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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세이.한시.기타자료/유익한 글모음

일상어와 시어, 시와 선시

by 靑野(청야) 2013. 10. 24.

1. 선의 세계는 진정 언어로 표현 불가능한가

 

불가(佛家)의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선(禪)은 본질적으로 언어적으로 표현 가능한 세계의 밖을 지향하는가? 그렇다고 한다면 선의 세계는 경험의 논리나 우리의 상식적 이해 체계를 벗어나 있는 게 분명하다. 따라서 이를 해석학적 ‘이해’나 언어학적 ‘의미’로 붙잡아매려는 시도, 다시 말해 언어적 표현의 세계 안으로 끌어내려 이를 분석하고 해석하려는 시도가 불가에서는 거부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유심》에서도 그 동안 여러 차례 ‘선과 시’에 관한 기획특집을 꾸몄지만, 이러한 경향을 거역하려 했던 글을 찾아보기란 어려웠던 것 같다. 하나 같이 선을 신비의 베일에 감추려는 노력뿐이다. 하지만 이는 언어를 사용해 선의 세계에 대해 설명은 하면서, 그러나 언어를 통해서는 선이 설명 가능하지 않다는 모순을 스스로 범한 것이나 다름없다. 《유심》에서의 대부분의 글들이 예외없이 ‘선(禪)=불립문자(不立文字)’로 등식화하고 있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이를 풀이하면 ‘오도(悟道)는 문자나 말로써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하고 전달받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것이 소통의 장에 놓인 선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 이러한 세계의 전달체인 ‘문자와 말’은 거부하는가? 선을 독해(讀解) 불가능한 ‘신화’로 만들려고 안달인가? 그 누구도 선의 세계를 ‘언어로 표현 가능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 이런 이야기를 하기를 두려워하는가? 선이 ‘언어로 표현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혹여 기어(綺語)의 죄를 짓는 일이라도 되는 것인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필자에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물론 필요에 의해서이긴 하겠지만, 끊임없이 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분명한 자기모순이다. 선의 신화를 고쳐 쓴다는 것 자체가 불교계에서는 철퇴를 맞을 일일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선이 예나 지금이나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해석 불가능한 것으로 늘 신화화되어 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선이 신화화되면 될수록 선은 점점 신비의 베일에 가려질 것이다. 벽을 만들어 오해를 가중시킬 것이다.

 

그렇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끼리끼리 박수치며 만족하는 것으로 ‘선이라는 신화’가 유지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시대가 바뀌었다. 선에 대해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자리매김이 필요한 때이다. 단적으로 말해, 선에 대해 탈신화화해야만 할 때가 온 것이다. 이는 결코 불가능한 도전이 아니라 본다. 하여, 우리의 생각(禪 = 不立文字라는 편견)을 이렇게 바꾸어보기를 제안한다. ‘선의 세계는 언어로 표현 가능하다.’

 

선의 세계는 언어로 표현 가능하다. 최소한 그렇게 믿고 지덕(智德) 높은 선사들이 오도송이나 게송을 남겼을 것이다. 선사가 오도송이나 게송을 남겼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대중, 후학들을 위한 것이다. 요컨대 이런 점에서 선시는 수행승들을 위해 중요한 지도 역할을 한다. 이렇게 ‘난 길’을 참조하여 수행승들은 자신의 수행 정도를 점검하며, 자신이 ‘낼 길’을 위해 더욱 용맹정진하는 것이다. 선시는 결코 무목적적으로 씌여진 것이 아니란 뜻이다. 이를 읽는 자에게서 과연 선시에서 노래한 ‘경지가 제대로 파악되었느냐?’와 ‘그 경지가 언어로 표현 가능하느냐?’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즉 선시가 지도의 역할은 하지만, 이 지도를 읽는 자를 목적지에 데려다 주지는 않는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수행승 자신의 몫이다. 문자나 말로 표현된 선시와 자신을 연결시키는 것도 수행승의 몫이며, 이를 넘어서는 것도 수행승의 몫이다. 그리고 이를 참고해 자신만의 고유한 지도를 만들고, 미답의 세계를 개척하는 것은 더더욱 수행승의 몫이다.

 

이렇듯 선시의 진정한 의미는 그 어떤 경우도 문자나 말로 표현된 것에 있지 않고 그 선시를 읽는 독자인 수행승과 함께 만들어 가는 유기적 대화, 교차에 그 본래적 의미가 있다. 또 이런 이유 때문에 선사들은 득도의 경지가 말로 또는 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그것을 말로, 글로 남기는 것이다. 결국 선시는 작자인 선사를 위한 것만도, 독자인 수행승을 위한 것만도 아니며, 이 둘간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그 진정한 의미가 부여된다. 그리고 이 둘 사이를 연결시키는 매개체는, 재차 강조하지만, 분명 언어다.

