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
저 나라는 정말 이상하게 변해버린 나라다.
결코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다.
대통령의 영마저 제대로 서지 않는다.
국정2인자인 국무총리가 달걀세례, 물세례를 예사로 받는다.
무슨 잘못이 그리 많아, 있어서는 안되는,
범법사항(?)인지, 무례함인지 예사로 저질러 지는 것이다.
다중의 횡포인지, 다중의 절규인지,
다중의 힘이면 善인가?
다중의 절규가 정말로 권력과 금력으로 꽉막힌 절박함을 극복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인지
진정으로 다중의 힘으로 대응 할 수 밖에 없는 절박함인가?
이를 바라보는 양식있는 대다수 국민들은
어딘가에 민주국민으로서의 자긍심과 애국심을 빼앗기고,
이러다 남의 땅되지 않겠는가?
나라조차 빼앗길 우려로 참담한 심정일게다.
원인제공은 권력기관과 권력층의 부도덕하고 어설픈 대응에 있다고 보여진다.
다중의 횡포이든. 다중의 절규가 발붙일 여지를 끊임없이 제공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방산비리, 국정기관, 공공기관의 비리, 정당의 비리가 시도때도 없이 터져나온다.
개.돼지이야기가 국정설명현장에서 예사로 내뱉어지고
여기에, 때만난듯이, 존재경쟁이라도 하듯이
열심히 펌프질 해대는 언론, 시민단체들...
국가미래을 위한 절제되고 품위있는 대응이라고는 찾아볼 길이 없다.
'배부른 소리하고 있네' 하는 듯이 조소와 조롱만이 난무한다.
삶에 찌들고 피곤한 국민들은 이런 막돼 먹은,
막가는 현실에서는 분노에 더하여 허탈감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급속히 진전되고 있는 디지털,정보화사회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팽배해버린 사회풍토에 기인함도 크다.
페어플레이는 실종하고 예사로 돈과 술수만이 난무한다.
민주주의, 자본주의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탓이다.
교육의 문제이기도 하다.
국정설명현장의 고위공무원이나 모 지사의 막말은
세상은 광범히 하고, 급박하게 변해가는 데,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 두렵거나, 스스로 변화할 줄 모르거나
국민들이 세상의 변화를 무질서 하게 받아드리는 사회풍토에 대해
그들 나름대로 불만과 분노의 표출일지도 모른다.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국민들도, 반성해야 할 것이 많을 것이다.
국민들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태연히 저질러지는 범법사항이,
국민개개인일 경우 법에 따른 엄정한(?) 심판과 조치로 다스려지겠지만,
다중의 힘으로 표출될 때는 간단치가 않다.
우리나라는 건국이래, 보수 우익들의 부정. 부패. 무능의 틈바구니속에
좌익선동가, 운동가들, 좌파신문 기자들이 활개치고 다닌 활동 무대였다.
사회운동은 그들의 일터, 살아가는 목적이고 방편으로 변질된 지 오래되었다.
최근에는 SNS등 현대화된 정보전달 수단으로
괴담이 확대재생산되고 여론을 주도한다.
이를 잠재우거나 대응하기 위해
국가기밀마저 여지없이 노출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괴담이 수그러들기는 커녕, 더욱 기승을 부린다.
국가기관의 무능이 적나라하게 표출되기도 한다.
여기에는 태생근거가 불순한 일부 정치세력의 심정적 지원과 동조가
알게 모르게 개입되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특수한 저 나라의 태생적 한계요, 현실이다.
광우병사건, 제주해군기지건설, 용산역사건. 세월호 사건 등에서
우리는 그 因果의 현실을 뼈져리게 목도해오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사드배치지역결정에 대한 여론 또한 유사한 길을 걸어갈 것이라는 우려를 금할 길이 없다.
비판자체는 견제 심리도 있고해서. 대다수 국민들이 그런대로 참을 수는 있지만
정권을 잡으면 정권을 잡은 측의 부정,부패.무능의 행패가 도를 넘고 있고
반대세력은 스스로는 善인양 비판에 거품을 물지만,
그들 역시 정권을 잡으면 오십보백보, 그들이야 말로 개.돼지 보다 더한 놈들이라는 것을
지금의 보수.우익 정권이나 좌파정권을 통해 이미 많은 경험을 한 바 있다.
저 나라는
보수,우익만의 정권도 아니고, 좌파만의 정권도 아니다.
부의 상위 몇%만의 나라도 아니고 부의 몇%만의 하층민의 나라도 아니다.
당대만을 생각하고 떠들고 살 나라는 더욱 아니다,
모두가 어울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가꾸어 자손에게 물러줄 지고지순의 책임과 의무가 있다.
다중의 절규를 다중의 횡포로 치부할 일만이 아니듯이.
'배부른 소리' 로 치부할 일만도 아니다.
그러니
불공정, 부정하고,부패한 권력과 부의 척결
공존이 아닌 독존적 이기주의를 빨리 버리고,
공정한 공공의식,시민의식을 균형있게 발전시켜야 할터인데
누가 그 일을 해낼지, 그런 일이 가능이나 할 것인지
'貧富相生',
모두가 貧한하면, 貧한함이라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
모두가 富하다면, 富하다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富함은 貧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고, 貧함은 富가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상위 몇%든 하위몇%든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것을 서로간에 받아드리는 공존의 지혜기 필요하다.
서로를 인정해주고, 배려해주고, 귀 기울려주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사회가 그립다.
이상화 시인이 바라는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은 그런 나라!
저 나라처럼 아귀다툼하는 세상이라만,
저 나라 평범한 국민들이 어디 살맛이 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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