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의 사료만으로 설명하려했던 고조선의 역사가 역사공정을 진행중인 중국측과 우리의 역사마저도 의심하며 배척하려는 일부 대한민국인들에게 좀 더 객관적으로 다가가 수 있도록 그 역사의 중심이었던 중국의 사료들로 고조선의 실체를 증명하고 알리는 일이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신동아 2004년 2월호에 실린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님의 글을 개재하였으니 그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 역사적, 문화적인 뿌리와 그 범위를 재확인하시어 우리 개개인 하나하나가 역사적 자긍심으로 정수(精髓)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중국사료에 나타난 東夷 고조선의 실체 >
“동방문화 뿌리는 漢族 아닌 韓族”
- 우리의 조상 동이는 개벽 이래 중국에 살았다
- 동이는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민족의 뿌리
- 강태공, 맹자, 묵자도 동이족
-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九夷’가 바로 고조선
-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는 동일 민족
‘사고전서’에서 단군과 동이족의 실체를 확인한 심백강 원장.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여러 ‘고기(古記)’ 들을 인용하고 있어 우리나라 고대국가에 관한 역사서적이 적지 않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조대기(朝代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삼성기(三聖記)’ 등과 같은 한국의 고대사와 관련한 여러 책들이 거명되고 있어,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이외에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기록들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병란을 거치고 또 36년에 달하는 일제 강점기를 경유하면서 이러한 귀중한 자료들이 말살되고 인멸되어 오늘에 전하는 것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1.동이는 고조선의 열쇠
이처럼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문헌 자료가 극히 제한적인 현실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국내자료만으로 고조선 역사를 비롯한 고대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오늘날 잃어버린 상고사를 되찾기 위해서는 국내에 남아 있는 일부 문헌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국내외 사료(史料)를 광범위하게 조사·연구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그동안 자료가 없다는 핑계로 고조선 역사를 적극적으로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필자는 우리 역사의 뿌리요 또 반만년 역사에서 절반을 차지하는 고조선 역사의 복원이야말로 이 시대의 과제임을 통감하고 먼저 고조선 연구를 문헌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들을 국내외에서 널리 발굴, 조사, 수집, 정리하여 7권의 책을 펴낸 바 있다(‘조선세기’ ‘조선왕조실록 중의 단군사료’ ‘사고전서 중 단군사료’ 등).
이번에 다시 ‘사고전서(四庫全書)’ 경부(經部)·사부(史部)·자부(子部)·집부(集部) 중에서 동이사료(東夷史料)를 발췌하여 ‘사고전서 경부 중의 동이사료’ 등 4권의 책으로 묶고 여기에 주요 내용을 간추린 ‘사고전서 중의 동이사료 해제’ 1권을 덧붙여 2500쪽에 달하는 총 5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앞으로 ‘사고전서’ 중에서 치우, 고조선, 복희 부분을 따로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사고전서’에서 이처럼 방대한 동이 사료를 발췌하여 편찬한 것은, 고조선이야말로 고대 동이가 세운 대표적 국가이며 동이를 추적하면 고조선의 실체를 복원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고전서’는 청대(淸代) 건륭(乾隆)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叢書)로 무려 7만9000여권에 달한다. 선진(先秦)시대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국의 주요 문헌들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는 이 책은 그 사료적 가치를 국내외에서 모두 인정하는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 총서다. 특히 그 중에서도 동이 사료 안에는 한국역사·동양역사의 물꼬를 바꿀 수 있는 그야말로 새로운 발견에 필적하는 귀중한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이제 우리 사학계가 이 자료들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고조선사 복원은 물론, 단절된 부여·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를 찾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기대된다.
그러면 아래에서 ‘사고전서’ 동이 사료 중에서 동이와 고조선의 실체를 밝혀준 새로운 내용 몇 가지를 골라 설명해보기로 한다.
2.동이의 터전이었던 중국
동양 문헌에서 동이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서경(書經)’ 주서(周書) 주관편(周官篇)으로 다음과 같다.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征伐)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하례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
성왕은 중국의 서방세력이 동방의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뒤 세운 서주(西周)의 제2대 왕으로 주 무왕(周武王)의 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주세력이 집권하면서부터 동방의 이민족(夷民族)을 서주세력과 구분하여 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이 동이라는 용어가 출현한 배경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은 서주가 지배하기 이전에 이족이 먼저 지배했고, 따라서 서주의 건국은 동서남북 사방에 퍼져 있는 이족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까지도 서주에 저항한 것이 바로 동이족이었다.
그렇다면 서주세력이 동이라는 호칭을 쓰기 이전에 동방민족의 본래 호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夷)’였다.
예컨대 ‘서경’에 등장하는 우이(& #54089;夷)·회이(淮夷)·도이(島夷)·내이(萊夷) 등이 그것이다.
이(夷) 앞에 지역명칭을 덧붙여 회하(淮河) 부근에 살면 회이(淮夷), 내산(萊山) 밑에 살면 내이(萊夷)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夷)에서 더 거슬러올라가 여(黎), 즉 구려(九黎)가 이(夷)의 원형이었다고 본다.
그러면 이족(夷族)들은 언제부터 중국에서 살게 됐을까. ‘사고전서’ 경부 ‘모시계고편(毛詩稽古編)’ 16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서경’의 우공편(禹貢篇)을 살펴보면 회이·우이·도이·내이·서융(西戎)이 다 구주(九州)의 경내(境內)에 살고 있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우(虞)·하(夏)시대로서 중국 안에 존재하는 융적(戎狄)의 유래가 깊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고 이 자료는 이 이적(夷狄)들이 멀리 당(唐)·우(虞)시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 개벽(開闢) 이래로부터 중국 땅에 살고 있던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이들은 어느 국한된 지역이 아닌 중국 전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살았으나 나중에 화하족(華夏族)이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동방에 사는 이(夷)를 동이, 서방에 사는 이를 서융, 남방에 사는 이를 남만, 북방에 사는 이를 북적이라 폄하하여 불렀던 것이다.
실제 삼대(三代)시대, 특히 주(周)시대의 순수한 중국이란 9주(九州) 중 연주(& #53455;州), 예주(豫州), 즉 오늘의 하동성과 하남성 정도가 고작이고 나머지는 순수한 중국인뿐만 아닌 동이족들이 함께 사는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3.오랑캐가 아니라 동방의 뿌리
동이가 중국의 토착민족이냐 아니면 외부의 침략세력이냐에 대해 고대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견해가 존재했다.
하나는 동이족이 삼대(三代) 이전부터 중국에 토착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진시황(秦始皇)이 이들을 축출했다는 것으로, 한나라 때 학자 공안국(孔安國)이 대표적인 토착론자다.
다른 하나는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 융적(戎狄)이 중국에 침략해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것으로 왕숙(王肅)이 주장한 학설이다.
이 두 견해 가운데서 ‘모시계고편’의 저자는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가 왕숙보다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한 이유는, 공안국이 시기적으로 진(秦)나라와 100년이 넘지 않은 가까운 시기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가 전해들은 내용이 비교적 정확하리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위의 기록으로 볼 때 동이족은 본래 중국의 변방세력도 아니고, 침략세력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개벽 이래 줄곧 중국 땅에 터전을 이루고 살아온 토착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사부’와 ‘후한서(後漢書)’ 115권에는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東方曰夷)”는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의 내용을 인용하고 나서 이(夷)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夷)란 것은 저(& #55154;)이다(夷者& #55154;也).”
여기서 이(夷)를 저(& #55154;)와 동일한 의미로 풀이했는데 그렇다면 저(& #55154;)란 과연 무엇인가. 저(& #55154;)란 ‘노자(老子)’의 ‘심근고저(深根固& #55154;)’란 말에서 보듯이 일반적으로 근저(根& #55154;)·근본(根本)·근기(根基)·기초(基礎) 등의 의미, 즉 뿌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후한서’는 저(& #55154;)의 의미를 다시 저지(& #55154;地), 즉 “모든 만물이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어나는 것(萬物 地而出)”이라고 설명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땅에 뿌리 내리고 움트고 자라서 꽃피고 열매 맺는 근(根)·묘(苗)·화(花)·실(實)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런데 이 만물이 땅에 뿌리를 두고 생장하는 만물저지(萬物& #55154;地)의 저(& #55154;)와 동이의 이(夷)를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저(& #55154;)와 이(夷)를 동일한 개념으로 본 이 고대 중국의 해석에서 동이의 이(夷)는 우리가 그동안 알아왔던 오랑캐 이(夷)가 아니라 동방의 뿌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숭고한 뜻을 지닌 동이의 이(夷)자가 어째서 오랑캐라는 뜻으로 변질되었는지, 우리 스스로 비하하여 오랑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4.강태공·맹자·묵자도 동이족
‘사고전서’에는 “맹자가 추나라 사람으로, 추나라는 춘추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동이국가”라고 기록돼 있다.
‘사고전서·자부’ ‘유림(喩林)’ 27권에는 “대우(大禹)가 동이에서 태어났다(大禹生於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태평어람(太平御覽)’ 780권에는 “기(杞)나라는 하(夏)의 후예국인데 동이로 되었다(杞夏餘也 而卽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기나라가 하의 후예라는 것은 공자도 언급한 사실로, 그 내용이 ‘논어’에 실려 있는데 이런 기록들은 하우(夏禹)가 동이족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해준다.
‘사고전서·자부’ ‘여씨춘추(呂氏春秋)’ 14권에는 “태공망(太公望)은 동이지사(東夷之士)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강태공(姜太公)은 문왕(文王)을 도와 은(殷)을 멸망시키고 서주(西周)왕조를 건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원래 동이(東夷) 사람이었던 사실이 여기서 증명되고 있다.