 

주지하듯 이때의 언어는 결코 표현된 기표(signifiant)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언어학에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모든 언어는 기표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그 어떤 기표도 하나의 기의만을 갖지 않는다. 즉 모든 기표는 대개 다양한 기의들(signifie큦)을 그 속에 함의하고 있다. 바로 이 다양한 기의들을 읽어내는 작업이 언어를 이해하는 데 있어 관건이다. 겉의 지칭보다 속의 의미가 중요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선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지칭보다는 의미가 중요하며, 그러기에 의미망을 읽어내야 한다.

이렇게 우리의 생각을 기표에서 기의로 전환시키고 보면, 선은 언어로 표현 가능할 뿐만 아니라 언어를 통해 이해 가능하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선사들이 시화(詩話)한 선시라는 것도 앞서 사전적으로 풀이한 불립문자(不立文字)에서의 전건(前件), 즉 ‘문자나 말로 전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이제까지의 편견을 깨고 후건(後件)인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것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결국 중요한 것은 선시에 감추어진 기의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에 초점이 모아져야지, 오직 기표의 논리만을 따져 그것이 ‘말이 되네, 그렇지 않네’라고 분별하는 것은 선에 대한 수준 이하의 평가라 판단된다. 선이 우리의 경험의 논리나 상식적 이해 체계를 벗어나 있다는 것 또한 이런 맥락에서 논의되어야만 할 것이다. 수행자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범부들까지도 선사들의 오도송이나 게송을 따라 읽고 이해하며, 이에 감흥을 받는가 하면, 실제 자신의 삶의 지표로 삼는 경우도 있는데, 이와 같은 경우를 모두 참조할 때, 선은 분명 기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기의와 직접 연관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새삼 인지해야 할 것이다.

 

또 이런 상황이라면 선의 세계가 비록 언어 밖의 세계를 겨냥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동시에 언어 안의 세계에 일정 지분을 갖고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소쉬르 식으로 말해, ‘랑그(langue)’라는 언어틀이 있어 우리는 선의 세계를 비록 부분적으로나마, 즉 자신의 근기(根器)에 따라 이해하며, 이해한 만큼 그 세계의 일부는 공유되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공유될 수 있는 것이 선이라고 한다면, 선은 이제 특수한 집단 내에서만 통용되는 ‘방언’이나 ‘은어’ 차원을 벗어나 ‘표준말’로 더욱 보편화되어야 필요가 있다. 보편화될 수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선은 이제까지의 불교 집단 내에서만 통용되는 ‘파롤(parole)’ 차원에서 탈피하여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랑그’ 차원으로 그 범위를 확대시키려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선시를 논함에 있어 반성해야 할 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결국, 불립문자에서의 전건만으로는 선과 선시가 불교계 밖으로 나아가 통용되기는 힘들 것이고, 그런 바 이제 사람들 사이에서의 오해를 막기 위해서라도1) 자기 비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본고에서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가능한’ 하나의 선시론(禪詩論)’을 현대의 몇몇 시학에 관한 논의들을 참고하여 전개시켜 볼까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앞서도 밝혔지만, 선 = 불립문자라는 불교계의 상식(편견)에 도전해 다음 두 가지 사항을 전제로 이 글을 이끌어갈 것이다. i) 선의 세계는 언어로 표현 가능하다. ii) 선시는 기표가 아닌 기의를 통해 충분히 이해 가능하며 소통될 수 있다. 1) 《현대불교》(1990년 10월호)에서는 〈선(禪)을 왜곡시키는 사이버 불서(佛書)〉라는 특집에서 이러한 예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2. 일상어와 시어의 구분

 

일반적으로 우리는 i) 언어를 통해 사물을 기술하고, ii) 언어에 자신의 생각을 실어 타인에게 전달한다. 그런데 이때의 언어는, 주지의, 일상어(langage usuel)이다. 일상어는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그 사용에서 본래적 의미를 발생시킨다. 그는 《철학적 탐구》란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기호 각각은 자체로는 죽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것에 생명을 주는가? 사용에서 그것은 산다.”2)2)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 《철학적 탐구》, 서광사, 1994, p.432. 저자 강조.


