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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둘러싼 격동의 풍경

by 靑野(청야) 2013. 2. 7.

전통 시대의 지식인들은 책을 읽어도 그저 눈으로만 읽진 않았다. 읽을 만한 서물이 많지 않던 시절이라 우선은 꼼꼼한 독서가 정도였고, 수준 높은 독자라면 공부하는 와중에 습득한 아이디어나 흔적을 갖고 또 다른 책을 만들기도 하였다.

예컨대 텍스트의 주요 구절마다 방점을 찍거나 책의 여백에 심득(心得)을 적었던 평점(評點)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읽을거리가 되어 일반 독자를 위한 독서지남(指南)으로 활용된 방식이다. 주해(註解)는 거기서 더 나아가 자구에 주를 달고 제가의 해설을 배치함으로써 기존의 해석이 어떤 내용인지 요연하게 알게 해준다. 비록 주해자의 관점에 따라 취사선택이 없진 않지만 해당 고전의 해석사를 비교적 쉽게 섭렵함과 아울러 뜻의 대강을 알려주기 때문에 원전을 읽는 가장 좋은 텍스트로 활용되었다. 이를테면 길라잡이인 셈이니, 아마도 주희의 <사서집주>(四書集註) 같은 책이 대표적인 경우가 될 것이다.

<장자>에도 산더미처럼 쌓인 주해서가 있다. 이 고전은 신비롭고 장대한 서사, 놀라운 역설의 논리, 환상적인 문체 스타일 등으로 말미암아 선진 산문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지만 그만큼 또 읽기 어려운 책이기도 하였다. 웬만한 지식인도 원문만으론 이해가 어려운지라 시대를 불문하여 읽고 주해하고 읽고 또 해석하고…. 아무튼 꾸준한 주석 작업이 이뤄져왔다. 여기서 얘기할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 <박세당의 장자 읽기-남화경주해산보 1>(박헌순 옮김, 유리창 펴냄) 역시 그런 책 중 하나다.

▲ <박세당의 장자 읽기>(박세당 지음, 박헌순 옮김, 유리창 펴냄). ⓒ유리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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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 이하 <주해산보>로 약칭)라는 책 이름의 함의부터 이야기해보자. <남화경>은 당나라 현종이 장주(莊周)에게 남화진인(南華眞人)이란 시호를 추증한 이래 통용되기 시작한 <장자>의 또 다른 이름이다. '산보'는 깎고 보충했다는 의미니, 제가의 해설에서 불필요한 것은 삭제하고 모자란 부분은 또 저자 자신이 보충했다는 뜻이 되겠다. 그러니까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박세당이 <장자> 주석서 40여종을 섭렵한 뒤 그중 주요한 해설을 뽑아 수록하고 거기에 자신의 견해를 첨부했다는 사실을 노정시킨다.

숙종 6년(1680) 간행된 이래 널리 읽혔는데, 조선 후기의 유학자 홍석주(洪奭周)는 자신의 <홍씨독서록>(洪氏讀書錄)에서 당시 가장 환영받는 <장자> 주석서는 북송 임희일(林希逸)과 박세당의 책이라고 증언하였다. 박세당이 40종이 넘는 주석서들을 어떻게 수집해 주석을 채록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위의 책들을 모두 구비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겠지만 그보다는 남송 저백수(褚伯秀)의 <남화진경의해찬미>(南華眞經義海簒微)와 명대 초횡(焦竑)의 <장자익>(莊子翼)처럼 보다 충실한 주해서를 보고 거기서 채록했거나 혹은 위의 주석가들이 전부 수록된 <도장>(道藏)에서 재인용했을 거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장자>는 체제상 내편, 외편, 잡편으로 나뉜다. 형성연대는 대략 기원전 4세기 말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로 추정되지만, 편집자가 <회남자>를 엮은 유안(劉安)이란 학설이 있는데다 오늘날 보이는 책의 체제는 서진 시대 곽상(郭尙)의 작품이란 것이 정설이므로 문헌 성립은 대략 기원전 4세기 말부터 기원후 4세기 초까지 600여년에 걸친다. 원래는 52편이었다지만 실전되고 지금은 33편만 남았는데, 대체로 내편 7편만 장주의 저술로 인정한다.

