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노자(老子)로부터 가르침을 받다
중화 정통 문화는 박대정심(博大精深)하고 그 안에는 수련하는 문화가 있고 역시 수련하지 않은 사람의 "속인 문화"가 있다. 노자와 공자는 이 두 방면의 정통문화의 대표 인물이다.
2천 5백년전 공자는 낙양에 가서 노자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담화 중에서 그들(역시 수련문화와 속인 문화)지간의 경지의 차이점을 볼 수 있다. 이런 차이점은 중화정통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파룬궁 진상을 똑똑히 아는데 도움이 된다.
그들의 회담 과정 중에서 노자는 공자에게 지적하기를 “교오와 과다한 욕망”을 버리고 “왜냐하면 이런 물건들은 당신에게 한 점의 좋은 것도 없다”. 그들은 각자의 "인의"에 대한 인식을 담론한 후 노자가 공자에게 물었다.“당신은 이미 도를 얻었는가?”
공자가 답하기를,“내가 27년을 구했는데 아직까지 얻지 못했다." 노자가 말했다.“만약 하나의 유형적인 물건이면 남에게 줄 수 있는데 그러면 사람들은 다투어 군왕에게 바칠 것이다. 만약 도를 사람에게 줄 수 있다면 사람들은 친인들에게 줄 것이다. 만약 도를 똑똑히 말할 수 있으면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형제들에게 알려줄 것이다. 만약 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으면 사람들은 곧 자기의 자녀들에게 전할 것이다."
이런 위에서 말한 것은 모두 불가능한 것이다.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한 사람의 마음에 <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으면 그 도는 절대로 그의 심중에 오지 않을 것이다.”
공자가 잊지 못한 것과 마음이 평온치 않은 것에 대하여 노자는 모두 명리에 빠진 자아번뇌라고 지적했다. 공자는 노자한테서 집으로 돌아온 후 3일이나 입을 열지 않았다.
공자의 학생 자공(子贡)이 이상하게 여겨 이유를 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 “새는 날 줄을 알고 있고 물고기는 헤엄칠 수 있고 짐승은 뛸 수 있다. 달아나는 것은 함정으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것은 그물로 잡을 수 있고 하늘에 나는 것은 화살로 쏠 수 있다. 그러나 용(龙) 은 어떤 때는 구름 위에 있고 어떤 때는 하늘에 있어 나는 어떻게 할 바를 모르겠다. 노자는 곧 용이다!그의 사상은 곧 태공에서 날고 있는 용과 같다. 내가 입을 열었지만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혀도 내밀고는 도로 걷어들일 줄을 모르겠다. 나는 마음이 온당하지 않아 나 자신을 찾지 못하겠다.
공자가 연구한 것은 속인 중 사람으로서의 논리이고 노자가 말하는 것은 수련의 도이다. 수련의 도는 자연히 속인의 경지보다 아주 높은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완전히 노자의 말을 다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말하기를 : “도를 잃으면 덕을 잃고 덕을 잃으면 인(仁)을 잃는다. 인을 잃으면 의(义)을 잃고 의를 잃으면 례(礼)를 잃는다. 노자는 공자가 말하는 "인의"의 뜻을 알지만 공자는 노자가 말하는 "도"를 다 알지 못한다. 같은 시대의 노자와 공자지간의 차이점은 한 가지 도리를 설명한다. 도가 수련은 세간의 일체 학문을 초월하고 수련인은 세간의 일체를 통찰할 수 있지만 세간의 이익과 욕망에는 동하지 않는다. 수련하지 않은 속인은 세간의 표면에 미혹되어 수련을 너무 신비해 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차이점을 조성한 원인은 노자가 지적한: “그것은 곧 사람의 마음이 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으면 그 도는 절대로 그의 마음으로 올 수 없다.” 바꾸어 말하자면 순정한 마음으로 도를 향하는 문제이고 세간의 명리정을 과감하게 버리는 것은 수련의 도를 깨닫는 근본이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후 또 수련의 문화를 크게 풍부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또 다른 수련의 형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중국 수련문화는 "불도(佛道) 양대가"가 나타났다. 이것은 세계에서 둘도 없는 것이다. 중국 전통문화의 내함은 깊고 넓어 심오한 수련문화 역시 포함한다. 또 당전 사람들이 능히 대법수련을 인식하는 기초를 준비한 것이다.
공자는 노자에게 예《礼》를 묻는 과정 중에서 우리는 일부 계시를 얻을 수 있다. 인간세상의 제일 위대한 학자 사상가도 수련인의 높은 경지를 알수 없다. 이것은 당전 사람들이 파룬궁을 인식하는데 표현이 아주 돌출하다. 사람은 언제나 아주 강한 관념으로 파룬궁 수련을 보고 언제나 세간의 시비로 파룬궁 수련을 평론하고 있다.