 

“사용에서 모든 기호는 자신의 생명을 되찾는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인즉, 기호가 생명을 갖는다는 것은 곧 사람들 사이에서 그것이 사용되고 있을 때이며, 이렇게 사용됨으로써 기호가 갖는 고유한 생명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어 의미를 발생시킬 때 비로소 기호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선택되지 않은 기호는 죽은 부호나 다름 없다.

인간은 이렇게 누구나, 어떤 의미에서건, 언어(행동, 몸짓을 포함한)를 ‘사용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 이성적 동물, 상징적 동물로 정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적 동물(Homo loquax)’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언어적 인간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물을 기술하고 세계를 묘사하며, 자기를 표현하고 타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언어는 인간 삶과 사유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문제는 비트겐슈타인이 정확히 강조한 대로 “언어가 일하고 있을 때가 아니고 헛돌고 있을 때 혼란이 일어난다.”는 점이다.3) 3) 같은 책, p.132.


 

언어가 헛돌고 있다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가 모호하게 사용되고 있거나 문법체계의 격을 벗어나 잘못 쓰인 경우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정확한, 무의미한 언어 사용이 야기할 수도 있는 혼란을 막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사용의 ‘정확성’을 그의 새로운 철학의 이념으로 강조했던 것이다. 또 이런 취지 하에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은 결국 언어의 실제 사용을 단지 기술(記述)할 수 있을 뿐”4) 그 이상이기를 바래서는 안 된다며, 지칭 없는, 대상이 불분명한 언어 사용을 경계했다.4) 같은 책, p.124.


 

그 이유는 철학이 관념론적 철학서들이나 형이상학적 담론들에서처럼 세계를 기술하는 것 이상을 바랬기 때문에 혼란이 빚어졌고, 이 혼란을 바로잡고자 했던 것이 다름 아닌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비판 철학’의 요지이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이 ‘헛도는’ 언어 사용을 경계했던 이유는 우리가 지칭, 내용이 분명한, 말과 사물이 일치하는, 다시 말해 의미가 분명하게 전달될 수 있는 그런 언어만을 구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요구와 주문은 ‘언어적 인간’의 능력에 대한 과소평가이다. 즉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적 인간의 능력 중 그 일부분을 절대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염려했던 것과 달리 실제 현실 생활 속에서 많은 부정확하고, 표현상으로는 비논리적 언어를 대하면서도 전혀 혼란 없이,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전혀 오해하지 않고 잘 사용하고 있다. 하여, 무의미한 말(non-sense)을 더 이상 지껄이지 말고, 그럴 바엔 ‘차라리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요구는 인간과 세계에 대해 지나치게 협소한 한계지음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화자와 청자 사이에 또는 저자와 독자 사이에 매개된 언어가 모두 정확히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간극이나 틈새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간극이나 틈새를 충분히 메울 수 있는, 다시 말해 비가시적인, 비논리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상황을 한 번 상상해보자. 대학 졸업 후 한 10년이 지나 절친한 동창 둘이서 인사동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고 하자. 그러나 서로가 업무로 바빠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악수를 청하며 갑이 을에게 “잘 지냈지?”라고 물었다. 을 왈, “전쟁이다, 전쟁”이라고 대답했다. 갑이 다시, “그걸 이제 깨달았어?”라고 대꾸하면서 자신의 직장 동료들과 벌써 멀어지고 있었다. 을이 멀어져간 갑의 뒤통수에 대고, “그러기에……”라고 대꾸했다.

 

이 대화에서 보듯, 우리는 일단 상대방과 ‘대화하지’, 그 대화의 내용을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그것이 유의미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따지지 않는다.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이러한 대화 내용을 이해하는 데 혼란을 느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구질구질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갑과 을은 서로 상대방의 지난 세월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대화란 대개 이런 식이다. 그런가 하면, “동전처럼 둥근 달이 하늘에 떠 있다”는 문학적 묘사를 접하고서 그건 “말도 안 돼, 어떻게 ‘달’이 ‘동전’이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도 없다. 휄더린 같은 시인의 “그대 시인들이여! 맨머리로 서서/ 신의 빛살을 제 손으로 붙들어/ 백성들에게 노래로 감싸서/ 천국의 증여를 건네줌이 마땅하리라”라고5) 했다고 해서, 이를 이해 못해 혼란스러워 할 사람도 없다. 만일 비트겐슈타인처럼 ‘무의미한 헛소리 마라’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언어적 인간’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언어적 인간이라면 최소한 이렇게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5) 휄더린, 장영태 역, 《궁핍한 시대의 노래》, 혜원출판사, 1990, p.289.


