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易(易經)小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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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序言
2. 복희(伏羲).문왕(文王)의 周易
3. 孔子의 周易
4. 라이프니츠와 周易
5. 周易의 再解析
6. 다산의 물음에 답하다.
7. 周易의 活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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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글은 주역해설 '序文'으로 쓴글이다
서문에 이어, 복희(伏羲).문왕(文王)의 周易, 孔子의 周易, 라이프니츠와 周易, 周易의 再解析, 다산의 물음에 답하다, 周易의 活用등으로 쓰내려갈 글이다. 시간과의 다툼은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은 지극히 객관적이면서 지극히 주관적이다. 누구나에게 시간은 공평히 흘러가는 것 같지만, 누구에게나 불공평을 낳는다
인간이 없는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이 인간에게 의미가 있겠는가? 하늘과 땅이 있고, 인간이 그속에서 살고 있기에, 그 인간들에게, 하늘과 땅이 의미가 있다 하겠다. 하늘과 땅사이에는 인간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대표하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 그리고, 공기와 바람(風), 연못(池)), 우뢰(震), 불(火), 물(水), 산(山)으로 대표되는 만물이 자연속에 녹아 있고, 서로 돕고, 의지하고, 영향을 주며 산다. 만물의 현상과 온갖 만물의 삶이 없다면, 인간 역시 한 순간도 존재 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없는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이 인간에게 의미가 있겠는가? 하늘과 땅이 있고, 인간이 그속에서 살고 있기에, 그 인간들에게, 하늘과 땅이 의미가 있다 하겠다. 하늘과 땅사이에는 인간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대표하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 그리고, 공기와 바람(風), 연못(池)), 우뢰(震), 불(火), 물(水), 산(山)으로 대표되는 만물이 자연속에 녹아 있고, 서로 돕고, 의지하고, 영향을 주며 산다. 만물의 현상과 온갖 만물의 삶이 없다면, 인간 역시 한 순간도 존재 할 수 없는 것이다.
주역은 이런 만물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현상과 인간세상의 어울림을 풀어내어, 세상의 변화무쌍함에 대처하기 위한 인간생활의 길잡이라 정의하고 싶다.
지금은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인간의 물질적 삶을 풍요롭게 하고, 보다 편리하게 하는 것은 부인하지 못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한 눈에 꽤뚫어 보고, 미래를 다양하게 예측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정보를 편리하게 제공하여 주기는 하지만, 그 편리함 때문인지, 인간의 활동이 왕성해지는 것은 좋지만, 성장의 욕구가 늘어 나면서, 삶의 터전인 자연을 훼손함이 심각하고, 생명의 유지에 필수불가결한 식재료마저 부정하게 제작하되어, 그 불결함이 종종 지상에 소개되고 있다. 온갖 질병과 악의 근원을, 삶의 현장 곳곳에서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욕심이 과한 탓이다. 인간의 과욕이 기술과 과학 발전으로 제어 하지 못하나 보다.
인간들이 과학 기술문명을 최고도로 발전시키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욕망은 스스로 발전시킨 그 과학기술 때문에, 점점 그런 기술과 사회의 발전, 문명에 길들여지고, 의존하며, 끌려 가다보니, 급기야, 인간의 내면세계는 더욱 위축되고, 인간정신은 더욱 왜소하게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요즘처럼, 사회문제가 점점 심각하게 야기되고 있고, 사회가 발전할 수록, 앞으로 더욱 그 정도가 심할 것이다.
주역은, 옛사람들이, 오늘날 과학기술에 의존하던 것들을, 수천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원리를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만물의 현상을 표상화하고, 만물의 변화이치를 유추해내고자 노력한 결과로, 일반적인 철학적 사유나 논리 수준에 머문게 아니라, 인간의 과거 행동, 과거의 행적을 정리하며, 그 바탕위에서, 현재의 상황을 진단하고, 미래를 예측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유지, 개선 지침을 풀어낸 것이다. 이른바, 통섭(Consilence)적 사고로 융합(Convergence)적 결과를 도출해낸 것이라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인의 뇌리에는 그 구체적 결과의 도출과정이, 그 철학적 깊이와 무관하게, 보통의 점서(占書)의 부정적 이미지와 겹쳐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사유세계뿐만아니라, 실생활에 파고든 주역의 의미를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비유건데, 국가경제정책을 들여다 보면, 복잡한 경제활동의 현상을 나름대로 진단하고 예측하여, 이를 바탕으로 적절한 정책을 수립하여 집행한다. 여기에 기반이 되는 기본 이론이 경제원론이라 할 수 있다. 주역은 경제원론에 비견된다고 말할 수 있고, 일반점서는 구체적 사례 수단에 비견된다고 생각한다.
