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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장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심우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수상잡록/회상단상

집안의 小史

by 靑野(청야) 2011. 3. 4.

내 고향 거제도는 평지가 거의 없는 산악지대입니다. 남쪽해안 그러니까 통영 앞바다를 바라보는 현재의 거제시 거제면, 조선시대 거제현의 중심지였던 이곳이 계룡산에서 뻗어내린 완만한 구릉끝에  그나마 좀 넓은 터를 이루고 있고, 계룡산 반대쪽, 그러니까 현재 삼성조선소가 있는 곳이 바다를 메운 것을 포함하여 조금 넓은 평지를 가지고 있으며, 대우조선소가 있는 장승포읍 아주리가 500m급 옥녀봉 자락끝에 해안을 포함하여 쬐금 넓은 들판을 이룰 뿐이지요. 이곳의 평지라 해봐야 드넓은 육지의 들판에 비하면 한 모퉁이급밖에 안되지만...

거제는 섬이면서도 해발400-500m급 산들이 즐비(?)하고 그 산들에서 뻗어나간 해안선과 계곡이 아름답고, 깊기로 유명하지요. 섬답지않는 울창한 산림, 아기자기한 산골짜기 계곡들, 셀 수 없는 수많은 유.무인도로 이루어진 주변의 다도해,  바다인지, 호수인지 구분이 안가도록 굽이굽이 섬을 휘돌아 이루어지는 해안선이 참으로 아름다운 곳으로, 구석구석 작고 아담한 해수욕장, 해안선으로 난 길을 따라가는 바닷가의 여행길, 아무데서나 배를 빌려 뱃놀이를 즐길 수 있고,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이것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이보다 더  황홀한 등산이 없지 싶은 그런 동네입니다.

제법 덩치가 크고, 크고 작은 산들이 연이어 있어, 덩치이상의 산악미를 주며, 숲이 울창하고 산들이 무리를 이루어, 이루어진  수많은 계곡덕분에,  공업화가 되기전에는 3개월을 비 한 방울 안내려도 거제도 계곡의 수원(水源)이 고갈되지 않는 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거제도

 

巨濟-‘크게 구제한다’는 뜻일 게지요? 전에는 잘 모르지만, 육이오 때, 이 땅을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 한번 크게 구제 안했나고요. 호기심이 절정에 이르렀던 어린 나이, 수시로 귀를 쫑긋하며 들은 이야기로는  당시, 마산 진동고개앞까지 진출한 침략군들이 쏘아대는 포소리가 거제하늘까지 울렸다는구먼요.

그런 거제에서  지리적으로 중앙에 해당하는 오지에 저희 집안도 옹기종기 평화롭게(?) 모여 살았지요. 굳이 오지라 표현하는 것은 섬이면서 해안가에 가려면, 수Km나 십수Km를 가야하고, 당시 비포장 신작로를 풀풀거리며 다니는 버스가 2~3시간에 한대꼴로 지나가는 그런 산골같은 곳이였기에 하는 말이지요.  

그때 사진을 구할길이 없지만, 주변 산세나 동네가 이 동네보다 
좀 더 가파르게 형성된 마을이였습니다. 사진의 마을은
그때 내가 살던 곳의 분위기가 90%정도 풍기는 동네이군요

신라시대라는 설도 있고, 고구려라는 설도 있는 데, 당나라에서 유학을 전한 유학자 한 분인 ‘진서’라 함자를 쓰시던 양반이 시조라던가? 이후로 언제부터 정착했는 지 모르지만, 우리 집안은 거제에서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다네요. 野史적으로는 고려시대 무신 정권때 귀양온 왕(아마도 의종이였지요?)이 지금도 敗王城이라는 역사적 자취가 있는 그런 城을 쌓고 왕정복위를 꾀하려 힘을 기르다가 천기가 누설되어, 무신정권의 병사들에 일망타진되면서, 당시 성주변에 살던 왕씨들이 이를 피해 거제의 지하로 숨어들었다는 설,  조선이 건국하고, 이방원(세조)에 이르기까지, 고려 왕족인 왕씨들이 수난을 당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全,田,玉등으로 성을 바꾼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거제에 집성촌이 있는 것을 보면, 순전히 내 추측건데, 아마도 고려 무신정권때 패왕성에 관련된 곡절이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만. '신라시대 거문고의 명인으로. 사찬(沙湌) 공영(恭永)의 아들로서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 거문고를 배우기 50년에 신조(新調) 30곡을 지어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하고, 속명득은 또 귀금선생(貴今先生)에게 전하였다' 는 옥보고(玉寶高) 이야기가 역사에 전하는 것을 보면, 여느 성씨처럼 딱히, 이렇다 단정할 수없이, 성씨가 뿌리를 내려온 사연과 역사가 두두두루 있다 해야할 것입니다.