 

여기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정확한 언어 사용이란 것이 과연 정당한 요구인지, 지칭이 정확한 언어 사용만이 언어행위의 전부인 것인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과민반응과 달리 우리는 얼마든지 형이상학적이며, 시적이고 문학적인 표현들을 사용하고 또 무리없이 이해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라는 것은 인간이 두 발로 걷는 존재라는 것만큼 상식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사용’에서 언어의 의미가 발생한다는 것을 비트겐슈타인이나 논리실증주의자들처럼6) 그것이 명제화될 수 있고 또 반드시 검증될 수 있어야만 유의미한 것이라고 언어행위를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인식의 진리, 명제의 진리 또는 검증의 진리 등은 어디까지나 파생된 형태의 이차적 진리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식될 수 없고, 명제화될 수 없고, 검증될 수 없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언어적 인간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다. 언어 사용의 현실은 ‘논리’, ‘진리’가 결코 심급의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6) 논리실증주의자들이 말하는 진술의 의미란 그 진술의 검증방법이다. 즉 우리가 어떤 진술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진술을 검증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형이상학적 진술들이 무의미한 기호들의 결합에 불과하기 때문에 배격되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한구, 《지식의 성장》, 살림출판사, 2004, p.34 참조.


 

이러한 사회적, 공리적 ‘사용’이라는 심급의 밖에서 소통되는 언어 표현의 대표적인 경우가 아마 시일 것이다. 시 역시도 철학에서처럼 일상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시인은 철학자들처럼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를 고정된 하나의 의미나 관습적 표현가치에 고정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시인은 일상어를 재배열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자 한다. 즉 그는 일상어를 선택해 사용하지만 일상어에 머무르지 않는다. 언제나 그는 언어가 기표적으로 지시하는 세계를 초월해 있다. 바로 이를 우리에게 알리고 선사하는 자가 시인이다. 다시 말해, 언어 사용의 최고 형식을 빌어 언어 사용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우리를 인도하고자 하는 자가 바로 시인이다.

 

이런 점에서 시에서 사용된 언어는 비록 그것이 일상어라고 할지라도, 이미 일상어와는 판이하게 다른 세계를 겨냥하고 있다. 일상어와는 다른 언어(autre langage), 즉 세계와의 일상적 관계를 벗어나 있는 시어는 그 특성상 번데기가 허물을 벗고 변태(變態)하듯 일상적 의미의 사용과는 차원이 ‘다른’ 언어에로의 도약을 꿈꾸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일상어를 시어로 변형시키는 주체는 다름 아닌 ‘탁월한’ 시인의 몫이다. 시인에게서 일상어는 비로소 언어의 도구성, 사물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도구성, 사물성을 탈피했기에, 시인의 손을 거쳐 변형된 언어(새롭게 창조된 시어)이기에 일상적 의미의 ‘의미’나 ‘소통’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어 시적으로 창조된 언어를 ‘칼질하는’ 것은 불경한 짓이다. 사르트르의 정확한 지적대로, “의미를 가지는 기호가 지배적인 힘을 누리는 영역, 그것은 산문”의 영역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다.7) 7) 장 뽈 사르트르, 金鵬九 譯, 《文學이란 무엇인가》, 文藝出版社, 1972, p.15.


 

“시는 〔산문과 달리〕 차라리 회화나 조각이나 음악 편이다. (……) 시는 산문과 똑같은 방법으로 말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시는 전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오히려 시는 말에 봉사한다고 하고 싶다. 다시 말해 시인들은 언어를 이용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8) 8) 같은 책, pp.15∼16.


 

만일 우리가 사르트르의 위 의견을 받아들인다면, 시는 언어의 일상적 사용, 상식적 의미망을 벗어나 있는 게 분명하다. 일상어가 한 탁월한 시인에 의해 시어로, 즉 일상어와 다른 언어로 창조됨으로써 비로소 일상어의 근원적 자기도약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자기도약이 없는 식상한 ‘시적’ 표현이라면, 우리는 이를 결코 ‘좋은 시’, ‘훌륭한 시’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는 시와는 꽤 거리가 먼 어떤 것, 즉 사르트르가 말한 산문에 불과한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산문은 기술된 대상(세계)과 그 대상(세계)에 대한 의미에 철저히 갇혀있다. 산문은 비트겐슈타인이 요구했던 대로 언어를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여 대상과 세계를 ‘기술’한다. 바로 이를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고유한 임무라 했다. 이렇게 논리를 따져, 의미를 고려해 ‘정확히’ 기술된 세계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돈 없이 이해되며 소통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점에서 산문(쓰기)과 철학적 글쓰기는 닮은 점이 많고, 그런 점에서 산문은 사고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는 지칭을 통해 의미를 캐묻고 따지는 언어 사용과 사고가 끝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그러기에 시에서 우리는 언어를 그 어떤 도구나 이념의 희생물로 바쳐서는 안 된다. 시어는 지칭이나 의미를 위한 도구가 아니며, 이런 까닭에 사르트르는 “시는 말에 봉사한다.” “시인들은 언어를 이용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라고 강조했을 것이다.

