중세 유럽을 연상케 한다.


중세 유럽에서 라틴어와 신학 연구가 

학문의 전부였던 것처럼


조선에서는 동양의 라틴어인 중국문자와 

중국의 유학이 학문의 전부인 것이다.

 


다만 중국인들도 제대로 해석하기도 힘든 

부자연스러운 문법으로


조선인들은 중국의 옛 현인들의 말과 

역사, 속담들로 가득 채워 문집을 만드는데,


사실 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없었고


시험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글일수록 


사람들은 글을 쓴 사람을 

대단하게 여긴다.


그렇다. 조선의 자연세계와 철학은

2400년 전 공자 시대의 그것이며,


교양 있는 조선인들도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인들을 야만인이라고

한없이 깔보고 있다. (p.211)



② 조선의 학교


서당이나 부유한 집안의 가정에서는

아이들에게 25개의 철자로 구성된 


간단한 조선식 알파벳(한글)을 가르치고,

기초 한자(천자문)도 가르친다.


이슬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도 아이들은


교사를 둘러싸고 

바닥에 쪼그려 앉는다.


아이들은 교사가 읽은 것을 따라 외치는데,

소리가 크면 클수록 좋다.


상당수의 국민이 글자를 쓸 줄 아는데,

이는 예를 들어 이탈리아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다. (p.212)



③ 조선의 지리교육


아직도 조선인들은 고대의 그리스인처럼

지구가 평평한 판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서울에 올 때 

아주 특이한 지도를 가지고 왔다.


그런데 이 지도는 중국이 아닌,

조선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지리 수업의 기초로 

사용하고 있었다.

▲ 바르텍이 언급한 '천하지도'


하지만 어디서 들었는지 

지도에는 아메리카 대륙까지 들어가 있었다.


일본은 당연히 

조선보다 작게 그려져 있다.


하지만 지도에서 실제 나라 이름은 

중국과 일본, 만주 셋 뿐이었다. (p.213~214)



④ 과거 시험


조선의 공무원을 선발하는

과거 시험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시험장은 궁궐의 정원 뒤쪽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에서 치러지는데


이때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자리다툼이 치열하다.


하인들은 노란 기름종이로 된 

커다란 양산으로 주인을 가려주고 


식사를 준비하고 

시중을 들기 위해 근처에 남아 있는다.

▲ 조선 후기의 과거 시험장 광경


그렇게 한참을 문제를 풀고 나면,

응시자들은 과제물을 둘둘 말아


정자를 둘러치고 있는 

차단막 너머로 던진다.

▲ 이곳으로 답지를 던진다 ☞ 참고


그러면 병사들이 두루마리를 집어

심사관에게 건네주고


심사관은 이것을 읽은 후

왕이 평가할 수 있도록 넘겨준다.


하지만 모든 일은 

아주 빠르게 진행된다.


단 몇 시간 만에 시험이 끝나고 

시상식이 이루어지니 말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이걸 진지한 시험이라고 

말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시험은 형식적이었으니,

관직은 가장 많은 돈을 내놓은 사람에게 


비싼 값으로 팔리고

왕의 확인을 얻기 위해 제출될 뿐이었다. (p.219~220)



● 조선의 군대 제도


① 120만 명의 군인을 가진 나라?


전 세계 수많은 군대를 봤지만

조선의 군대는 가장 기이한 군대로 보인다.


조선 정부의 공식 목록에서

군대의 인원이 120만 명이라는 것을 봤다.


하지만 수도의 방위와 왕궁의 감시를

일본의 군대가 맡고 있고, 


왕과 대신들은 

사실상 일본인들의 포로다. 


이 모든 것이 조선인들에게 

전쟁이 선포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일어났다.


일본군 1개 여단이

조선에 상륙했을 때


조선의 120만 군인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p.145)



② 돈을 내면 군역을 면제 받았다


조선의 '군제'에 따르면 

사지가 멀쩡한 모든 남자는


양반 계급에 속하지 않는 한 

군인의 의무를 지며, 군인으로 등록된다.


이것이 바로 120만이라는 숫자가 

나오게 된 배경인데,


하지만 군인 중 99%가 

평생 한 번도 


무기를 잡아본 적이 없으며,

군복을 입어본 일도 없다.


조선의 무관들이 뇌물을 받고 

이들의 군역을 빼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뇌물에 맛을 들인

무관과 하급 관리들은


몇 세대 전에 죽은 이의 이름까지 

군역 명부에 올리며 뇌물을 뜯어내고 있었다. (p.145~146)



③ 서울의 상비군


서울의 병사들은 상비군들로서 

주로 수도 주변의 마을에서 차출되는데,


이들은 특정한 근무 기간이 

있는 게 아니어서


대부분은 평생 직업군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처음 입대할 때

군복을 위한 옷감을 지급받게 되는데,


그러면 이것을 직접 깁거나 

누군가에게 깁도록 시키고


신발과 모자는 

자신들의 봉급으로 구입해야 한다.