머슴들의 반란 ! 아마도 동학혁명이지 싶은데, 종종 할머니의 시어머니로부터 ‘장터에 난리가 나서 머슴들이 죄다 얼굴에 검정칠을 해갖고, 거리로 쏘아다니며, 쥔도 몰라보고....해서, 언 놈이 그 난리에 가담했는지, 담에 혼줄을 내리라 시퍼서, 집안 청장년들을 동원 햇불을 들고 찾아 다니고… ‘ 하는 말씀을 귀 못이 박히게 들었다는 말씀을 자주하셨답니다. 우리 할머니는 전주 이씨인데, 친정아버지가 훈장이였던지라, 어깨 넘어로 배운 천자문을 나에게 읊어주시곤 하던 그런 영민한 할머니로 기억합니다.  당시19세기 말에, 제법 여러 머슴을 둘 정도라면,우리 집안도 쬐금 살았다 그 말씀 아니겠어요? 

그런 집안이 삼촌의 좌익활동과, 그에 따른 불이익, 그 휴유증으로 인한 아버지의 병환이후 줄줄이 이어지는 흉사, 7남매의 뒷바라지에다….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할 즈음, 거의 쫄닥 망해버렸지요. 덕분에 지금은,형제나 가족들이 서울, 부산, 창원, 인천등지로 뿔뿔히 흩어져 살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다행히, 모두가 건강하게 그런대로 평범하게 살아 가고 있습니다

세월은 흘러…울 아버지께서 돌아가신지 수년이 지났네요. 돌아가실 당시 연세가 84세. 4남2녀중 셋째이고 유일하게 無學이었지요. 하지만, 독학으로, 할머니처럼, 어깨 너머로 배워 한자, 한글을 깊이(?) 깨우치고, 초등학교 수준의 산술정도는 어렵지 않게 응용하여,  마을의 산림살이를 책임지기도 하고, 마을개조운동에 앞장서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60년대 중반이였다고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마을의 집집마다 앰프를 달아, 라디오소리를 들려주고, 지붕개량, 도로개량등, 초기 새마을 운동 비슷한 그런 활동이였지요. 때문에 가뜩이나 없는 산림에, 머슴에게 맡기고 논농사, 밭농사를 팽개(?)치려다,  할머니께서 엄청난 잔소리 끝에, 하룻만에 머슴을 내보내버린 사건도  기억이 나는군요. 할머니께서는, 아마도 '이 산림에 무슨 머슴' 심정이였겠지요?  

첫째였던 백부는 배운 바(?) 있어 일찍이 신천지를 개척하러 간답시고 북간도로 가셨답니다. 그 자손이 연변과 이북에 퍼져 살고 있다는 소식이 편지로 70년대말에서- 1980년대 초에 걸쳐, 중앙정보분가 안기부시대인가 모르지만 검열을 거쳐 왕래된 적이 있었고, 그 후 1980년대 말에 연변의 사촌누님이라는 데 60이 훨씬 넘은 노인네가 다녀간 적이 있었읍니다.

둘째였던 백부는 일제시대 우체국 행정서기였는 데, 지금으로 치면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진행되어서, 22세의 백모님과 1남1여를 두고 저 세상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졸지에 청상과부가 되신 백모님은 수년전에 돌아가셨지만, 90이 다 될 때까지 홀로 살아 오시면서, 모진시절을 견디는 지혜일런가? 중년시절에 무당이 되어, 그때에 이르기까지 거제 일원의 神母(대무당)으로서 인생을 버터 오셨습니다.