주역에서 제시하는 Solution은 은유적이다. 은유적 Solution은 다양한 해석을 낳기 때문에, 풍부한 깊이를 더 해준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주역이 점서로서는 부적절하다 할지 모르지만, 일반 점서처럼 족집게씩 예측을 지향(志向)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주역의 이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주역의 사상은, '우주는 변한다' 것을 전제하고 있다. 즉, 태초에 태극에서 기가 일고, 음양이 분화되었다. 음양은 다시, 사상, 8괘' 건태이진손감간곤(乾兌離震坎艮坤)' , 64괘로 분화되고, 주역 64괘의 각 괘는 6개의 효로 구성된다.
각 괘의 6효는 양효(-), 음효(--) 두 종류이고, 양효와 음효가 각 괘의 의미와 연결되어, 6효중 어느 위치에 있느냐 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이 의미는 단독으로 또는 상하 효와 연관을 가지며, 변환다. 그러니 64괘의 각 효가 가지는 의미가 다르므로 부호는 양효, 음효 2종류지만, 효의 의미는 64 x 6=384가지가 된다. 즉, 384개의 효의 작용으로, 만물이 생겨나고 작동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주역의 표상물: 태극, 양의(음양), 팔괘도 >
천.지.인은 현대인들 뿐만아니라, 고대인들에게도 탐구의 대상이 되어 왔다. 땅에 발을 붙이고 하늘을 이고 사는 이 우주의 생성물인 우리들에게는 그것이 우리의 본질적 근원이고 바탕이기 때문이다.
성리학에서 '태극은 모든 존재와 가치의 근원이 되는 궁극적 실체' 라 한다. 즉 태극에서 만물이 나왔다는 논리이다. 그렇다면, 태극의 공간적 정의는 무의미해진다. 태극을 공간이라하면, 그 공간도 태극에서 나와야 한다는 논리에 배치된다. 태극이 공간이 아니라면, 태극은 물질이 아니다. 물질은 공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공간도 아니다, 물질도 아니라면, 그것은 '에너지' 또는 공간적으로 '무'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서 '모든 존재와 가치의 근원' 이라는 것이다. 주자(朱子)는 이 태극을 이(理)로 규정해 '형체도 없고 작용도 없는 형이상학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자가 존재자이게 할 수 있는 근원 존재, 즉 보편적 원리'로 보았다.
고대 동양에서부터 '태극'으로 인식되어 온 태초의 우주의 모습은, 현대천문학에서도 부단히 탐구대상이 되어 왔다 . 우주생성이전, 이른바 빅뱅이 일어나기 전의 우주는 또 다른 우주였을 뿐이라고 '만물의 이론'에서 설명하듯이, 태극은 모든 것이 통합된 우주의 원초, 또는 무극, 무에서 '기(氣)'가 일었다. 이는 무(진공)에서 양자요동으로 물질이 생겨났다는 현대우주양자론의 우주 생성논리가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양자요동을 설명하는 것이 양자역학론이라면, 무극에서 기가 일었다는 것을 '이(理)'로서 설명한다. 이른바 '이기론(理氣論)'이다. 그 후, 인플레이션과 빅뱅이후, 다양한 물질이 생겨나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하늘과 땅, 그리고 만물이 생겨났다.
< 태초, 태극, 무에서 만물(우주)이 태어 났다 >
하지만, 현대우주론에서는 그 물질의 약 4%만이 알려져 있고, 나머지 약 96 % 그 중 약 22%는 알려지지 않은 물질 이른바 암흑물질(Dark Material), 약 74%는 알려 지지 않은 에너지 이른바 암흑에너지(Dark Energy)라 한다.
수십억년, 수백억년 동안 '우주가 끊임없이 변한다', 즉 '알려진 4%물질계가 끊임없이 변한다' 하기 위해서는, 우주가 스스로 살아 있던지, 그 변화를 주는 동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그 동력원이 'Dark' 로 명명되었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태초의 우주를 이야기 할 때, 역시, 태초는 '무'라 정의한다지만, 그 무는 그냥 무가 아니다.
물질과 반물질이 쌍소멸하면 '무'로 돌아간다. 이 역시 '에너지' 장(Field)라 정의한다. 쌍소멸했으니 물질이 없어진 것이다. 그야말로 공간적으로 '무'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태초이니, 쌍소멸할 물질과 반물질도 없는 것이다. 태초는 그와 같은 상태 즉, 공간적 '무'의 상태에서 물질과 반물질이 생겨났고, 우주는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성장한 것이라 설명한다. 그 에너지는 또 어디서 왔는가? 이것을 반복하면 존재의 영역, 스티븐 호킹이 '위대한 설계'이나, 레너드 서스킨드가 '우주풍경'에서 언급하는 '거의 궁극적인 이론', 다중초끈이론, M이론의 영역까지 확장해야만 한다.