책이 만들어진 과정과 역사가 유구하고 복잡해 해석 또한 사람마다 제각각인데 그래도 굳이 정리하자면 두 갈래로 나눌 수 있겠다. 그 하나는 도가의 장자, 또 다른 하나는 유가의 장자. 장자는 때로 자유의 경지에서 소요(逍遙)하는 지인(至人)으로 그려지거나, 혹은 정치 지향적인 유가의 문인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이런 양의적(兩義的) 관점을 가장 먼저 드러낸 이는 사마천이었다. <사기> '열전'에 묘사된 인간 장주는 정치적 현실에 비판적인 달관한 정신의 소유자이다. 장주는 노자를 계승한 학자로서 유가비판이 그 사상의 핵심이고, 따라서 <장자>는 반(反)정치의 산물이라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기>는 도가를 다른 여러 학파를 포용하는 종합적 성격의 사상으로 설명하며 노장의 핵심은 군주의 통치술에 관한 학문(반고의 <한서> '예문지'도 이런 해석을 따랐다)으로 규정한다. 장자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긴 것인데, 이렇게 해서 장자는 읽는 사람에 따라 초인과 경세가의 경지를 변화무쌍 넘나들게 된다.

위·진의 현학가들에게 <장자>는 인기 있는 텍스트였다. 현실에서 동떨어진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는듯한 이 책은 지난한 세월을 살아가는 지식인들에게 거의 유일한 위로이자 도피처가 되어주었다. 가슴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정신의 고양을 체험할 수 있고, 그리하여 심리적인 위안과 현실을 견뎌내는 힘을 키워준 까닭이다. 서복관(徐復觀)은 <장자>를 중국 예술정신의 원류로 일컬었는데, 이는 장자철학이 진정한 자유와 평등정신의 표출로 문화와 예술 영역에서 영감의 근원으로 기능했다고 여긴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장자>는 언제나 유가의 정치담론과 연결되고 있었다. 텍스트에 보이는 장주의 모습 자체가 뜻을 품었으되 가난하여 때를 얻지 못한 지식인인 까닭에 그의 처세가 던지는 메시지의 울림이 워낙 컸던 까닭이다. <장자>가 본격적적으로 지식인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시대는 위·진이지만, 다양한 주석이 나오는 시대는 유학이 체계적인 철학으로 발전하는 송·명 연간인 것만 보아도 <장자> 해석의 전통은 유가와 밀접하게 연결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예컨대 중국에서 발간된 <장자서발논평집요>(莊子序跋論評輯要)라는 책은 고대에서 청대까지 <장자> 관련 논저 141종을 소개하고 있는데, 송대 이전의 문헌은 겨우 18종으로 전체의 13%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유학이 주류 학문으로 완전히 자리 잡은 다음에라야 <장자>라는 서물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었음을 반증한다.

장자를 유가의 지식인으로 해석하려는 전통은 이미 편집자 곽상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장자>에 보이는 고대의 성인이나 공자를 조소하는 일화들이 그저 문학적 장치에 불과하다고 역설했다. 성인의 언행을 고착화하고 규범화하는 후인들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우화일 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로부터 도가 사상은 유학의 타락을 저지하는 보완재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해석의 전통은 훗날 신유가 학자들이 대거 <장자> 해석에 뛰어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유학의 위상이 공고해질수록 <장자> 또한 덩달아 애독되었다. 송·명 이래 주자학이 유일불변의 진리로 받들어지며 절대적 권위를 획득하게 되자 이에 반발해 다양한 실재를 용인하는 상대주의적 관점에 의거해 새로운 사고견인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융합의 차원에서 장자를 유가로 바라보는 시각도 일반화되었다.