‘사고전서·자부’ ‘명현씨족언행유편(名賢氏族言行類編)’ 52권에는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묵자(墨子)’의 저자인 묵적(墨翟)이 본래 고죽군(孤竹君)의 후예”라는 내용이 나온다.
고죽국(孤竹國)은 은(殷)나라 현자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살던 나라로 동이 국가였으며,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이었다(高麗本孤竹國)”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겸상애(兼相愛)·교상이(交相利)를 제창한 위대한 사상가 묵자 또한 동이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경부’ ‘사서석지(四書釋地)’3, 속(續)권 하에는 “맹자(孟子)는 추(鄒)나라 사람인데 추나라는 춘추(春秋)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본래 동이 국가였으니 그렇다면 맹자 또한 동이 사람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도 나온다.
주는 노(魯)나라 부근에 있던 동이 국가로 공자가 쓴 ‘춘추(春秋)’에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맹자가 본래 이 주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대(宋代) 4대사서(四大史書) 중 하나인 ‘태평환우기(太平?宇記)’에 보면 맹자가 “요(堯)는 북적지인(北狄之人)”이고 “순(舜)은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고 말한 것이 나온다.
공자는 은(殷)의 후예인데 탕왕(湯王)이 건립한 은이 동이의 선민(先民)이 세운 나라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뿐 아니라 하우(夏禹)·강태공·묵자·맹자도 모두 동이 출신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화하족(華夏族) 가운데 문왕·주공 이외에 내세울 만한 역사적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동양의 사상과 문화를 일군 핵심 인물은 거의가 동이에서 배출됐다는 이야기가 되고, 따라서 동양의 사상과 문화는 중화사상·중국문화가 아니라 동이족에 의해 형성된 동이사상·동이문화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영국인은 인도와 셰익스피어를 바꿀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한 위대한 인물이 지닌 의미와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태공·묵자·맹자 등은 동양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동안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중국인으로만 알아왔던 이 위대한 인물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으로 밝혀진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다.
잃어버렸다 찾은 돈은 잃어버리지 않은 돈보다 더 귀하게 느껴지듯 잃어버렸다 되찾은 조상은 잃어버리지 않은 다른 조상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5.‘書經’의 ‘우이’가 바로 고조선
‘사고전서·경부’‘우공추지(禹貢錐指)’ 4권에는 “동이 9족(族)을 우이(& #54089;夷)로 보고 우이를 고조선으로 본다”는 견해가 실려 있다.
우이라는 말은 ‘서경’ 요전(堯典)에 나온다(堯分命羲仲 宅 夷 曰?谷). 우이는 바로 요(堯) 당시 존재했던 동양 고전의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이’의 명칭이다.
그런데 이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면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동이 9족의 뿌리요 원류라는 이야기가 된다.
단절된 고조선 역사를 복원하는 데 이런 자료 한 장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100권의 가치를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 ‘후한서’와 ‘두씨통전(杜氏通典)’에 모두 동이 9종(九種)을 우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땅이 한(漢)의 낙랑(樂浪)·현토군(玄?郡)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서경’ 우공(禹貢)에 청주(靑州)를 설명하면서 맨 먼저 우이를 언급한 것을 본다면 조선(朝鮮)·구려(句麗) 등 여러 나라가 우(禹) 임금시대에 실제 다 청주지역에 있었다(朝鮮句麗諸國 禹時實皆在靑域).”
이것은 ‘경패(經稗)’ 3권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자료는 구이(九夷)가 우이(& #54089;夷)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오례통고(五禮通考)’ 201권에는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현토·낙랑 두 군(郡)이 다 옛 ‘우이’의 땅으로 청주(靑州)지역에 있었다”는 것과 “연(燕)과 진(秦)이 경략(經略)했던 조선은 대체로 우공(禹貢)의 우이지역이었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서 우리는 우이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현토·낙랑으로 변화된 고조선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또한 연(燕)·진(秦)시대의 조선과 한 무제가 설치한 현토·낙랑이 모두 오늘의 한반도가 아닌 옛 청주지역, 즉 산동성과 요녕성, 하북성 일대에 위치해 있었던 사실을 이 자료는 밝혀주고 있다.
‘사고전서·사부’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 29권에는 “당(唐)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 #54089;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에서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것은 중국인들이 신라와 백제를 우이의 후예국가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일연(一然)이 ‘삼국유사’에서 건국시조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는 묻혀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짧은 기록만 가지고는 고조선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다. 단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고 한 이 기록은 고조선 2000여년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다.
마치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에 비길 만한 참으로 중요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동양문헌상에서 우이를 추적하면 그동안 잃어버린 채 살아온 고조선의 전모를 복원할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6.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나라 ‘구이’
‘사고전서·자부’ ‘명의고(名義考)’ 5권에 “구이(九夷)는 동이이고 동이는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또 ‘사고전서·경부’ ‘주례전경석원(周禮全經釋原)’ 8권에는 “동이 기자의 나라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하던 곳이다(東夷箕子之國 孔子所欲居)”라고 했다.
‘논어’에는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子欲居九夷)”는 기록만 있고 구이가 바로 기자조선이라는 말은 없다.
그런데 ‘명의고(名義考)’ 5권은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그 나라가 바로 기자조선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런 자료를 통해서 고조선이 여러 동이 국가들 중에서도 특별히 문화적 수준이 높고 대표성을 띤 동이 국가로, 공자가 마음속으로 동경하던 나라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십일경문대(十一經問對)’ 1권에는 ‘논어’ 자한편(子罕篇)의 ‘자욕거구이 혹왈누 여지하 자왈 군자거지 하루지유(子欲居九夷 或曰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라는 대목을 논하여 “여기서 말하는 군자는 기자를 가리킨 것이지, 공자가 자칭해서 군자라고 한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동안 우리는 ‘논어’의 이 부분을 주자의 해석에 따라 “군자거지(君子居之)면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군자가 가서 산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그 군자가 공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이 자료는 “군자거지(君子居之)니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구이에는 군자인 기자가 살았으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공자는 평소 겸양의 미덕을 강조해 자칭 군자라고 했을 가능성이 적고, 또 ‘산해경(山海經)’에도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구이를 기자조선으로 보고 “기자조선은 일찍이 군자인 기자가 도덕정치를 펼친 문화국가이니 가서 산들 무슨 누추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런 자료도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구이가 바로 고조선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좋은 근거라 하겠다.
‘사고전서·경부’ ‘상서주소(尙書注疏)’ 17권에는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축하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라는 주관서(周官序)의 내용과 여기에 대한 공안국(孔安國)의 다음과 같은 전(傳)이 실려 있다.
“해동(海東)의 제이(諸夷)인 구려(駒麗)·부여(扶餘)·한(?=韓)·맥(貊)의 무리가 무왕이 상(商)나라를 이기자 다 길을 통하였는데 성왕이 즉위하자 배반하였으므로 성왕이 이들을 정벌하여 복종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의 소(疏)에는 ‘정의(正義)’를 다음과 같이 기재했다. “여기 말한 동이는 비단 회수상(淮水上)의 동이만이 아니기에 해동의 제이(諸夷)라고 한 것이다.
고구려·부여·한·맥의 무리는 다 공안국의 시기에도 이런 명칭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공안국의 말처럼 주 무왕이 당시에 정벌했던 동이가 해동에 있던 여러 동이, 즉 구려·부여·한·맥의 무리였다고 한다면 구려·부여·한·맥은 한대(漢代) 훨씬 이전인 주(周)나라 시기에 이미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공안국은 한(漢)나라 때 유명한 학자로 그의 학설은 어느 누구의 주장보다도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이 자료는 한·당(漢唐)나라 이전 고구려·부여·삼한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중국 전한(前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갑자년(甲子年)(B.C 57)에, 고구려가 전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계미년(癸未年)(B.C 38)에, 백제가 전한 성제(成帝) 영시(永始) 을사년(乙巳年)(B.C 16)에 각각 건국된 것으로 기술했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상한이 모두 중국 한(漢)나라 시대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 나라 고대사 연구에 쌍벽을 이루는 자료지만 ‘삼국사기’는 우리 역사의 기술을 삼국시대로 국한시킨 한계를 갖고 있고, ‘삼국유사’는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까지 다루고 있지만 고구려·백제·신라의 출발을 모두 중국 서한(西漢)시대로 한정시켰다.
그것은 일연이 승려의 신분으로 몇몇 제한된 자료에 의존하고 ‘사고전서’와 같은 방대한 중국의 사료를 섭렵할 수 없다 보니 역부족에서 온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서 고구려·부여·삼한 등의 뿌리가 확인된 만큼 잘못된 국사교과서의 내용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입으로는 반만년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삼국사기’‘삼국유사’ 위주로 고대사를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한·당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백제·신라가 우리 역사의 뿌리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7.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
현재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은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반도의 동이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학술적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이 논리를 수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동이와 중국의 동이를 연결시킬 경우,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시켜온 종래 주장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민족의 동이가 동일하며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사고전서’의 여러 사료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예컨대 “동이 9족이 우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다”라는 ‘우공추지’의 기록,
“구이(九夷)는 현토·낙랑·고구려 등을 말한다”는 ‘사서혹문’의 기록,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통감기사본말’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고구려·백제·신라의 동이는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둘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신라는 조선의 유민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조선이 동이라면 그 뒤를 계승한 신라가 고조선의 동이와 동일한 동이임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다.