넷째였던 숙부는 재기가 넘쳤다고 하나, 당시 좌익운동하다 집안을 멍들게 하고 지리산 전투에 참가하여 행방불명이 된 걸로 알려져 있읍니다. 해방이 되어 극심한 좌우 혼란기에, 국경수비대인지, 국방수비대인지에 추적당해, 20대초반의 숙부는 마치 다람쥐처럼 집과 뒷산을 오가며 수비대의 추적을 피하다 보니, 일자무식의 애꿎은 울 아버지가 끌려가서, 태형은 기본이고 꺼꾸로 매달려 고추가루를 물에 타서 코에 집어넣는 고문등에 기절과 깨어나기를 몇날을 두고 여러 차례 당하신 모양입니이다. 일제시대, 일제 순사에게 배운 온갖 못된 고문수법에 당시 미군정시대이니 거의 무법천지하에서 당하셨으니 오죽하였겠어요?

“니 동생 어데 숨겼노? 있는 데 불어” 이 말과 함께….

때문에 울 아버지는 나라가 번듯이 선 후로도 "군대는 몹 쓸 곳이다. 어떤 수단 방법을 동원하드라도 군댈 가지마라"  하시면서, 내가 ROTC지원할려고 신원조회문제로 아버지께 의논하자, 군인, 경찰에 극도로 불편한 감정을  이렇듯 나에게까지 숨기지 않으셨지요. 

수비대가 아버지를 아무리 고문해도 숙부를 잡지 못하자, 사람들을 모아  밧줄로 당시 그런대로 사는 집안의 상징이였던 기와집을 걸어서 넘어뜨렸다는 겝니다. 그 후, 기와는 다 깨지고, 흩어지고 해서, 초가집으로 다시 세웠다 하네요, 1970년대 초, 새마을 운동인가 하여 양옥으로 다시 지을 때까지 초가집 4귀퉁이밑엔 명칭은 잘 모르지만 한쪽씩의 기와를 얹어 두었드랬습니다. 아버진 옛일을 회상하실 때 그 때일을 말씀하시며, 초가지붕을 막대기로 들쳐 올리고 그 아래에 있는 기와를 보여주시곤 했지요. 당시 지금의 나의 늦둥이보다 조금은 더 컸던 나는 그 기와를 볼려고 뒤발꿈치를 곧추세우면서 어린 마음에 막연하나마. 마음속에 ‘우리집도 옛날에는 잘 살았었다…’하는  어떤 자부심이 생기곤 했었다고 어렴풋이 회상이 되네요.

이 숙부의 좌익활동은 두고두고 우리 집안의 앞길에 커다란 암초로 한참을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그 존경하는(?) 전두환 정권때 연좌젠가가 폐지될때까지는.

셋째였던 울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 그러니까 내 할아버지께서는  쬐금 배웠다는 아들들이 배우고 나면 집안 돌보기를 우습게 알고, 어디로 어떻게 흩어져 갈지 모른다며, 이러다 제사지내 줄 자식 없겠다 싶었던지, 울 아버지만큼은 무학으로 맹글어 버렸다네요.
 
하지만, 그 아버지도,  2차대전 한창때, 일제시대 마구잡이식 징용으로 끌려가셔서 오사카 조선손가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해방되던 해, 도망쳐 나오셨다는 데. 얼마전에 나라에서 이런 분들은 신고하라했다 하네요,  신고받을려거던 우리 집안 몰락하여 초근목피하던 시절에 하던가, 아님, 울아버지 살았을 때라도 하지, 울 아버지, 주변 인사들 돌아가시고, 근거도 증인도 소멸한 이 마당에 누굴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히로시만가에 미군들이 이상하고도 엄청난 폭탄을 터뜨려 일본놈들이 몰살을 하고 그 때문에 일본놈들이 항복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당시 징용자들사이에 퍼졌다네요. 일부는 세상이 어수선하여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일본놈들이 몰살을 했다는 그곳으로 우루루 가보기도 했다는구만요. 방사능이 얼마나 무서운 것도 모르고….. 강물인지 시낸지 모르지만 바짝말라 있고, '말라버린 강에는 시체가 바짝 익어서 이곳 저곳에 장승처럼 있었다' 고 아버지께서는 만화같은 이바구를 들려주곤 했지요, 아마도, 어린 이해력에 아버지의 말씀이 만화같은 상상으로 고착되어 회상의 언덕에  잠들고 있던 것인지?