<주해산보>와 더불어 가장 많이 읽혔다는 북송 임희일(林希逸)의 <장자구의>(莊子口義)는 아예 신유학의 용어로 장자를 설명한다. '소요유'의 경지는 <논어>에서 말하는 즐거움(樂)이고, 천(天)과 인(人), 자연(自然)과 유위(有爲) 같은 대립적인 개념은 성리학의 천리(天理)와 인욕(人欲),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으로 대체되었다. <장자>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인 '양생주'의 '포정해우'(庖丁解牛)도 '천리'(天理)를 설파하는 사례로 풀이되는데, 이러한 결합은 당시에 매우 보편적이어서 소동파나 왕안석은 심지어 장자가 공자의 제자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명대에 이르러 통합의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주해산보>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주석가 중 하나인 초횡(1540~1620)은 명말 양명좌파인 태주학파(泰州學派)의 사상혁신운동에 동참했던 인물이다. 그의 <장자익>은 정주이학의 교조적 학풍을 반대하고 개인의 존재 가치에 주목하며 "도를 공부하는 사람은 응당 고인이 만든 우상을 쓸어버리고, 자기 가슴을 열어 새로운 천지를 개척해야 한다"(學道者當掃盡古人芻狗, 從自己胸中辟出一片天地)는 소신에서 나온 책이다.

극좌파인 이탁오의 가장 가까운 벗으로서 초횡은 공맹의 도리와 불교 경전, 노장의 의미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삼교합일(三敎合一)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탁오는 거침없는 필치로 당대 지식사회의 위선적 행태를 적나라하게 파헤친 사상적 이단아였는데, 그의 <장자해>(莊子解, 박세당의 책에서처럼 곽상, 呂惠卿, 張四維, 王雱, 陳景元, 褚伯秀 등을 주로 인용했다) 역시 유가적 실용주의와 도가·불교의 상대주의적 관점이 결합된 강한 통합성이 특징이다.

명대 말기의 이런 개성적인 사회사조가 고작 한 세기 뒤의 박세당에게 영향을 미친 흔적은 없다. 그는 이탁오를 언급한 적이 없지만, 그러나 초횡의 <장자익>이 <주해산보>에 인용된 빈도수로 볼 때 이탁오라는 이름이나 유·불·도의 통합 사조에 아주 문외한은 아니었지 싶다. <주해산보>에서 <장자해>가 거론되지 않는 이유도 한번 생각해봄직하다.

다른 주석가들처럼 박세당도 자기 시대와 사회현실에 맞춰 <장자>를 해석했다. 그는 정치적 응용 가능성에 맞춰 <장자>를 읽었는데, 그에게 있어 시대정신이란 신유학의 정신적 꼿꼿함과 실용성이 결합된 코드였던 것 같다. 박세당이 활동하던 양란 이후 17세기는 당파간의 정쟁이 어느 때보다도 극심하던 시기였다. 게다가 주자학 절대주의를 내세우는 서인 노론이 정계를 주도하면서 사상적 편향성이 심각한 상태였는데, 이런 판에 <장자>를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앞서 <주해산보>가 조선 후기에 가장 많이 읽힌 책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의 내용이 탁월한 때문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유통되는 <장자> 주석서가 얼마 안 되는데다 성리학의 관점과 국내 사정을 연결해 풀이한 저자는 상대적으로 더욱 드물던 사정에서 찾아야 할 듯싶다. 과거 답안지에 노장을 인용했다가 불합격된 사례까지 있는 판에 만약에 생길지도 모를 위험은 읽지 않음으로써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상책이었을 터다. 기존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주체적인 철학을 하겠다는 의지에 불타는 소론의 핵심 박세당 정도라야 예외일 수 있지 않았을까!

사정은 그렇더라도 박세당이 <장자>에서도 특히 '제물론'에 관심을 집중시킨 이유는 당쟁 와중 걸핏하면 시비와 공격의 대상이 되곤 하던 그 자신의 처경과 관계가 깊다. '제물론'의 주제는 인간세상의 '시비'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대립의 완화와 해소에 초점을 맞춘다. '소요유'를 논평한 마지막 단락에서 박세당은 이렇게 말했다.