문학과 역사가 다른 점은 문학이 있을 수 있는 일을 쓰는 것이라면 역사는 있었던 일을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참이어야지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해서도 안되고 없었던 일을 있었다고 해서도 안되며 동일한 것을 다르다고 해서도 안되고 다른 것을 동일하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8.동양역사의 진짜 주역은 누구인가
7만9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고전서’에서 동이에 관련한 사료만 따로 추려 묶으니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을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이는 동양의 지류가 아닌 본류,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아시아의 조역이 아닌 주역, 변방이 아닌 중심, 동양문화의 아류가 아닌 원류였다.
둘째, 동이가 바로 고조선이다.
셋째,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이 동이족 출신이다.
넷째, 부여의 뿌리가 부유이고 부유는 산동성 부산이 발원지이며, 고구려는 한나라 때 생긴 신생국가가 아니라 하우(夏禹)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내몽골 지역 적봉시(중국 요서지역 홍산문화유적지)가 고구려의 서쪽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날 중국에는 몽골족, 만족, 묘족, 회족, 장족 등 한족(漢族) 이외에 55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이 있지만 이들은 결국 동이족과 한족에서 분파된 지류와 지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동양 역사 발전의 양대 주역인 동이족과 한족, 두 민족 가운데 동방민족의 뿌리는 과연 누구인가.
다시 말해 어느 민족이 동양 역사의 여명을 열었으며 동양 역사를 추동시킨 원동력인가. 바로 동이족이다.
한족의 시조는 염제 신농씨와 황제 헌원씨다. 사마천은 ‘사기’에 황제를 한족의 시조로 기술하였고, 오늘날 한족들은 자신들을 염제의 자손이라 말한다.
그런데 동이족의 시조는 신농과 황제보다 앞선 시기에 중국의 주인으로 군림한 태호 복희씨다. 공자는 ‘주역’ 계사(繫辭)에서 “복희 시대를 지나 신농씨 시대가 도래하고 신농씨 시대가 지나 황제 시대가 전개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당 이후 중국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한족(漢族)이 본래 중국의 중심세력이었던 동이의 역사를 이민족(異民族)의 역사로 왜곡·말살하기 시작했다.
또 동이의 중심세력이었던 한민족(韓民族)이 신라 이후 국력이 크게 약화되고, 조선조에 접어들어 중국의 아류인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함으로써 동이의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린 것이다.
9.출발점 없는 한국사
우리나라는 이집트·바빌로니아·인도·중국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다. 그러나 반만년을 이어온 우리 역사는 지금 뿌리가 없다. 고조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1권은 없이 2권부터 발행된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42권이 뿌리 없는 한국사의 몰골을 단적으로 반영한다고 하겠다.
한 나라에서 역사의 단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그 나라의 얼과 정신과 문화와 정기의 단절을 의미한다.
광복 후 60년이 다 되어가지만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씻는 것은 고사하고 다시 동서로 나뉘고 동서가 다시 보수니 진보니 하는 갈래로 갈려 혼미에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원인은 역사의 단절, 그리고 그로 인한 민족얼의 상실에 있다.
국사교과서는 출발부터 기형이다. 왜냐하면 단군 조선 1000년은 역사가 아닌 신화로 취급하고, 기자조선은 ‘기자동래설’이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삭제해 우리의 실제 역사가 침략자 신분인 연나라 사람(燕人) 위만(衛滿)의 위만조선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뿌리가 잘려나간 이런 역사교육이 국민에게 민족적 긍지와 문화적 자신감을 심어줄 리 없다.
최근 일본 이시하라 도쿄(東京) 도지사가 “한일합방은 조선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는 망언(妄言)을 하고 중국에서는 한국의 고구려사가 자기들의 역사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역사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허점투성이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광복 이후 1960~70년대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대적인 과제였고, 1980~90년대는 민주화가 시대적 요청이었다면, 오늘 당면한 시대적 과제는 단절된 역사의 복원과 민족정체성의 확립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강단사학계는 자료의 결핍을 이유로 고조선사의 연구와 복원에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국내외가 인정하는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 고조선의 실체 및 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가 밝혀진 이상 이런 사료를 토대로 고조선 및 삼국사를 위시한 한국의 고대사를 다시 정립하여 국사교과서를 새로 써야 할 것이다.
동이 9족이 하나로 뭉쳐 대화합과 통일의 시대를 연 위대한 시대 고조선의 역사가 되살아난다면, 아직도 분단의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 민족이 분단의 장벽을 넘어 화합과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돌파구가 될 것이다.
#사서에 나타난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
이 자료는 고구려의 고조선 계승에 대한 종족, 영토, 문화상으로의 역사적 증거들을 중국의 사료를 바탕으로 증명한 자료로써 우리의 시각이 아닌 옛 중국인의 시각을 포함해 그 실재를 풀어갔므로 동북공정의 주체인 중국인들 역시 이에 숙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한자가 많은 관계로 읽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괄호를 만들어 한글로 독음을 달아봤습니다. 중복되는 한자는 독음을 달지 않은것도 있으니 이는 윗부분의 독음을 참고하시면 되겠고, 역사 사료를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는 사료의 출처에만 독음을 달았고, 내용부분은 사료의 독음보다 한자 자체가 글의 내용들을 풀어가는 열쇄가 되는 관계로 자료의 고유성을 살리기 위해 부러 독음을 달지 않았습니다.
참고로 이 자료에서는 '예족'을 언급함에 있어 '예'라는 한자어를 '濊'와 '穢'두가지를 혼용하였는데 이는 두 '예'자 모두 맞게 쓰였음을 알려드립니다.
濊는 본래 '예족'을 가리키는 종족이름으로 쓰인 것이었으며, 穢자는 禾자가 부수로 붙은것을 보아 벼농사문화를 영위하는 민족이었음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나 추론해 봅니다.
일전에 충북 청원에서 1만5000년전의 벼농사의 흔적인 볍씨가 발견되었다는 글을 올린적이 있었는데 이와 맥을 같이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중국 사서에 나타난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 >
심백강 역사학박사 / 민족문화연구원장
1. 머리말
최근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서 우리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며 일찍이 유례가 없는 역사침략을 강행하고 있다. 고대 중국인이 고구려사를 중국사와 다른 한국사라고 史料로써 증명한 것을 현대 중국인이 고구려사는 중국사라고 억지를 부리며 역사침략을 시도하는 의도가 무엇일까?
우리는 저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장황하게 설명하기 앞서 먼저 중국이 왜 오늘 이 시점에서 동북공정을 하게 되었는지 그 원인과 배경부터 규명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원인과 배경이 정확히 규명될 때만이 거기에 대한 정확한 대안의 수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 강단사학계는 한국 고대사연구에서 고조선을 부정해 왔고 고구려사 연구도 대륙에 있던 고구려를 소홀히 한 채 한반도를 중심으로 진행해 왔다. 즉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한국사 침탈을 강행하기 전에 우리자신이 먼저 우리 역사의 단절과 축소를 자행 했던 것이다.
우리 강단사학 일각의 자주성이 결여된 이런 연구결과가 오늘 중국의 동북공정을 초래하는데 직간접의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서둘러 단절된 고조선사를 복원하고 한반도 중심의 삼국사연구를 대륙 중심으로 탈바꿈 하는 역사인식, 역사연구 방법론의 대전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 강단사학은 이런 시대적 요구를 외면한채 여전히 타성에 젖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최근 고구려연구재단에서 출판된 『고조선,단군,부여』라는 저술을 통해서 볼 때 종래 고조선,단군,부여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서 한걸음도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를 올바로 정립하여 중국의 동북공정에 제대로 대응 하라는 국민적 열망을 안고 출범한 단체가 국민의 세금으로 이런 연구결과물을 내놓은데 대하여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솔직히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이등박문은 우리입장에서는 역적이지만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영웅이다. 그래서 그의 동상을 일본 중의원 대청마루에 세워두고 민족의 영웅으로서 기린다. 마찬가지로 동북공정은 우리 입장에서 보면 역사침략이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중국 중심의 역사를 새로 쓰는 작업이다.
이제 우리도 중국 중심의 사대사관, 일본 중심의 식민사관을 버리고 한국 중심의 자주사관의 바탕 위에서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를 새로 써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지금 이 시점에서 동북공정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우리 강단사학,실증사학에 내재된 단절사관이고 축소사관이다.
역사학의 혁명 없이는 동북공정을 뛰어 넘을 묘안은 없다. 新史學(신사학),新史觀(신사학)으로 역사에 새 바람을 일으키는 것만이 역사 지키기와 역사 바로 세우기의 유일한 대안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일시적으로 사료를 왜곡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자기 조상들이 써놓은 수천년 전해 내려온 원사료를 말살할 수는 없을 것이며 원사료가 파괴 되지 않고 존재하는 한 왜곡된 역사는 언제든지 시정이 가능한 것이다.
본 연구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을 민족적,영토적,문화적 각 방면에서 주로 중국의 사서들을 중심으로 고찰함으로써 고구려사가 중국사가 아니고 고조선을 계승한 한국사라는 사실을 체계적으로 밝혀보고자 한다.
