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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장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심우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수상잡록/수상록.에세이

四無常

by 靑野(청야) 2012. 1. 29.
불교핵심교리에,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주의 만물은 항상 변하여 잠시도 한 모양으로 머무르지 않고(제행무상). '나'라는 존재 또한 무수한 인과 연들에 의한 작용일 뿐, 고정된 내가 없다는 것(제법무아)이니, 결국 우린 인생은 덧없다. 그러니 신기루같은 실상에 일희일비하는 중생들은 생사윤회의 고통 즉 일체개고 (一切皆苦)의 악순환에 빠질 수 밖에 없고, 이를 벗어난 경지를 열반적정이라 한다고 합니다.

사람의 한 평생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는 제한을 가지기 때문에, 인생이 아름다운 것이 겠지요? 인생에 제한이 없다면, 즉 不死의 인생이라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굳이 생기지 않을 것이고, 아니, 굳이 생길 필요가 없을 것이고, 그러니, 마감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볼 수 있겠습니까? 무상한 인생들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게으르고, 무질서 하게 보일 것입니다.

유사이래, 동서고금, 어떤 인종을 막론하고, 깊이 탐구하고 사색하며, '인생이란 무엇인가' 에 정의를 내리고자 하였지만, 모두들, '人生은 無常하다' 는 결론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 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상한 인생이라 하드라도, 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세상을 떠나 갈때 어떤 모습으로 가느냐, 그 자세에 따라 聖賢도 되고, 凡人도 되고, 고통속에 몸부림 치는 가날픈 인간의 모습을 보이기도 할 것 입니다.

四無常!,

내 경우로 볼때, 인생의 무상함에는 대충 네종류의 무상(四無常)함이 있다 하겠습니다.

이른바 구구팔팔, 천수를 누리고, 떠나가는 생은, 스스로의 생이나, 이를 지켜보는 누구에게나, 없기야 하겠습니까만, 그래도 무상함이란 덜할 것입니다. 하지만, 요즈음 연배에는, 주변의 가까운 또래들이 하나씩 둘씩 스러져가면, 누구나 '인생무상'이 뼈저리게 가슴에 와 닫습니다.

이것이 어떤 인생이든 인생이라면, 숙명적으로 짊어지고 가야하는 무상감이지요. 그것이 첫번째 無常함입니다.

또, 간혹, 졸지에, 부모, 자식이나, 배우자를 잃는, 소위 억장이 무너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의 무상감이 절정에 이르는 것은, 이처럼, 때 이르게 가까운 사람을 잃는 경우입니다. 이때의 무상감은 나이들면서 숙명적으로 안고 가는 그런 무상감에 비해 그 강도가 심하여, 상당기간 동안 인생에 대해, 딱히 뭐랄 수 없는 회의(懷疑)와 회한(悔恨)의 고통으로 시달리기도 합니다. 이를 두고, 일찌기 '일체개고'라고 부처께서 갈파하신 것이겠지요?.

내로서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게 마누라를 떠나 보고. 지금도 발병의 과정과 고통속에 생을 마감해 가는 마누라를 지켜보면서 느꼈던 억장이 무너지는 감정들이, 아직은 가슴속에 고스란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내게는 두번째 無常함이라 할 것입니다.

한겨울, 어둠이 대지를 뒤덮고 있는 아침 일찌기 집을 나서는 데, 아무도 없는 텅빈 집안에, 늦둥이 홀로, 자는 모습을 뒤로 하며 문을 나서는 출근 길에, 아마도, 어린 녀석이 일어나서 느낄 공허감을 생각하면, 아직도, 발길이 제대로 떨어지질 않습니다. 또, 방과후 집에 돌아와도 또래의 누구나 처럼, 반겨줄 엄마도 없고, 지 누나가 당직이라도 되는 날, 늦어지는 퇴근길이면, 녀석이 홀로 오랜시간, 그 썰렁함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뭔 일을 한다고, 이리 바삐 발걸음을 재촉하여야 하나? 열심히 바쁜 듯 살지만, 내가 이래야만 하나? 아직도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하고 어영부영 세월을 보내니, 어린 녀석을 생각하면, 인생에 대한 남다른 무상함이 내 가슴을 오래도록 아리게 합니다. 이것이 내개는 세번째 無常함입니다.