"이 편에서 말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큰 것과 작은 것을 분변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마무리하는 데에 미쳐서는, 큰 것으로서 스스로 자처하면서 작은 것을 미루어 세속의 혜시 같은 자에게로 돌렸다. 대개 자기를 배우는 자로 하여금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고자 한 것이고, 또한 저 도(道)는 항상 '작은 이룸'에서 은폐된다는 것을 드러낸 것인데, 사람들의 의론이 가지런해지지 않음이 또한 모두 여기에서 말미암으므로 아래 편에 '그것을 가지런히 해야 한다는 뜻'을 말하였다."(此篇所言, 終始不出大小之辨而已. 及其終也, 以大自居而推小而歸之於世俗, 如惠施者. 蓋欲使學己者之所去就, 而又以見夫道之常隱於小成, 而物論之不齊, 亦莫不由於此, 故下篇言齊之之意.) (<주해산보> 64쪽)

박세당은 예문에서 '소요유'의 내용이 '대립하는 현상'(大小之辨)들의 사례 제시이고, '제물론'은 '대립의 해소와 해결'(齊一)의 동기를 제공하는 내용이라고 정의한다. '소요'를 장자 사상의 중심으로 파악하는 일반적 견해와는 확연히 다르다. <주해산보>에서 '소요유'는 '제물론'의 서론으로 위상이 격하되고 거기 실린 내용은 자연스럽게 '제일'로 나아가기 전 단계의 '대립하는 현상'들의 나열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붕새의 우화나 장자·혜시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의미가 축소되니, '소요'하는 인격을 지향하는 탈속적인 <장자>는 어느덧 멀리 사라지고 세속의 논리만이 눈앞에 드러난다.

박세당에게 '제물'(齊物)은 "물에 대한 이론들을 하나로 가지런히 하는 것"이었다. 만물은 평등하다고 이해하는 일반 해석과 역시 다른 뜻이다. 사물의 통일성을 지향하다보니 그 설명에는 이일분수(理一分殊, 현상은 제각기 다르지만 이치는 오직 하나라는 성리학 용어)까지 차용된다.

물론 이런 해석은 중국의 주석가들로부터 유래한 것이지만, 박세당의 해석은 그들보다 더욱 정치적이다. 한 나라에 군주가 있어 백성을 주재하는 것처럼 이 세계에는 만물을 주재하는 도가 있고 그것은 또 <장자>에서 말하는 진재(眞宰)라는 것이다. 이 도를 깨달아 시끄러운 세상의 조화와 통일을 회복하는 것이 '제물'의 참된 의미이며 요체라고 하였다.

박세당이 보기에 인간 세상에 대립이 일어나는 까닭은 '이기심'(自私) 때문이다. 사람들이 제 주장만 고집하기 때문에 시비와 갈등이 생겨나고, 이런 일이 반복되기 때문에 대립은 종식될 날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한 반복되는 시비에 대응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그는 '시비에 대한 초월'(任是非)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시비를 결정'(定是非)하고, 그러기 위해선 '공공의식'(公)을 자각해 그것을 회복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유가에서 그르다 하는 것을 묵가는 옳다 하고 묵가에서 옳다 하는 것을 유가는 그르다 하니, 모두 큰 완전이 작은 성공에 파괴되고 실재의 이치가 겉꾸밈에 가려져 각각 저대로 시비를 삼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로 남이 그르다 하는 것을 옳다 하고 남이 옳다 하는 것을 그르다 하면서도 시비의 올바름을 잃지 않고자 한다면, 천리의 밝음으로써 비추어보는 것 만한 것이 없다."(儒之所非, 墨以爲是, 墨之所非, 儒以爲非, 蓋由乎大全頗於小成, 實理蔽於榮華, 以各自爲是非, 若眞欲是人之所非, 非人之所是, 而不失是非之正, 則莫若照之以天理之明.) (<주해산보> 97쪽)

여기서 말하는 '천리의 밝음'(天理之明)이란 시비판단의 공정하고 객관적인 기준이다. 현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판단하고 개입하려면 천도와 현실 정치의 정당성을 매개하는 천리의 객관성, 즉 '공'의 역할이 불가피해진다. 이 '공'은 이상적인 인격의 맑고 올곧은 심성과도 비슷한 개념인데, 박세당은 '이기심'(自私)과 그 해결의 열쇠인 '공'이 수신치인(修身治人)이라는 유가의 핵심명제와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 '수신치인'은 유가와 노장이 만나는 사상적 공유지점이고 세상 모든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이니, <장자> 읽기는 저절로 사회개혁에 적용할 이론 탐색의 장이 되는 것이다.