우리는 알고 있다. 노자는 도덕경(《道德经》)에서 많은 치국의 도리를 말했다. 그러나 수련인은 어떠한 정치 포부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노자가 정치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공자는 "주례(周礼)를 회복한다는 마음을 품고 여러 국가를 돌아다녔던 것이다. 이 역시 수련 문화와 속인 문화의 다른 중대한 차별이다. 진정한 수련자는 세간의 일체를 똑똑히 볼 수 있지만 세간의 정치에 대해서는 흥취를 느끼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파룬궁 진상에 배척심이 생겨 파룬궁은 정치를 한다고 말한다. 한 방면은 중공이 파룬궁에 대한 거짓선전과 모함에 영향을 받았고, 다른 방면은 현대인들이 수련에 대하여 이해가 부족하여 생긴 것이다. 사람들이 중화 정통 문화에 비교적 심각한 이해를 한 후 곧 파룬궁 수련생들이 반박해중에서의 진상과 <<9평>>을 전하고 3퇴(탈당,단, 대)를 권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파룬궁은 무고한 박해를 받는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중공의 사악 본질을 간파하고 중공과 한편일 때의 위해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파룬궁 본신은 어떠한 정치 포부와 목적이 없고 정치와 관계가 없다. 권리와 욕망을 위해 쟁투하는 정치활동은 자아번뇌를 찾는 것이고 완전히 수련인이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중화 민족은 5천년의 휘황한 역사가 있다. 박대정심한 진정한 중화문화에 대하여 진정으로 명리정을 내려 놓아야 철처히 근본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속인 중의 제일 위대한 학자도 표면을 알수 있지만 진정한 함의는 모른다. 이 관건을 알면 비교적 쉽게 중국의 전통문화——수련과 상관된 박대한 내함을 알 수 있다.
이 몇년래 해외의 파룬궁 수련자들은 세계 각지에서 중화의 전통문화를 발양하여 아주 좋은 환영을 받았다. 신당인 신년 스펙테큘러는 변이된 공산당 문화가 없는 진정한 중화문화이다. 그럼 "쩐,싼,런"을 수련 원칙으로 하는 파룬궁 수련자의 연출은 가장 의의가 있다. 중화 전통 문화가 중공에 의해 파괴된 오늘, 오직 파룬궁 수련자만이 진정한 중화문화의 심후한 내함을 전시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중화문화와 인간 생명의 제일 깊은 곳은 긴밀히 연결된 것이다. "신당인신년스펙테큘러"의 예술 정품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과 귀를 새롭게 했다. 관중들은 진정한 중화전통문화의 정수를 깊이 감수했고 내심에서 심각한 진동을 받았다.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중화문화에 관심이 있고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그럼 응당히 파룬궁 진상을 잘 알아야 하고 "신당인신년스펙테큘러"를 잘 보면 된다. 염황(炎黄)자손으로서 더욱 이러해야 할 것이다.
공자를 꾸짖은 노자
매우 적절하다. 공자는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본질인 인(仁)이 있다고 보고, 그 보편적 본질을 유지하고 확대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예(禮)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추종할 것을 제안한다. 예는 인간성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으로서 공자를 필두로 한 유가에서는 선(善)의 정점으로 인식된다. 선으로 인정되는 특정한 가치 체계를 받아들이고 그 특정한 가치 체계와 일체를 이루는 것을 이상적인 삶의 형태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 보편적 가치 체계를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는 미숙의 상태로서의 개별적 자아(己)다. 개별적인 자아는 성숙의 가능성만을 가진 존재로서 이해된다. 이런 구조에서 인간은 개별성과 결별하고 일반성 내지는 보편성 속으로 편입돼야 한다. 비유하자면, 자신을 고유명사 차원에서 탈피시켜 일반명사 차원으로 상승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 구조를 공자는 극기복례라고 표현한 것이다.
예는 그 이데올로기 혹은 교화시스템에 포함된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기준이나 표준 혹은 이상으로 작용한다. 도덕적 자각 능력이 있는 인간은 모두 그 예에 집중하고 통일돼야 한다. 그래서 공자는 극기복례를 설명하면서 “예에 맞지 않으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며, 움직이지도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논어 안언(顔淵)편’)”고 말했다.