 

새삼 강조하자면, 시인이 “말에 봉사한다.”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언어를 도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도구화된 언어는 당연 그 언어를 사용하는 자와 거리를 갖게 마련이다. 거리가 있으므로 대상을 기술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필연적으로 간극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때 언어는 기술하려는 대상은 물론 이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와도 ‘하나’가 되기 어렵다.

 

다른 경우가 아닌 바로 이때를 일러 우리는 ‘언어가 헛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이미 자신에게 익숙한, 길들여진 언어를 선택할 수밖에 없어 일차적으로 대상 자체와 헛도는 것이며, 대상과 헛돌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이를 기술하는 사람과도 겉도는 것이다. 철학자는 대상을 정확히 ‘기술하기’ 이상을 욕망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비트겐슈타인은 강조하고 있지만, 이는 분명 시짓기(詩作)에 해당하는 경우는 아니다. 차라리 사르트르가 시인은 “말에 봉사한다.”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더 호소력이 있어 보이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3. 시와 선시, 결코 다른 세계가 아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일상어와 시어, 산문이나 철학에서 의미하는 언어와 문학(시학)에서 말하는 언어가 서로 다른 층위의 언어임을 이야기했다. 논의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여기서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다시 한 구절을 더 언급해볼까 한다. 그에 따르면 언어를 도구로써 사용하는 사람에게 있어 언어(기호)란 “유용한 약속이고, 차츰 소모되어서 마침내 쓸모없이 되어 버렸을 때는 내버리고 마는 연장이다.” 그러나 시인에게 있어 언어(기호)는 “초목과 같이 지상에 자연적으로 자라는 자연물이다.”9) 9) 같은 책, p.17.


 

사르트르의 “자연물로서 언어”란 하이데거가 말한 “시원적인 근본낱말”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시원적 근본낱말은 이기상의 설명에 따르면 “자연에 응답하는 언어”로, 이는 인간 존재의 최고의 가능성이 구현된 것이다. “시인이 본질적으로 응답하고 있는바 바로 그것은 시원적 근본낱말에서는 ‘자연’이며, 이것은 성스러움을 다르게 사유하는 차원이다.”10)10) 이기상, 〈하이데거의 시적 언어와 근대성〉, 《현대시》, 1999년 4월호, pp.19∼38 참조.


 

그런바 시에서의 언어는 “마침내 쓸모없이 되어 버렸을 때는 내버리고 마는 연장”과 구분되어야 한다. 시어는 스스로 생명력을 가진 자연물이기 때문에 연장(도구로서 언어, 인간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언어)과는 다르다. 사르트르가 “시인에게는 의미까지도 자연적인 것이 된다.”11)고 말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11) 사르트르, 앞의 책, p.17.


 

하여, 앞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적 인간의 이와 같은 성스러운 경험까지도 소통의 장 안에서 특수한, 국부적인 경험으로 환원시키려했던 처사를 비판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언어는 명제로 표현되어야 하고 그 명제 속에 기호들의 의미가 부여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모래톱의 모래알에나 적합한 이야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랍 속담에서처럼, “할 말이 침묵보다 낫지 않다면 말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형이상학적 진술들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침묵하라”는 것과 “할 말이 침묵보다 낫지 않다면 말하지 않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보면, 시는 근본적으로 침묵할 수 없기에 하는 말이다. 선시는 인간의 생각이 끊어진 곳에서 피어난 자연의 꽃이다. 즉 침묵할 수 없어 생겨난 것이 시이고 선시이다. 그리고 이때의 시인(선사)은 “그저 말하는”는 산문가 또는 철학자와 다르다. “그저 말하는 사람은 언어활동에 있어 〔주어진〕 상황 속에 있으며, 이를테면 말에 포위되어 있다. 이때 언어활동은 그의 감각의 연장이어서 핀셋이며 안테나며 안경 따위와 다름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저 말하는 사람”에게는 언어가 언제나 본질적인 것이 아닌 수단에 불과하다.