2. 종족상에서 본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
일반적으로 民族(민족)과 種族(종족)은 본질상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본래 하나의 종족이 나누어져서 여러개 종족으로 된다. 예컨대 부여족이 백제족과 고구려족으로 분파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또 하나의 민족이 그 안에 무수한 종족을 포함하기도 한다. 오늘날 중국민족 안에 56개 종족이 내포되어 있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우리는 종족이 혈통상의 관련성을 의미한다면 민족은 문화상의 동질성을 가리킨다고 말 할 수 있다. 즉 종족이라고 할 때는 생물상& #8228;체질상의 명사인 것이고 민족이라고 하면 정치상& #8228;문화상의 명사인 것이다. 그러면 고조선족과 고구려족은 종족상에서 상호 어떤 계승성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중국인들은 고조선족을 穢族(예족), 고구려족을 貊族(맥족)으로 인식하였다. 우리는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는가. 『漢書(한서)』王莽傳(왕망전)에 보면 고구려를 다음과 같이 貊人(맥인)으로 호칭하고 있다. “先是莽發高句麗兵 當伐胡 不欲行 郡强迫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遼西 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句麗侯騶 嚴尤秦言 貊人犯法 不從騶起 正有& #23427;心 宜令州郡且尉安之……莽不尉安 穢貊遂反……於是貊人愈犯邊”
그리고 『後漢書(후한서)』東夷列傳(동이열전) 고구려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句麗一名貊耳 有別種依小水爲居 因名小水貊 出好弓 所謂貊弓是也”.
우리는 이런 기록을 통해서 중국인들이 고구려인을 貊族(맥족)으로 이해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陳壽(진수)의 『三國志(삼국지)』東夷傳 濊條(동이전 예조)에서는 箕子朝鮮(기자조선)과 衛滿朝鮮(위만조선)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고조선문제를 고조선조가 아닌 濊條(예조)에서 다루고 있다는 것은 濊(예)를 고조선과 동일시하고 濊族(예족)을 고조선족으로 이해하였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그러면 穢族(예족)과 貊族(맥족)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동일민족인가 다른 민족인가. 예족과 맥족은 기본적으로 東夷(동이)계열에 속하는 동일 민족이다. 예족이든 맥족이든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東夷族(동이족)에서 출발된 민족인 것이다. 그러면 굳이 예와 맥으로 구분하여 부르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司馬遷(사마천) 『史記(사기)』索隱(색은)과 『漢書(한서)』武帝紀(무제기)에 모두 “東夷濊君(동이예군)”이라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濊族(예족)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가지 않고 주로 동방의 원거주지에 그대로 거주하던 夷族(이족)을 가리킨 것으로 파악된다. 『史記』索隱 “姚察以武帝時 東夷濊君降 爲倉海郡”.
『史記』正義 “漢書武帝紀云 元年東夷濊君南閭等降 爲倉海郡”.
그리고 貊族은 같은 東夷族이지만 나중에 동북방으로 이주해가서 살던 동이족으로서 이들을 원래 동방에 거주하던 東夷와 구별하여 貊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본다. 『周禮秋官注』 “夷隸 征東夷所穫”. “貊隸 征東北夷所穫”.
엄격히 말하면 예와 맥은 명칭은 다르지만 뿌리가 같은 동일민족인 것이다. 따라서 史書상에서는 “예”와 “맥”을 분리해서 쓴 경우가 있지만 이 양자를 “濊貊(예맥)”으로 합칭한 경우도 허다하다. 『後漢書』東夷 高句麗傳 “濊貊 連年寇秒……濊貊率服”.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三國志』고구려조에는 東濊(동예), 三韓條(삼한조)에는 韓濊(한예)가 보이고 광개토왕비문과 『北史』신라조에도 韓濊(한예)라는 기록이 있으며 『隋書(수서)』에는 遼濊(요예)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漢書(한서)』의 天文志(천문지)에는 胡貊(호맥), 『後漢書(후한서)』東夷列傳(동이열전)에는 大水貊(대수맥),小水貊(소수맥) 楊雄(양웅)『百官箴(백관잠)』에는 東貊(동맥)& #8228;奚貊(계맥) 『三國史記』에는 梁貊(양맥)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穢(예)는 東方夷(동방이)의 통칭이고 貊(맥)은 東北夷(동북이)의 통칭이며 그것을 다시 세분하면 거주지역에 따라서 그와 같이 구별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중국인들은 西周(서주)이래 자기들과 다른 異民族(이민족)을 호칭할 때 통상 夷(이) 또는 東夷(동이)라고 하였다.
『서경』禹貢(우공)편에 鳥夷(도이),& #23886;夷(우이),萊夷(내이),淮夷(회이) 등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夷族(이족)들은 西周(서주) 이전부터 토착민으로서 중국에 터전을 이루고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夷族들은 중국의 토착민족으로서 중국의 동방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중국의 전 지역에 걸쳐서 널리 분포되어 살았으며 여기서 四夷라는 명칭이 생겨나게 되었다.
고조선은 동이 계열에 속하는 여러 부족 들이 모여서 최초로 세운 나라이다. 따라서 고조선민족은 중국의 동방, 동남방, 동북방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활동하던 동이계열의 부족들이 다양하게 포함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때 고조선 국가 구성의 기본성분은 濊族(예족)이고 주요성분은 맥족이었다고 본다. 東北夷(동죽이)인 貊族(맥족)은 결국 東夷인 濊族(예족)에서 분파된 것이라고 할 때 貊族은 혈통상에서 濊族을 계승한 것이 자명하다. 또 고구려는 고조선 멸망이후 고조선의 옛 터전에서 그 유민인 穢族과 貊族을 중심으로 건국했으므로 고구려는 민족상에서 고조선을 계승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 할 것이다.
3. 영토상에서 본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
고조선과 고구려가 영토상에서 어떤 계승성이 있는지 밝히기 위해서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가 과연 오늘의 어느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우선 그것부터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山海經(산해경)』18권 海內經(해내경)에서는 고조선의 위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 名曰朝鮮”. 여기서 北海(북해)는 渤海(발해)를 가리킨다. 『산해경』해내경에서 고조선국의 위치로 설명된 “발해의 모통이”를 오늘 그 해당하는 지점을 찾아본다면 중국의 산동성,하북성& #8228;요녕성 그리고 한반도 일대가 여기에 해당하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동해의 안쪽이라”고 말한 만큼 절강성,강소성까지를 포함하는 보다 광범한 지역으로 비정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해의 안쪽 발해의 모통이에 고조선국이 있다”는 『山海經』海內經의 표현은 너무 추상적인 감이 없지 않다.
『산해경』12권 海內北經(해내북경)을 보면 거기에는 고조선의 위치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조선은 列陽(열양)의 동쪽에 있다 바다의 북쪽이고 산의 남쪽이다. 列陽(열양)은 연나라에 속해 있다”는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산해경』해내북경에 말한 고조선의 위치는 오늘의 河北省 秦皇島市 盧龍縣(하북성 진황도시 농용현) 일대라고 필자는 추정한다.
필자가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두가지다. 첫째, “고조선이 列陽(열양)의 동쪽에 있는데 列陽은 燕(연)에 속해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宋代 四大史書(송대 사대사서) 중의 하나인 『太平& #23536;宇記(태평환우기)』의 河北道 平州 盧龍縣條(하북도 평주 노용현조)에 따르면 宋代(송대)의 平州(평주)가 禹貢 九州(우공 구주)에서는 冀州(기주), 周(주)나라 때는 幽州(유주)지역이고 春秋(춘추)시대에는 山戎孤竹(산융고죽),白狄肥子國(백적비자국)이며 전국 시대는 燕(연)에 소속되었다가 秦始皇(진시황)이 천하를 兼倂(겸병:통일)한 뒤 右北平(우북평) 및 遼西 2郡(요서 2군) 지역으로 되고 漢(한)나라 때는 遼西郡(요서군)의 肥如縣(비여현)으로 唐(당)나라 때 다시 平州(평주)로 변경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
『太平& #23536;宇記(태평환우기)』에 의하면 唐宋(당송)시대의 平州가 秦漢(진한)시대엔 右北平(우북평),遼西(요서)였고 전국시대에는 燕(연)나라에 소속된 지역이었음을 의미한다. 즉 바꾸어 말하면 列陽(열양)은 전국시대 때 燕에 속해 있다가 秦漢(진한)시대에 右北平 遼西(우북평 요서)로 바귀고 唐宋시대엔 平州로 되었던 것인데 그 平州가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일대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산해경』에 말한 “燕(연)에 소속된 列陽(열양)의 동쪽에 있다”는 고조선이 바로 오늘의 하북성 동쪽 秦皇島市(진황도시) 일대에 위치해 있었다고 추단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고조선이 海北山南(해북산남)에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바다가 발해를 가리킨다는 것은 긴말을 요치 않는다. 다만 여기 말하는 山이 과연 어떤 산을 가리킨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발해를 중심으로 볼 때 산동성의 태산, 하북성의 갈석산, 요서의 의무려산, 요동의 개마대산 등 여러 명산 들이 발해부근에 포진 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여러 명산 들 중에서 고조선이 위치해 있었던 海北山南의 산은 과연 어떤 산일까. 필자는 그 산이 바로 碣石山(갈우산)이라고 비정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太平& #23536;宇記(태평환우기)』 河北道 盧龍縣條(하북도 노용현조)를 보면 “여기에 갈석산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갈석산은 盧龍縣(노용현) 남쪽 23리에 있는데 발해 곁에 竭然(갈연)히 우뚝 서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름을 갈석산이라 한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산해경』에 말하는 “海北山南”은 海北은 발해북쪽, 산남은 갈석산 남쪽을 의미하며 고조선은 발해 북쪽 갈석산 남쪽 즉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에 위치해 있었다고 보기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하겠다.