이 예는 전체 사회가 모두 따라야 하는 보편적인 기준이다. 이 기준을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 공자가 건설하려고 했던 ‘인간의 길’이다. 노자는 바로 이 점을 공격하면서 자신만의 인간의 길을 건설하려 한다. 여기서 우리는 미셸 푸코라는 현대의 서양 철학자 한 명을 떠올릴 수 있다. 푸코는 본질이나 중심을 기반으로 형성된 철학에서는 그런 것들이 기준이 돼 결국 이 사회를 구분하고 배제하며 억압하는 권력으로 군림하게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본질주의적인 근대를 구분, 배제 그리고 억압이라는 틀로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본질의 내용이 도덕적으로 선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본질인 한 기준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기준인 한 사회를 구분하고 차등화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공자가 건설한 인간의 길도 결국은 구분, 배제 그리고 억압이라고 하는 부정적 현상을 피해 갈 수 없게 된다.
공자의 이런 발상에 대해 공격적인 언사를 날리는 노자의 말을 들어 보자.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면, 이는 추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알면, 이는 좋지 않다.
이 구절을 어떤 사람들은 노자가 미와 추, 선과 악을 서로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추함이 있어야 아름다움이 있게 되고, 선(善)이 있으니 악(惡)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상대성을 말하려면 개별자로서의 주체가 등장해야 하는데 노자에게 이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학을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 문제로 본다고 할 때, 매우 분명히 해야 할 문제다. 이는 뒤에서 더 자세히 보도록 하겠다.
노자는 여기서 특정한 기준을 정하고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집중하고 통일돼야 한다고 보는 공자 식의 문명을 반대할 뿐이다. 여기서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美之爲美)’ 안다는 것은 정해진 미, 정의된 미, 이미 공감대가 형성된 미에 동조한다는 것이다. ‘좋다고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善之爲善)’ 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정해진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공통의 본질적 특성을 기반으로 해 많은 사람들이 합의한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보편적으로 관통하는 하나의 특성에 기반한다고 믿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합의해야 할 것 혹은 동의해야 할 것으로 강요된다.
유행을 예로 들어보자. 요즘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색깔로 머리를 물들인다. 처음에는 주로 노란색 계열로 물을 들였다. 모두가 검은색 머리를 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에 누군가가 머리를 노란색으로 물들였다면 그것은 파격이다. 어색하고 도발적인 느낌을 준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신기하게 보지만 호감을 갖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한두 명이 추종해 따르게 되고, 처음에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 점점 신선하게 보이게 된다. 그래서 대개는 기존의 감각에 답답해하던 젊은 층을 중심으로 많은 추종자들이 생기고 이것이 마침내는 유행으로 형성된다. 이렇게 형성된 유행은 기존의 가치 체계에 저항하고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급기야는 기존의 미적 감각과 공존하면서 사회는 신선하고 다양성이 증가된 모습으로 자리 잡는다.
그런데 이런 유행이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을 넘어서서 어떤 단계를 지나게 되면 바로 권력이나 이데올로기로 변질된다. 즉 유행을 따르는 부류와 유행을 따르지 못하는 부류로 나뉘고, 유행을 따르는 부류는 우월감을, 유행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은 열등감과 그 유행에 대한 저항감을 갖는다. 머리를 염색하는 것이 확고한 유행일 때, 많은 사람들은 머리를 염색하지 않은 채로 외출하는 것을 불편하게 느끼고 머리 염색이 미적 판단의 중요한 기준으로 행사된다. 유행이 이데올로기화해 따르지 않으면 불편해지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미셸 푸코의 견해를 빌려서 말한다면, 머리 염색이 유행이 돼 기준이라는 지위를 획득하는 순간 머리 염색은 이 사회를 구분하고 배제하며 억압하는 장치로 성장해버린다.
노자가 보기에 모든 가치는 중립적이다. 그런데 공자 식의 문명은 예라고 하는 특정 교화 체계를 저 위에 걸어 놓고, 백성들을 모두 거기에 통합하려 한다. 통합적 욕구를 발산하는 이런 가치를 진정한 가치로 아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여기서 노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다. 노자는 그 기준이 비록 선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기준으로 행사되는 한 폭력을 잉태하는 장치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보편화된 이념 내지 체계는 그 내용의 선악 여부와 관계없이 기준 혹은 이념으로 작동해 세계를 구분하고, 바람직하다고 간주되지 못하는 한쪽을 배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갈등이 자리 잡지 못할 문명의 기획은 어디에서 영감을 얻어야 할까? 노자는 그 영감을 자연에서 구한다. 자연은 이런 분리의 장치가 없이 작동하면서 오히려 영구적이고 거대한 효과와 결과들을 산출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관찰된다. 노자는 자연의 이런 특성을 기반으로 해 천명 속에 문제점으로 자리 잡고 있던 비의성, 주관성 그리고 임의성을 극복하고 투명성, 객관성 그리고 보편성을 확보한다.
천명을 극복하고 ‘도(道)’라고 하는 인간의 길을 건립하려 했던 두 철학자 가운데 공자는 인간을 사유의 원천으로 삼고, 노자는 자연을 사유의 원천으로 삼았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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