이들은 근무 중에 

하루 세 끼 밥, 된장국, 생선을 지급받고


3일간 왕궁에서 보초를 서고

그다음 3일은 휴가가 주어지는데


집에 돌아가서는 대부분 밭을 경작하며 

가족을 먹여 살린다. (p.147)

 



④ 유럽식 제도를 수용한 조선군


1881년에 조선 군대는 

새로 조직됐다.


1876년까지 완벽한 폐쇄국가였던 조선에도 

현대 문명의 입김이 감지된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렇다.


 통역

"법랑국(프랑스)과 미리견(미국)의 양인들이

우리 요새를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통역

"우리는 용감하게 격퇴했지요."


하지만 서양 선교사들의 말에 의하면

당시 조선군의 피해는 상당했다.


활과 화살, 낡은 화승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은


현대식 레밍턴 총 앞에 

상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 강화도에 상륙하고 있는 미군


이들은 두꺼운 솜으로 된 

갑옷(면제배갑)을 입었지만


레밍턴 탄알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것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때문에 군대를 정비하기 위해 

두 명의 미국인을 교관으로 임용하게 되었는데,


이들 중 한 명만이 

군인으로 복무한 경험이 있을 뿐이었다. (p.147)



● 조선군의 현실


① 열악한 무기 


수도의 성곽을 둘러보면

변변한 대포 하나 없다.


이는 지방도 마찬가지여서

프랑스 선교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지방의 모든 대포들은 

병사들에 의해 이미 다 팔린 상태였다."


지방의 군영에 가봐도

녹슨 고철 덩어리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의식이 있는 무관이

열악한 상태를 정비하려고 하면


하급 관리들이 합심하여 

반기를 들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뭣하나 

제대로 고쳐지지 않는다.


"화포를 새로 만들자는 말입니까?

돈은 어디서 구하시렵니까?" (p.147~148)



② 열악한 기병대


조선의 군대에는

기병대도 낙후했다.


조선의 작은 조랑말은

독일의 작은 당나귀만 했고


왕조차도 이런 

볼품없는 말을 타고 다닌다.


물론 조선의 조랑말은 생긴 것과 달리

사납고 끈기가 있었지만


짧은 보폭으로 

어슬렁거리며 걷기 때문에 


외국의 외교 사절들은 

급히 길을 가야 할 때면


조선의 조랑말보다는

차라리 가마를 타고 간다. (p.148~150)



③ 천대 받는 군인들


무관의 공식 시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돈으로 살 수 있다.


다만 중국에서와 똑같이, 

무관은 문관만큼 존경을 받지 못한다.


예를 들어 바퀴 달린 가마(초헌)를 타는 것도

오직 문관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 원래 초헌은 2품 이상 고관직만 탈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사진은 연출인가? 고위 문관이 갑옷을 입은 건가?


게다가 군대의 연대장급 이상의 지휘는

무관이 아닌, 문관이 겸하고 있었다.


당연히 조선에서는, 유럽 군대와 같은

계급 체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p.151)



④ 무능력한 무관들


대다수의 무관들은

군제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다.


200년 동안 이 나라는 평화로웠기 때문에 

전쟁 경험을 할 기회가 전혀 없었던 탓이다.


게다가 8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으로 여행하는 것 외에는


조선인이 고국을 떠나는 일도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다른 나라의 군대 조직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었다. (p.151)



⑤ 규율이 없는 군대


병사들의 피지컬은 대단히 훌륭해서

중국 병사들보다 훨씬 낫고


난쟁이처럼 작은 

일본인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서울에서 내가 볼 수 있었던 병사들은

모두 150~173cm 정도였다.


대부분 건장하고 우람했으며 

영양 상태가 좋았다.


하지만 지휘체계나 규율이 없어

이들은 전쟁이 나면 도망치기에 바빴다.


올해 초, 조선군은 

반란군(동학군)에 쫓겨 달아났는가 하면,

 


일본군이 왕궁을 점거했을 때에도

놀라 달아나기 바빴다. (p.151~152)



● 매관매직과 탐관오리


① 부패한 관리


다른 나라에서는 관리가 

군주와 백성들 사이를 중재하지만


조선에서는 관리들이 

왕과 백성을 서로 분리시키고 있다.


이들만이 궁중에 접근할 수 있으며,

모든 관직은 이들의 수중에 있다.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려도

이들의 착취는 멈추지 않는다.


다만 이들 역시 기생충에게 피를 빨리고 있으니,

바로 외척(민씨 일가)의 무리였다.