그리고 오늘의 河北省 秦皇島市 盧龍縣(하북도 평주 노용현조) 일대가 바로 고조선 지역임을 추단케 하는 보다 결정적인 근거는 『太平& #23536;宇記(태평환우기)』盧龍縣條(노용현조)의 다음 기록에서 찾아진다. “朝鮮城 卽箕子受封之地 今有廢城(조선성 즉기자수봉지지 금유폐성)” 箕子(기자)가 다스리던 고조선의 옛성이 宋(송)나라 당시까지도 그 유적이 그대로 남아 보존되어 있었다는 이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산해경』해내북경에 말하는 고조선의 위치가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일대라는 확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箕子(기자)가 다스린 朝鮮城(조선성)이 盧龍縣(노용현)에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즉 발해와 갈석산을 중심으로 한 그 일대는 고조선의 수도가 위치해 있던 지역이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발해의 북쪽, 갈석산의 남쪽 연나라 열양의 동쪽 지역 즉 오늘의 하북성 요녕성 한반도의 광범한 지역에 걸쳐서 고조선의 영토가 위치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기자조선시대 발해,갈석산을 중심으로 하북성 요녕성 등 중국 동북지방의 광대한 지역에 걸쳐 위치해 있었던 고조선은 후일 서방 2천여리의 땅을 연나라 장군 秦開(진개)에 의해 탈취 당함으로써 그 영역이 滿潘汗(만번한)을 국경선으로 대폭 축소되게 된다. 고조선 영역의 중심지가 발해 갈석산에서 요동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위략』의 저자 魚& #35938;(어환)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王 欲興兵逆擊燕 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不攻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潘汗爲界 朝鮮遂弱”.
그러면 고조선이 서쪽으로 2천여리의 땅을 연나라에게 빼앗기고 국경선이 滿潘汗(만번한)으로 축소되게 된 시기가 구체적으로 언제쯤일까. 고조선을 침략한 연나라 장수 秦開(진개)는 燕昭王(연소왕 : 기원전 311-279)때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원전 4세기 말 ~3세기 초에 고조선 영역의 대폭적인 축소가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서쪽 영토가 축소된 이후의 국경선으로 된 滿潘汗(만번한)을 압록강으로 보느냐 아니면 요하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오늘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滿潘汗 서쪽 즉 요동에서 북경 永平府(영평부)까지 2천여리 땅이 본래는 고조선 땅이였다는 사실은 丁茶山(정다산)도 『我邦疆域考(아방강역고)』에서 다음과 같이 인정하였다.
“鏞按 今之永平府 古之北平郡也 且据魏略 潘汗以西二千餘里 在古爲箕氏之有 今自遼東而西行二千餘里 正得永平府境 一統志所言 眞有據也”.
고조선 영역이 기원전 3세기 이전까지는 오늘의 요녕성 및 하북성 동부를 포괄하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였으나 기원전 3세기 초 서방 2천여리 땅을 연나라에게 빼앗기고 오늘의 요하 이동으로 영역이 축소 되면서 고조선은 국력이 크게 약화되게 되었는데 그 후 연나라 사람이 衛滿(위만)이 고조선에 망명해 왔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위만조선이다.
그러면 위만조선은 오늘의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가 위만조선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 소재를 밝히기 위해서는 『사기』조선열전에 보이는 다음 기사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衛滿& #39755;結蠻夷服 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稍役屬眞番朝鮮蠻夷 及故燕齊亡命者王之 都王險”.
사마천은 『사기』조선열전에서 위만이 동쪽으로 조선에 올 때 浿水를 건너 왔다고 썼다. 위만이 건너 온 이 패수가 어디 있었는지 그 소재가 파악되면 당시 고조선의 위치가 드러나게 된다. 이 패수에 대하여 여러 가지 異說이 있는데 대체로 1) 요동에 있었다. 2) 낙랑군에 있었다. 3) 한반도의 대동강이다. 4) 압록강이라는 네가지 설로 요약된다.
『사기』에 위만이 패수를 건너와서 “秦故空地上下障(진고공지상하장)”에 거주했다고 했는데 진시황이 한반도의 압록강이나 대동강에 上下障(상하장)을 설치한 일은 없다. 그리고 『사기』조선열전 索隱(색은)에 應& #21165;(응소)가 “遼東有險瀆縣 朝鮮王舊都(요동유험독횬 조선왕구도)”라고 말한 것으로 볼 때 필자는 요동 패수설이 비교적 설득력이 있으며 따라서 위만조선은 요동에 있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위만조선은 결국 그 손자대에 이르러 망하고 만다. 漢武帝(한무제)는 元封(원봉) 2년에 천하의 사형수들을 끌어모아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그 이듬해 여름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樂浪(낙랑),臨屯(임둔),玄& #33759;(현토),眞番(진번)으로 쪼개어 漢4군으로 삼았다.4)
『漢書』권6 武帝紀 “元封 2年 朝鮮王攻殺遼東都尉 & #36858;募天下死罪擊朝鮮……遣樓船將軍楊僕 左將軍荀& #24408; 將應募罪人擊朝鮮 三年……夏 朝鮮斬其王右渠降 以其地爲樂浪臨屯玄& #33759;眞番”.
漢武帝(한무제)가 고조선의 영토를 무력으로 침략한 뒤 그것을 넷으로 분할하여 漢四郡(한사군)을 세웠지만 몇백년도 아니고 수천년을 두고 내려 온 고조선민족이 하루아침에 없어질리 만무했다. 일부 한족에 흡수 동화되기도 하는 것이 불가피한 현상 이었겠지만 대부분의 고조선 민족은 엄연히 그대로 잔존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穢貊(예맥)을 비롯한 고조선 유민들은 곧바로 여러 나라를 세워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후한시대에 접어들자 끊임없이 상호 연대를 통해 漢族과 싸우며 고토회복운동을 전개해 나갔는데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존재가 바로 고구려였다는 사실이 다음의 사료에서 입증되고 있다.
『後漢書(후한서)』권 5 安帝紀 “安帝元初 五年……夏六月 高句麗與穢貊寇玄& #33759;”, “建光元年 春正月 幽州刺使馮煥 率郡太守 討高句麗穢貊不克……夏四月 穢貊復與鮮卑寇遼東 遼東太守蔡諷追擊 戰歿 冬十二月 高句麗馬韓穢貊圍玄& #33759;”.
따라서 고구려를 중심으로 단합한 고조선 유민들은 후한시대를 지나 위진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잃어버린 고조선영토를 거의 회복하다시피 하였다. 『周書(주서)』에 보이는 다음의 기록이 그것을 잘 뒷받침 한다고 하겠다.
『周書』49권 異域列傳 高麗 “高句麗者……治平壤城……其外有國內城及漢城 亦別都也 復有遼東玄& #33759;等數十城”.고구려는 당시에 玄& #33759;(현토)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梁書』권 54 諸夷列傳 “高句麗者……其國 漢之玄& #33759;郡也 在遼東之東”.
. 漢의 四郡중 玄& #33759;郡(현토군)을 발판으로 삼은 고구려는 遼東(요동)지방에 있는 수십성을 차지하고 또 오늘의 한반도의 漢城(한성)과 平壤城(평양성)까지를 확보함으로써 고조선시대의 영토를 거의 계승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는 隋煬帝(수양제)시대에 이르러서는 요동과 아울러서 발해,갈석산 일대까지도 그 영향권아래 둠으로서 고조선 전성기시대의 영토를 거의 다 차지했다는 사실을 다음의 기록은 역력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隋書(수서)』4권 煬帝紀 “八年春正月……下午下詔曰……高句麗小醜 昏迷不恭 崇聚渤碣之間 薦食遼穢之境”.
周(주)시대의 朝鮮 땅이 漢의 玄& #33759;(현토),樂浪(낙랑)이고 隋(수)의 고구려라는 다음의 두 기록은 고조선과 고구려가 시대의 차이를 두고 동일한 지역에 세워진 국가라는 즉 고조선 영토에서 고구려 영토로 계승된 영토상의 계승성을 요약해서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宋史(송사)』487권 外國傳 “高麗本曰高句麗 禹別九州 屬冀州之地 周爲箕子之國 漢之玄& #33759;郡也 在遼東”.
『欽定盛京通志(흠정성경통지)』권 23 歷代建置沿革表 “蓋平,復州,寧海,岫巖,鳳凰城 則周之朝鮮 漢之玄& #33759;樂浪 隋之高句麗”.
4. 문화상에서 본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
고조선과 고구려의 문화상 동질성 내지는 계승성에 대하여 여러 경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三國志』濊傳(예전)에서 “其耆老 自謂與句麗同種……言語法俗 大抵與句麗同”이라 한 것을 볼 때 고구려는 고조선과 동일한 민족으로서 언어와 풍속이 기본적으로 서로 같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고구려의 문화가 고조선의 문화와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같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고조선은 犯禁(범금)8조를 통해서 볼 때 형법을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백성들이 대문을 걸지 않고 생활하는 안정된 사회를 이룩했다.
『漢書』地理志 “樂浪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다음의 기록에서 보면 고구려도 역시 국법을 매우 엄정하게 집행함으로서 도둑이 없는 사회를 이룩했음을 알 수 있다.
『隋書(수서)』東夷列傳 高麗條 “反逆者縛之於柱& #29191;而斬之 籍沒其家 盜則償十倍 用刑旣峻 罕有犯者” 『舊唐書(구당서)』東夷列傳 高麗條“大體用法嚴峻 少有犯者 乃至路不拾遺”.
그리고 고조선에서는 남녀가 혼인하는데 있어 재물을 따지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漢書』地理志 “嫁娶無所讐”.