 

이에 반하여 “시인에게 있어서 언어는 외부세계의 한 구조물이다.” 여기서 ‘외부 세계’란 다름 아닌 언어 사용권 밖, 의미 체계 밖의 세계이다. 때문에 시인은 일상어의 이해 체계 밖에 존재하는 무한 공간과 자신과의 끊임없는 교환 과정에서 자신을 개척하고 창조해 간다. 시인은 바로 이 외부 세계를 끌어안아, 이를 자기 속에서 내면화시키고 시화(詩話)하는 자이다. 결국 “시인은 마치 인간조건에 속하지 않는 듯이 말을 거꾸로 보는”12) 자인 셈이다. ‘거꾸로’, 즉 그에게 보이는 세계를 다르게 봄으로써 시인은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창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시인에게는 〔이제〕 언어밖에 없다.”13) 12) 같은 책, p.18. 13) 같은 책, 같은 페이지.


 

그런 그가 신기한 말이나 문자에 팔릴 리 없다. 그에게는 언어가 도구가 아닌 전부이다. 언어는 시인에게 살이자 영혼이다. 지나친 동일화일지는 모르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선시의 경우도 넓게 보아 사르트르나 하이데거가 위에서 말한 시에 대한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판단되며, 이런 이유 때문에 불립문자나 언어도단을 전방에 내세워 선의 세계는 ‘언어로 표현 불가능하다’고 수동적으로 말하기보다 ‘언어로 표현가능하다’는 적극적 사유 전환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다시 말해, 이제는 언어무용론을 과감히 버리고 언어유용론에 무게를 실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도흠도 〈시가 선이 되고 선이 시가 되다〉에서 이러한 주장을 비치고 있듯이, 만일 시인이 자신의 시를 통해 “낡은 틀을 산산이 해체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고자 한다면, 또 선사가 “집착을 깨고 깨달음을 얻을 때” 그것을 우리가 “선”이라고 한다면!

 

“시는 시인이 새로이 보고 느낀 세계를 언어를 빌어 드러내고, 선은 선사가 깨달은 바를 공안으로 함축한다.”14) 이런 점에서, 언어로, 결국, 선은, 최종적으로, ‘표현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서론에서 언급한 ‘선시는 기표가 아닌 기의를 통해 충분히 이해 가능하며 소통될 수 있다’는 두 번째 전제도 마찬가지이다. 선시는 방편일 수 있으되, 그렇다고 언어가 불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결코 아니며, 어디까지나 깨달음의 징표이다. 14) 《유심》 2003년 가을·겨울호 참조.


 

선과 선시에 관해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언어가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언어는 버려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선과 선시가 지켜지지 않는다. 선시는 선의 구체화이며, 괘(卦)와 효(爻)가 다른 괘와 효를 통해 그 의미가 밝혀지듯, 선은 선시를 통해 백일하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불립문자나 언어도단은 문자나 말을 통해 선의 세계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또는 저렇게 표현된 것들, 바로 그것이 선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경고이리라. 즉 표현된 문자-언어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충고이다. 왜냐하면 선사들에 의해 표현된 문자는 이미 직접적으로 본인의 자기수행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한 이차적 경험일 뿐이기 때문이다. 선-수행은 각자에게 다른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며, 따라서 모방되거나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도(道)는 누구에게나 동일한 길이 아니다. 해탈은 근본적으로 나의 해탈이 목표인바, 이를 타인이 터득한 것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선시가 궁극적으로 도달코자 하는 언어 밖의 세계를 우리는 이런 이유 때문에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공유될 수 있는 해석, 분석의 대상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분석은 대상을 기지(旣知)의 요소로, 즉 이 대상과 다른 대상에 공통적인 요소로 환원시키는 작용”에 다름 아니다. 결국 “분석한다는 것은 사물을 그 사물이 아닌 다른 것을 통해서 표현한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강조하고 있듯 “일체의 분석은 번역이요 부호에 의한 전개”일 뿐이다.”15) 15) 앙리 베르그송, 이광래 옮김, 《사유와 운동》, 문예출판사, 1993, p.195.


 

결국 선시는 베르그송의 지적대로 알음알이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데서 그 본의(本義)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도흠의 말대로, 시가 선이 되고 선이 시가 되기 위해서는, 수행자 본인이 이를 직접 깨쳐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선은 ‘타인’의 이상향이 아닌 ‘나’의 수행터이다. 문자를 위한 것이 아닌 자기 해탈을 위한 것이다. 주체인 내가 ‘자기완성’하는 것이 바로 선이자 선시이다. 그런 만큼 내 스스로가 추구하는 선의 세계는 타인의 것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될 수 없으며, 비교될 수 없기에 비통약적인 절대 세계이다. 우리가 참조해야 할 것과 추구해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도를 읽는 독도법과 그 지도를 보고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은 다른 것이다. 시도 선시도 자기 완성이 궁극 목표이다.