가장 높은 관직도 

이들로부터 사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부패를 

왕이 모를 리 없었지만,


수백 년 전부터 뿌리내린 폐해를 

왕은 결코 제거할 힘이 없었다. 


만약 그가 그러한 시도를 한다면 

왕위가 위태로울 것이다.


그러하니, 왕 또한 부조리에 타협하며

스스로도 뇌물을 탐닉하고 있었다. (p.154)



② 매관매직


1894년 런던의 외무부에 보낸 

보고서의 내용이다.


이 나라의 모든 관직은 

뇌물을 통해 구해야 하고


가장 보잘 것없는 관직(아전)만이 

중인들에게 주어진다. (p.154)



③ 탐관오리의 수탈


조선에서 필요 이상으로 부(富)를 쌓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거금을 손에 쥐게 되면,


그들은 돈을 땅속에 묻거나

장롱 속에 숨겨둔다.


그렇지 않을 경우, 관리와 아전들이 

곧바로 달려들어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국세는 아무 의미도 없다.

이 나라의 국세는 


수확량의 약 10% 정도밖에 안 된다.

하지만 관리들이 30~40%를 뜯어간다. (p.155)



④ 동학농민운동


1890년까지 관직은 

2~3년 단위로 팔렸다.


이 기간이 끝나면 고을의 수령은 

대부분 새로운 관리로 대체된다.


"괜찮아. 관직 산 돈은

3년동안 모두 뽑을 수 있어."


하지만 돈에 맛을 들인 민씨 일가는

이런 임기를 1년으로 줄였기 때문에


거금을 들여 수령이 된 자는

매관매직으로 쓴 돈을 메꾸기 위해


2~3년간 수탈할 것을

1년 안에 바싹 수탈을 하게 된다.

 


때문에 올해 초 이 나라에는 

대규모 봉기(동학운동) 일어나게 된 것이다. (p.156)

 



● 조선의 사법 제도의 현실 


① 호패


모든 조선인은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호패를 차고 다녔는데,


백성들의 경우엔 나무로,

군인들의 경우엔 뿔로,


관리와 하급 귀족들의 경우에는 뼈로,

고급 귀족은 심지어 상아로 된 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호패는

항상, 특히 밤에는 꼭 가지고 다녀야 하는데


혹시 하릴없이 싸돌아다니다가

순라군들에게 붙잡혔는데, 신분증이 없으면


당장 가까운 감옥에

가두기 때문이다.

 

▲ 순라군


또 해가 지면 여성들이 산책하도록 

허용된 시간이라


이 시각에 남자들의 통행은 

더욱더 통제를 하고 있는듯 했다. (p.253~254)



② 유전무죄 무전유죄


조선의 사법 조직은 

문서상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실제로는 백성을 조직적으로 

약탈하고 억압하는 도구이자


고위 관료들의 배를 채우고 

사적인 복수를 하는 데에 사용되는 도구였다. (p.252)


조선에서 수령은 고을의 행정권은 물론이고, 

판사 역할까지 겸하는데


그는 그 외에도 여러 책무를 맡고 있어서

송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어


매달 시간을 정해놓고

몰아쳐서 죄수들을 재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도 사또는 

아전이 작성한 문서를 대충 보고 처리하는 수준이다.

 


 아전

"사또, 이 자는 OOO한 죄를 저지른 자이옵니다.

장 60대로 다루시옵소서."


 사또

"뭐, 그렇게 하라."


그러니 재판에 있어 중요한 것은

'아전의 언질'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사건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돈'의 양이었다.


사실 아전들은 정부로부터

아무런 '급료'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러한 뇌물은 

중요한 생계수단이기도 했다.


결국 조선에서 실질 재판관은 

아전이나 진배없었다. (p.254~255)


 아전 

"에헴.."


③ 끔찍한 고문


조선에서는 여전히 

고문이 자행되고 있었다.


가장 일반적인 형벌은

엉덩이와 허벅지를 회초리로 때리는 것이었고 (태형)


더 심한 벌은

몽둥이로 후려치는 것인데 (장형)


실제로 곤장으로 몇대 맞으면

피가 솟아나고 살이 너덜너덜해지고


10대를 넘어가면 살이 모두 해져

몽둥이가 뼈를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선교 달레 신부의 말에 의하면

어떤 기독교인들은 


단 한 번의 공판에서

이런 곤장을 60대나 맞았다고 한다!


곤장형만큼이나 흔한 고문은

주리를 트는 것인데,

 


이는 죄인의 다리 사이에

막대를 쑤셔 넣은 뒤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다리뼈를 휘어지거나 부러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여기에 톱질(줄주리)을 하는 

형벌도 있는데,

▲ 줄주리 (가새주리)


이때는 형졸들이 질긴 끈으로 

다리를 마치 톱처럼 번갈아가며 당긴다.