박세당은 시종일관 장주가 공자의 도를 회복하고자 애썼던 인물임을 강조했고, 우화 위주의 독특한 글쓰기도 공자의 인의(仁義)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라고 강변했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는 결코 이단이 될 수 없다 말했는데, 그 근거로 <장자>의 첫째 장 '소요유'부터 마지막인 '천하' 편까지 혜시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하고 끝난다는 사실을 들었다. 장주의 저술 목적이 애당초 유가가 아닌 혜시와 공손룡 같은 명가(名家) 비판에 있지만 세상에서 이 점을 말한 자가 없기 때문에 본인이 처음으로 그 사실을 밝힌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박세당이 <장자>를 주해한 동기와 배경은 그것이 유가의 이상(좀 더 구체적으로는 개인의 성찰과 향상을 통한 사회 제반 문제의 해결)을 구현하는데 유용하다고 본 때문이었다. <주해산보>는 그에게 '사문난적'의 오명을 안겨준 <사변록>(思辨錄)과 더불어 양란 이후 조선 사회의 재건을 위한 다양한 사상적 모색의 일환이라 간주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학의 가치체계 안에서 맴돈다. 장주를 유자로 보려는 기존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을뿐더러 다른 어떤 주해서보다도 유가의 언어와 논리에 충실하다.

독자 입장에서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장자>의 비현실적 상상력과 박세당의 현실적 사고가 만나는 접점의 시간은 어디로 흐르는 것일까? 도가 서적의 유가식 해석(즉 유가의 윤리관으로 문학적 상상력과 다양성을 완전히 잠식해버리는)이 독창적 실학정신의 산물이라 평가되는 것이 과연 온당할까? 박세당의 <주해산보>는 우리에게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지식인의 고뇌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그와 함께 시대에 갇힌 사고의 한계도 가감 없이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관한 한 마디. 이만한 책을 내기까지 역자의 수고란 필설로 형언될 바 아닐 것이다. 그런 노고에는 다만 옥의 티를 짚어드리는 것도 경의를 표하는 한 방법이지 않을까! 역자는 원문의 함의를 충실히 전달하기 위해 가급적 의역을 삼가고 직역 위주로 해석한다고 말씀하는데, 그러나 이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내가 보기에 번역에는 직역과 의역이 아니라 좋은 번역과 나쁜 번역만이 존재한다. 학술적으로 정의할 때 번역은 원문언어(Source language)가 역자라는 매개를 통해 탈언어화 과정을 거친 뒤 대상언어(Target language)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다. 고전번역이 구글 번역기를 돌리는 것처럼 단순한 언어매치에 그치는 게 아닌 바에야 맥락에 따라 문체를 살려내는 일은 술 담그기의 발효처럼 중요한 과정으로 치부되어야 한다.

왜 그럴까? 숙성과정이 오래고 끓는 온도가 뜨거울수록 독자는 문맥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는 고통을 덜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무슨 뜻인지 확인하기 위해 읽는 내내 원문을 들춰 대조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면 독서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 가지 예로 이 책에선 인(因)한다는 표현이 굉장히 자주 나온다. "질문을 인하여 천뢰의 비유를 꺼낸", "옳음을 인할 따름", "다른 사람을 인한다", "인하는 것일 따름이다" 등등. 만약 '인' 자가 나올 때마다 명사·형용사·전치사·접속사 등 실제 용례에 따라 적절한 표현으로 바꿔주었더라면 독자로선 읽는데 거슬림이 없었을 것이다.

또 원문에 현토만 단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 번역문의 구두점 원문과 똑같은 위치에 찍혀져 읽기의 흐름을 방해하는 경우 역시 아쉬운 대목이었다. 이런 디테일에 무신경하면 제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읽는 맛이 반감되기 마련이다. 눈과 가슴에 착착 휘감기는 문장을 통해 독자는 비로소 역자의 고심과 노력에 감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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