하지만, 이런 무상감은 숙명적으로 받아드리거나, 세월이, 시간이 지나면 점점 엷어질 것이고, 엷어져야만 하는 것들입니다. 늦둥이 녀석을 씩씩하게 키우다 보면, 녀석이 씩씩하게 자란다면, 이런 무상감은 무색하게 될 것임을 압니다.

이런 무상함보다, 더욱, 나를 가장 무상하게하는 것은 , 내자식, 후세대에 지구문명의 지속성을 자신있게 말해줄 수 없다는 무상함입니다.

찌지고 볶는 개같은 정치판 때문이 아닙니다. 부정과 부패, 이기심에 따른 편견, 사기와 타락으로 얼룩진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 때문이 아닙니다. 현대사만으로 두고 볼 때도, 두차례의 세계대전을 포함한 무수한 전쟁들, 여러해를 지속되어오는 아프리카의 기아, 9.11사태, 아프카니스탄이나 이라크의 전쟁, 리비아등 중동의 유혈사태, 우리민족에게는 한일합방, 육이오전쟁같은 대규모의 참화, 최근의 천안함, 연평도 사건등, 당시 그런 참담한 사태를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느껴야 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회의, 그때문에 아마도 수많은 당대의 사람들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회의하고, 인생의 무상함에 몸서리를 쳤을 것입니다.

그런 것이라면, 역사이래 무수히 반복되면서 어떤 때는 전쟁으로, 어떤 때는 혁명으로 어떤 때는 스스로의 정화로 무너지고, 다시 쌓고, 반복을 하겠지요, 어떤 형태로든 사회는 이어 가겠지요?

하지만, 언젠가 '문명과 미래와 나'에서 글을 올렸듯이, 오랜 문명의 역사가 지속되어온 지구가, 그결과로 지구생태계의 이상과 자원의 고갈의 문제로, 이대로는 지구미래를 보장할 수 없든 지경에 이르렀고, 딱히 뚜렷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을 때, 느끼는 무상감입니다.

문명이 대를 이어 영속하지 못한다면, 한 세대든 두 세대든, 그 정도의 지속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백년대계' 라는 준비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악착같이, 돈을 벌고, 자식들을 공부시켜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살려고? 행복하게?  진정한 나의 무상함은 여기에 있다 할 것입니다.

당대에 고민하는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해결의 해답을 구하지 못하고, 자식세대에 고스란히 이어진다면, 그 문제들이 가시화 되고, 직면하게 될 자식들이 어떻게 헤쳐 나갈까? 자식세대는 그런대로 헤쳐나간다하여도, 그네들 자식세대는 또 어찌 해야 하는가? 때문에, 아마도 내 자식에게는, 나에게 밀려오는 것에 비할 수 없는 인생의 무상함에 몸서리치지 않을까?

많은 이들이 '인생무상' 이라 하였지만, 부처께서, 제행무상, 일체개고를 벗어나는 길이 열반적정이라 하였듯이, 문명의 종말에 대한 무상함을 벗어나는 길을 열어줄, 이시대의 부처는 어디 있을 것인가?

四無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밤낮없이 내여린 가슴을 엄습하는 데, 책상머리, PC앞에서 앉아 뭔 전략이고 연구가 어떻고, 뭔 미래를 기획한다?

........

"빈아, 일어났어? 오늘 무지 춥다. 옷두텁게 껴입고 학교 가거라"

無常함이 이제 생활화 되었다 애써 자위해보지만, 새벽부터 출근하여, 전화로, 늦둥이 녀석의 개학 이틀째를 챙겨주는 내 목소리는, '강하게 키워야 한다' 는 다짐이 무색하게, 아직도, 힘이 빠지고, 애처로움이 한 껏 묻어날 터입니다. 내가 그걸 압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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