그러면 끈이 곧 살을 뚫게 되는데

뼈까지 닿으면 형을 마치게 된다.


상황이 이러하니 

죄인이 공판을 받고


자기 발로 걸어서 감옥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때문에 조선의 죄인들은

고문이 무서워서라도


죄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자백을 하고 만다. (p.257~258)



④ 함무라비식 판결


파리의 선교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어떤 양반 아들이 

하인과 다투다가 칼에 찔려 죽었는데


죄인은 곧바로 관아에 압송되었고

피해자의 아버지는, 

 


살해 도구로 사용된 칼을 보여 주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사또는 이렇게 명령했다.


 사또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보여달라"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가해자인 하인을 가르켰다.


아버지는 망설였지만,

주위 사람들이 부추기자,


살인자가 자신의 아들을 찌른 부위와 

똑같은 부위를 칼로 찔렀다. (p.259)



● 조선의 산업


① 조선의 인구


조선 정부는 전국의 인구를 

823만 명이라고 공식 집계하고 있는데, 

▲ 점정인구수에 2배를 하면 대충 실제 인구와 비슷할 듯



실제로 호적에 잡히지 않는 인구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결코 정확한 숫자라고는 

말할 수 없다. (p.291)

▲ 조선초기만 해도 호적인구는 20% 수준밖에 안됐다


일본에서는 12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서양 선교사들은 16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p.300)



② 앞선 인쇄술을 보유하던 나라


조선은 한때 여러 가지 기술을 가지고 있어

이웃나라의 국민들보다 앞서 있었으니


12세기에 벌써 

서적 인쇄술을 알고 있었다.

▲ 하지만 8세기 중엽의 목판인쇄물(다라니경)이 발굴되었다


또 14세기 후반에 

이미 금속활자까지 만들어졌으니


이는 유럽의 인쇄술 발명보다 

100년 이상 앞선 것이었다.

▲ 직지심경


조선은 도자기 기술도 유명해서

17세기 말까지도 


일본인들이 조선의 도자기를

대량으로 구입했었고


임진왜란 때에도 조선의 도공들로부터 

도자기 기술을 전수받았다.

▲ 조선 전기의 백자


하지만 일본인들이 새로 습득한 기반 위에서

무언가를 더 만들어 


마침내 많은 영역에서 

산업을 발전시켜 유명해진 반면,

 

▲ 17세기 유럽으로 팔려나간 일본의 도자기


조선인들은 수백 년 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p.294~295)



③ 로빈슨 크루소의 삶


조선인들은 지붕에서부터 짚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기 손으로 만든다.


즉 조선인 모두가 

로빈슨 크루소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조선에서

산업을 일으킬 수 있단 말인가! (p.295)



④ 분업을 모르는 사람들


조선에도 전문 숙련공은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일본의 장인처럼 작업장에서 일하고

상점을 통해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연장을 가지고 다니며

이 집 저 집을 떠돌아다닌다.


마치 독일 동부와 오스트리아를 떠돌아다니는

슬로바키아 '땜장이들'과 비슷하다.


이곳의 장인들은 광석을 캐는 일까지

모두 스스로의 힘으로 모두 하는데,


형편없는 도로를 통해 

지께꾼에게 품삯을 줘서 운반시키면


비용이 엄청났기 때문에

차라리 직접 채굴해서 녹이고


그것으로 물품까지 

손수 만들고 있었다.


분업이라는 것을 

거의 모르고 살고 있었다. (p.296)



⑤ 발전가능성이 높은 나라


흔히들 조선을 '불모의 땅'이라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가 않다.


조선의 반도는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북부 지방으로 가면 삼림자원도 풍부하다.


또 사계절이 뚜렷하고

다양한 기후를 가지고 있어서


온갖 종류의 농작물이 자라고 있으니

목화, 삼, 담배, 쌀 등이 풍족하게 자란다.


특히 쌀은 이 나라의 

주요 수출품이기도 하다.


이러한 조건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면

엄청난 이점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발전을 혐오하는 가련한 정부만이 

모든 시도를 가로막고 있다.


도둑이나 다름없는 관리들이

국민들을 조직적으로 강탈하는 것은 허용해도


교통로를 놓는 것은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운송 수단이 없는 이 나라는 

각각의 개별 구역들이


넘을 수 없는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과 같았다. (p.300~303)


하지만 조선인들의 내면에는 

훌륭한 본성이 있어서


진정성이 있고 현명한 정부가 주도하는 

변화된 상황에서라면,


이들은 아주 짧은 시간에 

깜짝 놀랄 만한 것을 이루어낼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잽싸고 기민한 일본인들처럼

빠르게 진행되지 않더라도, 


한때 이들의 종주국이었던

중국보다는 훨씬 빠를 것이다.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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