그런데 고구려에서도 혼인은 남녀의 서로 사랑 하는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혼인에 재물이 오가는 경우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혼인문화가 있었다.
『周書』異域列傳 高麗條 “嫁娶之禮 略無財弊 若受財者 謂之賣婢 俗甚恥之”.
그리고 『三國志』東夷傳 濊條(예조)에 따르면 濊族(예족)들은 항상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밤낮으로 음주 가무하면서 즐겼는데 이를 舞天(무천)이라 했다고 한다. “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謂舞天”.
그런데 고구려에도 역시 이와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국중대회를 개최하는데 이름을 東盟(동맹)이라 한다”는 기록이 그것을 잘 설명한다.
『三國志』東夷傳 高句麗條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
고조선과 고구려는 이러한 일련의 사료들을 통해서 검토해 볼 때 이것이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혼인문화,제례문화,놀이문화 등 문화 전반에 걸쳐서 동질성과 계승성이 농후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다.
5. 맺는말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통상 세가지 난제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 200년~300년 전도 아니고 4000년~5000년을 흘러온 과거 역사를 연구하자면 그것을 뒷받침할 史料의 확보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 손으로 기록한 고대사료가 많지 않고 주로 중국인의 손에 의해 기술된 사료에 의존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事大主義(사대주의)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 근대 일제식민통치 35년을 거치면서 이때 식민통치를 학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일제가 만들어 놓은 植民史觀(식민사관)의 잔재가 아직도 불식되지 않고 남아 있어 그 장벽을 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지금 농경사회,산업사회를 지나 정보화 사회에 살고 있다. 정보화 사회란 문화자본 지식기반 사회를 의미한다. 세계가 바야흐로 문화중심 역사전쟁시대로 접어든 지금 고대사 연구의 3대 난관을 극복하고 우리 역사의 眞相(진상)을 復元(복원)하는 것이야말로 국민적 국가적 시대적 당면과제가 아닐 수 없다.
위에서 우리는 민족상으로나 영토상으로나 문화상으로나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가 명백하다는 사실을 중국의 여러 사료들을 통해서 확인하였다. 이 소 논문이 동북공정의 허상을 타파하고 우리역사의 진상을 복원하는데 조그마한 보탬이라도 되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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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고구려 유민들은 어디로 갔을까?
서기 668년, 동아시아의 패자였던 고구려는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그리고 당은 고구려의 재건을 막기 위해 지배층을 중심으로 고구려인 이십여 만 명을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서 소개해 쥐나 본토로 끌고 갔다.
《구당서》 <고종본기>에 따르면 이들은 동쪽으로는 만주 서쪽의 영주(지금의 조양시)에서 서쪽으로는 양주(지금의 감숙성 무위)까지
쥐나 대륙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한국사의 시공간 속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동북공정과 역사전쟁. 고구려 역사의 주인은?
쥐나는 국가 통합성을 가장 위협하고 있는 현안으로 쥐나 내 소수민족의 독립 운동 움직임을 꼽고 있다.
티베트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쥐나는 티베트를 무력 병합하며 역사적으로 티베트의 종주권이 쥐나에 있음을,
티베트가 쥐나의 지방 소수민족 정권이었음을 강력하게 주장해왔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를 쥐나의 지방 소수민족 정권으로 돌변시키는 소위 동북공정은 쥐나의 국가 통합성 유지와(조선족 문제)
장기적으로 한반도 유사시 한국에 대한 자신들의 종주권 주장의 역사적 정당성을 위한 포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고구려를 한국사의 강역 안에서 제대로 지키고 제대로 복원하고 있는가?
실크로드의 지배자 고선지, 치청왕국의 제왕 이정기
고구려 멸망 후 한 세대가 지난 후 당으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의 후손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왕모중, 고선지, 왕사례, 이정기, 후희일……. 파미르 원정과 동서문명 교류의 최대 사건인 탈라스 전투 등으로 세계사 속에서 주목받는 고선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낯선 인물들이다.
당의 최전성기를 열었던 당 현종의 시대를 가능케 한 책사 왕모중, 안녹산의 난으로 궁지에 몰린 현종을 구원하는 왕사례와 후희일,
후희일의 사촌형제로 중원의 고구려라고 할 수 있는 치청왕국을 건설한 이정기. 이들은 모두 당으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의 2세대이다.
여기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왕씨는 고구려의 귀족가문입니다. 한,수,당 이전부터 존재하던 고구려에서 말입니다.
처음 시작은 단일민족으로 시작했을지 모르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민족이 여러 계통으로 나누어졌죠.
그래서 지금으로서가 아닌 오래전부터 우린 다민족국가라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과 형제들이 처음에는 하나였지만 시간이 흘러 먼 친척이 되고 그 후에는 남남이 되어 다시 서로 만나 부둥켜 살아가는 세상처럼 말입니다.
수많은 배달쥬신족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여러 분파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기원은 배달쥬신족이라는 것에서 시작되지만
그 세부의 역사에 있어서는 그 분파된 민족의 고유한 역사인 것입니다.
역사는 그 민족의 것이지, 시대적인 영토변화에 따라 역사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의 흥망의 역사에 따라 그 영토의 변화가 있을 뿐이지요...
몽골의 역사는 몽골 그 자신들의 것이고, 훈제국의 역사는 헝가리의 것, 오스만투르크(서돌궐)의 역사는 터키의 것,
부여 고구려 백제 등의 역사는 대한민국인 것처럼 우리 형제들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억지를 부리는 짱골라들이 문제입니다. 치우천황이나 태호복희씨 등 남의 조상도 자기 조상이라 하고
짱골라의 한,송,명의 왕조를 제외한. 수많은 배달쥬신왕조들이 이룬 발견,발명,업적 등을 자기 것이라고 어거지를 부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짱골라의 억지에 대해 우리는 보다 정확히 민족을 분류하고 그것에 따라 역사를 논리적으로 반박하려고 할 뿐이죠.
만약 누가 우리 자신이 역사나 민족을 너무 확대시킨다고 성질을 낼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것은 사대주의 매국노나 짱골라나 쪽바리 등의 의견에 동조하는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배달쥬신족이 시간이 지나 이렇게 여러 가지로 나누어졌다는 사실만 언급하려 하고 끝내려 하죠.
그러나 짱골라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니, 그것에 대해 배달쥬신족이 나누어졌다고 말하는 것 이상의 사실을 지적하며 그들의 무지를 일깨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문제를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원인을 제거해야 되는데, 그 문제의 원인과 원인제공자인 짱골라나 쪽바리에게는
아무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서, 그에 대해 지적하는 우리자신 스스로를 타박한다면 말이 안 되죠.
그런 어리석은 짓은 공정하지도 못 할뿐더러 스스로를 자학하는 꼴이죠.
왜족들이 우리와 한 핏줄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왜열도는 백제계가 지배하면서 가야,신라,고구려 유민들로 이루어진 국가죠.
시초는 한반도의 신라가 먼저 큰 잘못을 합니다. 백제 성왕을 배신하고 나제동맹을 깨뜨렸을 뿐만 아니라 성왕의 시신을 훼손하고 그 머리를
신라 대로에 묻어 백성들이 발로 밟고 지나가도록 하는 만행을 저질렀죠.
백제 멸망 후로 끊임없이 왜구들이 반도내의 한민족을 못 살게 괴롭혀 과거에 대한 복수를 어느정도 이루지만....
왜놈들이 20세기 초에 아시아로 힘을 뻗어 나갈 때 같은 한민족들을 아우르고 만주,몽골,쥐나북부 등을 점령했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왜놈들은 같은 한민족들에게 마루타나 종군위안부 등 수많은 만행을 저질러 스스로 정당성을 말아먹는 결과를 만들고 맙니다.
가장 먼저 되살려야 하는 것은 정신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역사가 중요하죠. 그때문에 짱골라는 역사를 조작,삭제,날조하는 것이고요.
역사나 정신부터 시작하여 우리는 통일 나아가서는 우리의 고토회복을 이루어야 합니다.
힘 없는 정의는 무능력입니다. 정의 없는 힘은 폭력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강해지려고 노력할 때(다양한 분야에서) 우리에게 기회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포기하지 않는 한 반드시 기회는 옵니다.
준비하지 않다가 기회를 놓치는 우는 피해야 합니다.
참고1
노비의 신분에서 적국의 재상이 된 왕모중(王毛仲)
노예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이 당나라 병권을 장악, 황제에 대항해 쿠데타를 기도했었다는 전설과 같은 삶은 살은 우리의 선조 왕모중은 고구려가 패망 후 당나라로 끌려 가 노비로 살았던 고구려 장수 왕구루(王求婁)의 아들로 전해진고 있다. 왕모중(王毛仲)은 당시 임치왕(臨淄王)으로 봉해져 있던 이융기의 호위를 하던 노예였으나 발군의 능력으로 이융기의 정권 탈취를 도와 그를 황제로 옹립 한 뒤, 그 공로로 ‘3공(三公)’의 지위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 이다. 이융기는 당나라 현종(玄宗)의 본명이다.
왕모중은 뛰어나 군사 지휘력과 철저하고 당시로는 획기적인 재정관리을 통하여, 현종 통치하의 태평성대를 일컫는 ‘개원지치(開元之治)’의 기반을 다지는 정책의 중앙에 있었으며 이러한 뛰어난 느력으로 황제의 신임을 얻어 당나라의 병권(兵權)을 장악한 그는 훗날 스스로 황제에 오르기 위한 반란이였는지 위협 받고 있는 정권를 영구히 안정되게 장악하려는 반란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황제를 상대로 반란을 기도 했았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은 고구려 유민이었다.