 

4. 자기 수련적 글쓰기로서 선시와 새로운 선시론을 위하여

 

불가에서 말하는 불립문자, 언어도단은 이런 점에서 이중의 함의, 즉 언어의 유용-무용론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선시는 바로 이러한 비타협적인 두 경계 사이에 걸쳐 있으며, 두 경계를 오가며, 넘나든다. 선시는 읽는 사람의 측에서 보자면 선의 경지를 표현한 것이기에 어떻게든 이해되어야 하며, 이해되었을 때 우매한 우리에게 삶의 지표와 거울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선시에서 표상된 것(signifiant)이 이 선시를 통해 어떤 각자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signifie?의 전부인 것은 물론 아니다. 본의는 언어적으로 표상된 것에 드러나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해, 명제화되어 있지 않아 말이 안 될 수도 있다. 〈밤 放禪〉이란 고은의 다음 시를 보도록 하자. “무르팍 시리다/ 어디서 물소리/ 온세상 잠꼬대/ 재채기 서너번”16)16) 고은 시선집, 《삶》, 도서출판 살림, 1989, p.36.


 

이 짤막한 시는 요컨대 백과사전을 들춘다고 해서 풀이될 수 있는 시가 아니다. 언어적 인간인 우리는 그러나 이 시를 큰 어려움 없이 읽어낸다. 세상 등지고 절간에 들어 낮으로, 밤으로 수행 정진하다 잠시 ‘휴식’이라는 것을 취하는 사이, 나를 놓고 있는 찰나, 이를 놓칠새라 비집고 드는 것은 아직 궁금한 속세의 소식이 아니겠는가. 어머님은 잘 계신지? 동무들은 모두 잘 지내는지? 밤의 정적을 깨고 들려오는 물소리에서 수행자는 그 물소리에 뭍어 들려오는 속세의 소식을 발견하고서 짐짓 놀란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를 근절시키기 위해 무르팍이 시리도록 더욱 참선에 몰두했을 것이다. 속 것은 헛 것이라며, 잠꼬대라며! 꿈이여, 잠꼬대여 물렀거라며! 여기서 재채기는 잠시 속 것에 마음이 흔들린 자신을 자책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그의 무르팍이 두 번 시릴 수 있다. 분명 그는 재채기 이후 곧바로 선방에 다시 들어 마음 닦기, 마음 밝히기에 몰두했을 것이다. 그렇게 낮밤 없이 매일 세속, 속세의 때를 벗기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고 또 채찍질했을 것이다. 시인은 한 사람의 대원(大願)을 품은 수행자로서.

 

이렇게 어떤 선시도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법이 없다. 직접적 표현을 피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선시의 요체요, 그것이 바로 읽는 묘미라면 묘미일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참조사항과 본질을, 일상어와 시어를, 기표와 기의를 뒤섞어 이해하거나 혼돈해서는 안 된다. 침묵을 대신하기 위해 선택한 근본어로서 시어, 즉 생명체로서 언어와 쓰고 버릴 도구로서의 언어를 같은 부류의 언어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전자의 의미로 선시가 씌여졌을 때, 바로 그때 우리가 이 글에서 전제한 선은 언어로 표현 가능하며, 기표가 아닌 기의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되며 이해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선시는 비록 소통의 어려움은 있지만 철저히 자기수련의 결정체인 것이다.

 

시인 중에도 시작(詩作)을 통해 마치 수행승처럼 자기수련을 기도한 시인이 있다. 랭보가 그이다.17) 17) 아래 설명은 졸고, 〈랭보의 ‘Je est un autre’에 대한 번역과 해석의 문제〉, 《프랑스 문학의 지평》(도서출판 월인, 2003) 참조.


 

자기수련을 위해 그는 스스로를 타자화시킨다. 그가 바라본 그는 그러나 아직 주체로 뿌리내린 나가 아니요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그저 허덕이며 떠도는 자에 불과하다. 이에 그는 자신의 ‘참 나’를 찾고 진정한 시인(un vrai poe`te)이 되기를 결심한다. 그가 목표로 하는 진정한 시인이란 곧 견자(見者)요, 각자(覺者)다. 시인-견자, 각자-시인은 애꾸눈 지성을 가진 사람들, 유용성만을 삶과 진리의 척도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판에 박힌 주문과 요청으로부터 해방된 자이다. 그는 오직 자신의 영혼을 탐구하고, 이 영혼을 끊임없이 탐문하고 시험하며, 그 과정에서 ‘참 나’를 깨우쳐가는 자이다. 이런 원대한 꿈을 꾸었기에 랭보는 스승 이쟝바르에게 “이제 스승에게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던 것이리라.