<현대우주론의 양대거두, 스티븐 호킹과 레너드 서스킨드의 저서>
그러니, 주역의 '우주는 변한다'는 개념의 출발인 태극에서 부터 한정한다면, 무에서 물질과 반물질이 생긴 원리(양자요동)의 이론이나, 존재와 가치를 있게 한 이(理)의 개념을 대비하면, 태초의 우주는, 주역에서 논하는 태극과 다름이 없지 않는가?
'독일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추앙받는 라이프니츠는 16세기 초 독일의 철학자이고, 수학자, 신학자, 논리학자.....로, 뉴턴에 필적하는 미적분학을 발견하고, 최초로 이진법을 연구하였다.
라이프니츠는 세상만물을 이진법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0', '1' 이라는 두개의 십진법 숫자로 이진법을 설명한 것이다. '0' 은 텅빈것, 아무것도 없는 것, '1'은 신(神)의 개념으로 인식하였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1'인 신의 창조적 활동으로 만물이 생겨났다. 즉, 만물이 설명된다는 설명이다. 중세 신학적 사고로 이진법을 발견하고, 연구하였 때문이다.
<라이프니츠 이진법: 이 세상은 0(無)과 1(神)로 구성되고
신의 창조적 활동결과로 0과 1의 조합으로 만물을 표현한다>
라이프니츠는 친구인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선교사 요하임 부베로 부터, 중국의 주역 64괘를 접하고,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자기가 연구하는 이진법이 이미 중국에서는 널리 일반화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치가 주역의 64괘를 접하고, 64괘 이루는 단 2개의 효 즉 양효(-)를 '1'로 음효(--)를 '0'으로 본 것이다. 이렇게 하면, 64괘는 이진수로 표시된다. 이진수는 다시 10진수로 변환되고, 주역 64괘는 십진수화 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에 선교사로 온 요하임 부베가 친구 라이프니츠에게
보내준 역경의 선천차서도(先天次序圖)>
주역에서 홀 수 1,3,5,7은 하늘의 수로 본다. 하늘은 짝이 없기 때문이다. 또, 짝수 2, 4, 6, 8은 인간의 수로 보고, 이런 수들의 조합이나 위상에 따라 상호연관을 해석하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 나로서는 이런 부분에서 주역의 가정이 다소 비현실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라이프니츠가 '0'을 아무 것도 없는 것이고, '1'을 신으로 설정한 부분도 역시 받아드리기 힘든 부분이다.
나는 '0' 이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는 '무'가 아니라 모든 것을 담고 있고, 경계가 없기 때문에 텅비어 있는 것과 같은 공간적 '무' '태극'의 표상이라 하고 싶다. 또는 다른 의미로 확장하면 '비존재'의 의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신에 '1'은 '존재' 의 의미다. 그러므로 '0'과 '1'은 주역에서는 '음효', '양효', 라이프니츠는 '무'와 '신(神)으로 파악했다면, 나는 '비존재'와 '존재' 또는 축소하여, '0'을 비물질, '1'을 물질로 파악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주역64괘를 풀어볼 요량이다.
'무에서 우주가 생겨났다' 는 현대우주론을 '비존재와 존재' 또는 '비물질'과 '물질' 관계로 설명하려는 나름대로의 호기심, 나름대로의 그 가능성을 주역에서 본 것이다. 이것이 내가 주역에 탐닉하게 된 이유이고,
따라서, 고전적인 주역의 이해를 바탕으로, 라이프니츠식 이진법적 접근, 내식의 존재와 비존재의 개념이나 '비물질과 물질'의 개념으로, 주역64괘와 384효의 설명하고 비교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내 式의 해석이 전문가들에게 택이나 닫는 일인 지, 택도 아닌 지는 나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내가 구하는 것이, 침침한 눈이 감겨들기전에, 내 인식의 창틀을 깨는 데 일조를 한다면, 그로서 족하다. 하지만, 호구지책에 전혀 도움 안되는 일, 언제 끝날 지도 모르는 기약없는 일에 쓸데없이(?) 정력을 쏟아야 한다니...
내가 속세를 등지고, 은둔을 결행한다면, 현실에서 할 일이 별로 없는 것보다는 이 글을 완성하고 싶은 욕망을 제어하지 못했을 경우가 그 더 큰 이유중 하나이리라. 아무래도 노년에도 일상이 편하지 않을 것 같다.
ㅉㅉㅉ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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