왕모중의 반란은 고구려인에 의한 당 황실 전복 쿠데타로써 이것이 유일한 기록으로 주목 할 가치가 있다고 한다. 후에 제나라를 세우고 765~819년까지 산동지역을 다스린 이정기와 이납 부자가 당나라 전복을 꾀한 바 있지만, 이것은 반란이 라고 하기 보다 국가 대 국가의 전쟁으로 보는 것이 타당 하다는 의견이 학자들의 지배적인 의견이기 때문이다.
왕모중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그런 인물이 당나라 실세로 존재했었다”는 사실만 알려져 왔을 뿐으로, 패망한 나라의 유민으로써 노비로 끌려와 재상의 지위까지 올랐으나 그 출신과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어 몇가지 자료를 통하여 알아 보려 한다.
668년 고구려를 무너뜨린 당은 산동성 일대와 동북지방에 두어 화근이 될 만 한 부류(왕족이나 지배계층의 유민들~,)를 포함하여 약20여 만명을 잡아가 노예로 삼았다고 한다. 이때 장수였던 왕모중의 부친 왕구루도 끌려가 관노가 됐다. 왕모중이 태어난 시기는 고구려가 패망한 지 10여년 뒤인 681~683년. 노비의 신분을 이어받은 왕모중은 나이가 비슷한 ‘임치왕’ 이융기(685년생)의 수행 노예가 되었다고 한다.
이융기는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사냥을 즐겼던 그는 용맹한 사람을 만나면 돈과 음식을 하사해 자신의 사람으로 삼았다고 한다. 총명하고 성실하며 건장한 용모를 가진 왕모중은 고구려인답게 기마와 궁술까지 능숙하여 이융기의 눈에 뛰게 되며, 절대적 신임을 얻어 후에 황제에 오르는 거사의 핵심인물로 성장 하게 된다.
이융기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710년이었다. 황제 중종이 황후 위씨(韋后)와 딸 안락(安樂)공주에 의해 독살된 것이다. 중종의 조카였던 이융기는 “위후 일파를 제거해 나라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거사를 일으켰다. 왕모중은 이 과정에서 황궁 수비대를 사전 장악, 거사의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이융기 군사는 왕모중의 활약에 힘입어 황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위후와 안락공주를 살해, 중종 시해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거사를 이뤄낸 임치왕 이융기는 ‘평왕(平王)’으로 왕호를 높여받은 뒤, 문무 주요 관직에 자신의 측근들을 심었다. 위후를 살해한 종소경(鐘紹京)은 ‘중서령’으로, 위후 제거 후 조칙을 쓴 유유구(劉幽求)는 ‘중서사인’으로 임명해 정사를 관장하게 했다. 또 거사에서 무공을 세운 설숭간(薛崇簡), 마사종(麻嗣宗), 갈복순(葛福順) 등과 임치왕 경호를 맡았던 이의덕(李宜德) 등을 장군으로 임명했다. 왕모중도 이때 노비의 신분을 벗어나 장군으로 파격적으로 신분변신을 하게 된다. 실로 놀라운 인생 역전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이융기를 가장 가까이서 보필한 사람 중에 한족이 아닌 고구려인 있었다는 사실을 미뤄 보면 당시 중국사회에서 고구려인 들이 다양한 활약을 벌이고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당나라를 장악한 이융기의 남은 과제는 황제가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주변의 눈’을 의식한 이융기는 명분을 쌓기 위해 중종의 동생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예종’을 황제로 옹립한다
실권을 쥔 이융기는 예종의 장남이자 자신의 맏형 이성기를 제치고 태자가 됐다. 그가 착수한 작업은 반란의 주축이었던 좌우영(左右營)을 격상 시키는 일이었다. 이융기는 좌우영의 이름을 ‘용무군(龍武軍)’으로 바꾼 뒤 최고의 대접을 해줬다.
당서(唐書) ‘왕모중전(王毛仲傳)’은 용무군에 관해 흥미로운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당시 양가 자제들은 군역과 요역을 회피했다. 하지만 용무군만은 예외였다. 앞다퉈 들어가려 뇌물을 바칠 정도였기 때문에 (1000명이었던) 부대 규모가 수천명으로 늘었다. 용무군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는 것이다. 반란이 일어나고 예종이 즉위한 ‘격변의 해’ 710년 하반기, 왕모중은 3품의 품계를 받고 대장군의 지위에 오른다. 그리고 야심가 이융기는 712년 자신의 뜻을 달성, 천자의 자리에 등극한다. 그가 훗날 ‘개원의 치’를 이룬 황제 현종이다.
노예 출신의 ‘대장군’ 왕모중은 713년 다시 한 번 부각된다. 7명의 재상 중 5명을 장악, 권력을 휘두르던 예종의 누이 태평공주가 ‘현종 폐위 음모’를 꾸민 것이다. “태평공주 측에서 병사를 동원, 7월 4일 침입해 올 것”이란 극비정보를 입수한 현종은 역공을 취했다. 거사일 하루 앞둔 7월 3일, 왕모중과 그의 병사 300명을 동원해 공주 일행을 주살해 버린 것이다. 현종의 분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재상 숙지충을 비롯한 태평공주 측근 전원을 죽이고, 자신과 고종사촌인 공주의 아들들까지 모조리 주살한 뒤, 이미 세상을 뜬 공주 망부(亡夫)의 시체를 꺼내 부관참시했다.
사태를 신속하게 처리한 사람은 왕모중 이었다. 그 공로로 그는 7일 뒤인 713년 7월 10일, 보국대장군·좌무위대장군·검교내외한구 겸 지감목사로 임명되면서 국공(國公)의 작위와 함께 장안의 저택과 식읍 500호를 받았다. 황족을 제외하면 진압에 공을 세운 인물 중 최고의 포상이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당시 군사력의 핵심이었던 말(馬)을 관리하는 직책인 검교내외한구 라며 이것은 현종 이융기가 임치왕에서 평왕으로 봉해질 때 함께 받았던 관직이자, 훗날(754년) 현종의 양아들로 총애받았던 안록산이 받기도 했던 요직이라고 한다. 황실과 군사 양쪽에 말을 공급 하는 핵심임무를 독점함으로써 왕모중이 물자 수송과 병력관리의 맥을 쥘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왕모중은 일신의 관리를 철저히 하여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황제로부터 호화저택을 하사 받았음에도 ‘병마양성’을 위해 변방의 처소에서 사병과 함께 생활했으며, 사심 없이 공정하게 일을 처리했다고 하며. 게다가 경영능력도 또한 뛰어나 현종의 신임이 한층 두터워 졌다. 목동 1000여명을 모집해 그들에게 방목을 맡기는 새로운 관리방법으로 24만마리이던 병마의 수를 43만마리로, 3만5000두였던 소를 5만두로, 1만2000마리였던 양을 28만6000마리로 늘렸으며. 그는 죽은 짐승도 버리지 않고. 가죽을 팔아 비단 8만필을 구입했고, 동맥· 목숙 등의 사료를 준비해 겨울을 대비했다.
사욕을 부리며 재물을 축적하던 다른 관리들과 달리 왕모중은 이익을 재투자, 매년 수만석의 잉여 물자를 확보해 황제에게 추가로 바쳤다. 현종은 왕모중을 전적으로 신뢰 했다. “(노비 출신인 그를) 연회석에서 황제의 형제·자식들과 나란히 앉게 해 ‘왕’에 준하는 대우를 해 줬다”는 당시의 기록은 그에 대한 현종의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당서(唐書) 기록에 따르면 “현종은 연회 때 왕모중이 보이지 않으면 근심하는 표정을 지었으며, 그와 밤새워 대화를 나누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밤을 새고 난 뒤에도 그 다음날이 저물도록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전쟁에선 기병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말은 최고의 군사자원 이었다. 왕모중은 빠르고 멀리 달릴 수 있는 병마를 단시일 내에 확보하고 재정적 확충을 이룸으로써 당이 ‘세계국가’로 뻗어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현종의 정치적 안정을 일컬었던 ‘개원의 치’는 왕모중이 닦아 놓은 재정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황제의 총애는 멈추지 않았다. 현종은 왕모중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감목송(監牧頌)’을 지어 부르게 했으며, ‘이씨’라는 여인을 부인으로 하사했고, 그녀에게 ‘국부인(國夫人)’의 칭호를 내렸다. 또 왕모중의 어린 아들에게는 5품 벼슬을 제수하고 황태자와 함께 놀 수 있는 특권을 내렸다. 왕모중은 상승을 거듭, 721년 당나라 북부의 병력을 총괄하는 ‘지절충삭방도방어토격대사(持節充朔方道防禦討擊大使)’로 임명돼 중국 북부의 군권을 장악했고, 4년 뒤인 725년엔 1품 고관인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임명돼 ‘3공(三公)’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파격적인 황제의 총애는 환관들의 질시를 불러왔다.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물욕·권력욕이 유달리 강했던 환관들과 강직한 성품의 왕모중은 애초에 맞는 궁합이 아니었다. 왕모중은 드러내놓고 환관들에게 모욕을 주곤 했다. 그러자 환관들은 은밀하게 왕모중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여기서 주축이 된 사람이 훗날 현종에게 양귀비를 소개하는 환관 고력사(高力士)다.