울 아버지 이바구에는 아마도 약간의 뻥이나, 무지속에 소문으로 부풀러진 점도 있겠지만…야튼, 그 위험하다는 방사능 피해는 없으신겐 지, 그 후 태어난 우리 형제들이 그런 휴유증 증세가 없는 것을 보니, 울 아버지 직접 가보시지는 못하고 소문으로 소문으로 들으신 걸, 마치 당신이 가본 것처럼, 이바구 하셨을 수도 있지 싶다는 걸 부인하진 못하지만…

그 후 아버진 해방소문을 듣고, 이 지옥 같은 곧을 어서 빠져나가고 싶어서 몇몇이서 야밤에 도주하여 브로커들에게 돈을 주고  밀항선(?)을 타고 귀국했답니다. 아니였다면, 우리집안도 누구들처럼, 재일동포가 되었겠지요?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되셨지만, 나에겐 참으로 자상한 고모님이 두분 계셨는 데, 큰 고모님의 함자가 '아지(阿之)’ . 좀 생소하고 엽기적인 이름이지요. 할아버지는 둘째로 본 자식이 여식이라 상당히 뜨악하셔던 가배요. 해서 별 생각없이 그냥 나오는 대로 부르기 쉽도록 그렇게 함자를 지으셨고. 5번째 본 자식이 또 여식이라, 농번기라 바쁘기도 한데, 호적에는 올려야 되겠고 해서, 아무 생각없이 호적계에 갔는 데,

호적계 직원이 “…저 따님의 호적에 올릴 이름…?” 라고 묻자, 할아버지 그 때사 딸아이  이름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왔으니…해서,

“흠흠~~ 큰 아 이름이 ‘아지’잉께, 이눔은 ‘또아지’라 하지뭐, 그리 올려주시게”

그리하여 둘째 고모님은 호적계 직원이 한자로 호적에 ‘又阿之’ 로 올렸다는 전설적인 우스개(?) 말씀을 아버지로 부터 들었던 기억이 생생한데,  실제로는 함자가 소문대로 엽기적인 게 아니고, 점잖은 이름으로  올려져 있다하니, 정말로 우스개 말씀이였는지, 아니면, 어릴 때 집안에서 편하게 부르던 아호를 말씀하신겐지,중간에 애들 앞길에 걸림이 될까봐 호적을 정정하였는지 알길이 없군요

당시, 집안에서 이런 우스개 이야기가 종종회자되곤 했는데, 이를 들으면, 집안의 어르신들, 당사자인 돌아가신 고모님들의 재치와 유머를 느낄뿐만 아니라 당신들의 아버지 즉 저의 할아버지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우회적으로 표출하신 마음을 읽을 수 있지요

누구나 겪은 격동의 세월속에 저희 집안도 예외없이 나의 대에 이르기까지. 기쁨과 즐거움 보다는 고통과 슬픔, 인고의 세월이 훨씬 많았던 게 사실입니다. 기쁜 일, 슬픈 일, 때론 기억속에 떠올리기조차 민망하거나 부끄럽거나 증오스런 일까지….일제시대 이전, 일제시대,  그리고 내가 태어난 50부터,60년대,70년대,80년대, 90년대, 내 늦둥이가 태어난 새로운 밀레니엄세대인 2000년대, 그리고 작년의 나의 喪妻에 이르기 까지, 천지개벽의 격동기의 시대를 거치고, 수많은 세월들을, 수많은 날들을 용케도 버텨며 이만큼 지나왔네요.

하지만, 간절히 원컨데, 우리의 후대들은 과거의 집안의 질곡의 역사를 벗어나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새로운 집안의 희망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선한 이웃들과 어울려 성장해 가야겠지요?

나뿐만니라, 이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후대들도 대를 이어, 그렇게 되기를 간절하게 소망하고,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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