 

랭보에게 견자나 각자는 남에게서, 문자를 통해 보고 배우는 데 만족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 속에 내재하는 제 독소들을 걸러내어 오직 그 정수만을 간직하기 위해 철저히 자기 자신에 대해 묻고 탐구하는 자”이다. 이렇듯 견자-각자는 스스로를 밝혀가는 자다. 자기 속의 무명을 벗겨가는 자다. 스스로가 등불이 되어야 또한 세상을 밝힐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밝혀야 우리가 휘둘리는 이 세상이 헛 것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이고, 보는 세계 너머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선사하는 것이 바로 랭보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시인의 임무이자 역할이다. 다시 말해, 모름지기 시인이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언어를 통해 보이는 세계에 제시하고 알려야 한다. 로제 뮤니에는 이러한 랭보의 시관(詩觀)을 “모든 문학 쟝르들의 가능성을 시험해볼 무대”18)라고까지 평가하고 있다. 18) 《랭보의 세계》, 한국랭보연구학회, 숭실대출판부, 1995, p.44.


 

그런 만큼 랭보에게는 무수한 고행이 예비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랭보에게 시작(詩作)을 위해 주어지는 고통, 고행은 자기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 반드시 극복해야만 할 어떤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에게 시짓기는 마치 수련승의 ‘참 나’ 찾기와 결코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씌여진 시란 곧 선시나 다름없으며, 랭보가 추구한 견자는 비록 속세에 거하고 있지만 수행에 몰두하는 선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19) 19) 유평근, 〈랭보 시의 문체와 禪〉, 《시와시학》 제2호(1991) 참조.

 

자기수련적 글쓰기로서 선시는 결국 버려야 할 ‘뗏목’이나 ‘사닥다리’가 아니라 구슬이요 진주다. 침묵하는 대신 무언가를 말하기를 선택했다면, 그때의 언어는 수행의 마름으로서 결-과(結-果)이지 자신을 그 속에 구속시키기 위한 결과(結㎩)나 말이나 문장을 속여 꾸민 수사(修辭)일 수 없다. 선은 산문이 아닌 시로 표현할 수밖에 없고, 때문에 선시는 버려야 할 언어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생명의 언어로 구성된 것이라 해야 옳다. 이 생명의 언어로 인해 선시가 팔만장경 안에서 팔만법문으로서의 효력을 변함없이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를 그리워 하는 자(부처를 像으로 모시고 있는 자)는 입버릇처럼 언어를 버려야 한다고 말할 것이나 부처의 상을 죽인 자는 언어를 부처만큼 사랑할 것이다. 그 자체로 피와 생명을 가진 선시라면, 그것은 수행자가 자기를 완성시켜가는 데 있어 필수적인 밥이요 살이다. 마음을 깨치기만 하면 몸이 곧 부처가 된다고 했듯, 결국 그에게 언어가 장애가 될 수 없다. 그것이 더더욱 인공어가 아닌 자연어이고 깨침의 언어라면! 고산 스님도 《조사(祖師)의 선화(禪話)》에서 강조하고 있듯, “선(禪)은 언어와 문자 이전의 소식이라 필설(筆舌)로써 표현할 길이 없지만, 그러나 언어와 문자를 여의고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선가에 전해내려오는 1천7백 공안, 문답 내용이 모두 언어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쓴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며 어려운 일이다.”(릴케) 이 어려움에 직면해 우리는 뒤로 물러서지 말고, 뒤로 물러서 언어를 부정하지 않고 선시들에 버금가는 선시론을 세워야 할 것이다. 이상국가는 없지만 이상국가론이 먼저 있듯이……. ■

박치완

1962년 전남 고흥 동강 출생. 프랑스 부르곤뉴대학교에서 앙리 베르그송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저서로는 《몸》(공저, 산해, 2001), 《프랑스 문학의 지평》(공저, 월인, 2002)이 있으며, 불교 관련 논문으로는 〈프랑스에 불고 있는 정체불명의 불교 붐〉 〈정신분석학과 선 그리고 소고기매운탕〉 〈삼독기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 〈아직도 보편을 말하는가―서양인들에게 비친 동양 그리고 불교〉 등이 있으며, 대학에서는 주로 프랑스 현대철학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출처: http://nosamo.org/local/flist01_view.asp?PNUMBER=7865&SNUMBER=83&TNUMBER=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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