환관들의 ‘작업’은 은밀하고 집요하게 진행됐다. 틈을 노리던 그들에게 기회가 왔다. 729년 6월, 황제 호위를 담당하는 ‘용무군’ 대장 갈복순의 아들과 왕모중의 딸이 결혼을 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도가들은 혼인을 통해 세력 결속을 꾀한다. 권력자의 입장에선 이것이 달가운 일만은 아니다. 현종의 경우엔 특히 그랬다. 당나라의 병권이 ‘한 집안’으로 집중됐기 때문이었다.
“장군들이 왕모중을 따르는 상황에서, 그가 황실 경비대장 갈복순과 인척관계를 맺은 것은 좋지 못한 일입니다. 게다가 왕모중은 소인배인지라 총애가 지나치시면 나쁜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현종은 탁월한 전략가였다. “짐은 그대들의 충정을 알겠노라.” 산전수전 다 겪은 그는 한눈에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지 않아도 비이상적으로 비대해진 왕모중의 권력이 거슬리던 판이었다. 현종은 “간언 내용을 극비에 부칠 것”을 명했다. 만에 하나 왕모중 제거 의사가 새나갈 경우 역공을 당할 우려도 있었기 때문이다. 태평공주를 제거할 때, 왕모중과 함께 역공을 폈던 현종이다. 그는 은밀하게 작전을 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갈등이 표출된 것은 730년이었다. 왕모중이 황제에게 ‘병부상서’ 자리를 달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한 것이다. 병부상서는 당의 군사력 전체를 총괄하는 요직이었다. 왕모중을 제거하려 마음먹은 황제가 그 요구를 들어줄 리가 없었다. 현종은 드러내놓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왕모중도 아예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왕모중의 행위는 당 지배질서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었다. 이의덕(李宜德), 당지문(唐地文), 왕경요(王景燿), 고광제(高廣濟) 등 당대의 무장 수십 명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독자적 군사력을 키워온 왕모중 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황제에 대한 도전은 황실을 전복시키겠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었다. 게다가 왕모중에게는 힘이 있었다. 그가 더 이상 황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현종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왕모중은 자신의 군사력을 중심으로 현종에게 대항할 뜻을 굳혔다. 그는 더 많은 장군들을 포섭, 세력기반을 확고하게 다져갔다. 현종도 자위 수단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왕모중과 대립관계에 있는 환관들을 동원해 정보수집에 착수, 왕모중의 비리를 철저하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종의 권한이 강화될수록 환관들의 권한도 그에 비례해 커지는 묘한 현상이 나타났다.
왕모중은 흥분했다. 그는 현종의 조서를 갖고 온 환관들에게 노골적으로 모욕을 줬다. 조서를 받드는 환관에겐 황제에 버금가는 예를 갖추는 것이 당시 신하의 본분이었다. 왕모중은 더 이상 현종의 신하가 아니었다.
먼저 칼을 뽑은 것은 황제였다. 왕모중이 극비리에 병기를 수집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황제는 측근 엄정지(嚴挺之)를 등주자사·태원소윤에 임명, 왕모중의 군사기반인 북방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했다. 왕모중도 당시 최대의 군수기지였던 태원·삭방·유주 등지에서 군량과 병마·무기를 사들이며 황실 전복의 계획을 진행시켰다.
때는 731년 정월. 현종은 왕모중을 따르는 장군들과 왕모중의 아들들을 강등시켜 변방 한직으로 내모는 신년인사를 전격 단행했다. 그리고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왕모중 세력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양대 세력은 충돌했다. 하지만 ‘두 세력이 어디서 어떻게 부딪쳤는가’에 관한 사실을 기록한 문헌은 전해지지 않는다. 단지 “왕모중이 패하여 죽자, 황제는 엄정지의 충성을 평가해 그를 형부시랑으로 불러들이고, 이후 고위직인 ‘태부경(太府卿)’에 임명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왕모중의 사망에 대해 구당서(舊唐書)는 ‘현종이 왕모중을 죽이도록 조서를 내려, 영릉(零陵)에서 목매달아 죽였다’고 적고 있다”며 “이 두 가지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전투에서 패한 왕모중이 (장안에서 직선거리로 800㎞ 떨어진) 호남성 서남쪽 영주(永州)로 귀양을 가, 그곳에서 죽음을 당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훗날 현종이 애첩 양귀비를 죽일 때도 목을 매달아 죽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조정에서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을 처형할 땐 목을 매는 것이 하나의 관습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멸망한 나라의 유민으로, 또 노비의 신분으로 일국의 재상의 자리 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인 왕모중은 고선지, 이정기 이납 부자와 같이 우리가 좀 더 알아 보아야 할 인물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참고2
이정기(732~781)
고구려의 잊혀진 영웅, 이정기
역사는 그 민족의 혼이다. 민족의 후예는 선조의 얼을 이어 새 역사를 창조해 간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는 오늘날 얼마나 사실대로 전해지고 있는가? 동북아를 웅비했던 우리 한민족의 9천년 역사는 철저히 유린되고, 왜곡되고, 말살되었다. 인류의 시원사와 인류의 미래를 밝혀줄 한민족 9천년 역사가 언젠가는 정확하게 재조명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여기 만주 대륙을 풍미했던 옛 고구려의 사라진 역사의 일편을 밝혀 보고자 한다.
꺼지지 않는 고구려의 불꽃
서기 668년, 900년간 동북아의 패자로 군림해 온 대 제국 고구려가 멸망했다. 그 동안 고구려는 동이족의 국통을 이어 천하의 주인으로 군림해 왔다. 을지문덕, 연개소문, 양만춘 등 불세출의 영웅들이 대륙을 호령할 때마다, 고구려를 침략한 수백만 중국인의 뼈가 고구려의 산하에 묻혔다.
이러한 고구려가 연개소문 사후 어이없게도 자중지란이 일어나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영원히 이길 수 없을 줄 알았던 고구려를 차지한 당나라는 철저히 고구려를 궤멸시켰다. 고구려의 산하에 묻힌 수백만 중국인의 복수를 철저히 했다. 그리고 고구려 황족을 비롯한 20만의 고구려인을 당나라로 끌고 하면서 다시는 고구려와 같은 강국이 생겨나지 못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900년 장구한 역사의 고구려가 그리 쉽게 숨을 멈추진 않았다. 서기 670년 4월, 보장왕의 외손 안승(安勝), 검모잠 등이 칼을 들고일어났다. 뒤이어 대중상, 대조영 부자가 동모산에서 고구려의 국통을 계승하여 대진국을 세우고 당군을 몰아내고 잃어버린 옛 영토를 회복하는 다물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서도 고구려의 영토를 제대로 지배해 보지도 못한 채 다시금 자신들의 나라로 쫓겨가야만 했다.
한편, 당나라로 끌려간 20만 고구려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중국 오지를 방황하면서도 고구려의 정신을 잊지 않고 당군과 싸우기도 했고, 옛 고구려 땅을 찾아 떠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의 모습은 점차 역사에서 사라져 갔다. 혹은 죽었을 것이고, 혹은 이민족에 동화되었을 것이고, 혹은 1,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느 이름 모를 곳에서 고구려의 후손으로 핏줄을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역 당나라에서 망국의 한을 곱씹으며 사라져 간 고구려의 자손 가운데는 서역을 정복한 고선지 장군도 있었고, 345 무열(武列)의 명예에 봉해진 왕사례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적 시각으로 보면 그들은 단지 뿌리가 고구려일 뿐이지 죽는 날까지 중국에 충성하며 일생을 영화롭게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정기 장군, 그는 동시대를 살았으면서도 고선지나 왕사례와는 달리 뜨거운 민족혼의 숨결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중심부에 나라를 세워 손자대에 이르기까지 58년간이나 고구려의 명맥을 이끌어 나간 주인공이다.
이정기의 꿈, 당나라를 멸망시켜라
이정기는 서기 732년에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정기는 패망한 고구려의 동포들이 당나라 사람들에게 갖은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지켜보았다. 그래서 자연히 옛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웅대한 뜻을 키워 나갔다. 이정기는 타고난 무장으로의 재능을 인정받아 평로절도사 산하에서 비장으로 근무하였다.
755년 안녹산이 난을 일으켜 하북지역을 장악하였다. 따라서 요동에 있는 평로절도부와 장안의 당나라 정부는 양쪽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정기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요동의 군대는 상당수가 고구려 유민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정기는 이들을 규합하여 758년 절도사 왕현지가 죽은 틈을 이용하여 평로절도부를 접수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동쪽에는 발해가 고구려의 국통을 계승하여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이정기는 요동에 나라를 세우지는 않았다. 대신 민족의 원수 당나라를 정벌하여 중국 본토에 또다른 고구려를 세우고자 하였다. 761년. 고구려인 정예군 2만 병력을 이끌고 마침내 중국 산동성에 상륙하였다. 당시 산동성 부근에는 고구려 패망 당시 당나라에 끌려갔던 상당수의 고구려 유민들이 노예처럼 살고 있었다. 영원히 망해 버린 줄만 알았던 고구려의 대군이 왔다는 소식에 산동의 유민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웠다.
사실 2만의 군사는 극히 작은 병력이었다. 당나라는 1개 주만 해도 몇 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2만의 병력은 별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2만의 군사로 중국의 한복판으로 쳐들어간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곳엔 수많은 고구려의 유민들이 있었다. 또한 고구려의 정신이 살아 있었다.
이정기의 고구려 군대는 10여 만의 당군을 격파하고 순식간에 10개 주를 장악하였다. 서기 777년에 이르러서는 조주, 서주 등 5개 주를 더 확보하여 총 15개 주의 광활한 영토를 통치하였다. 이때 그가 지배한 인구는 평로까지 합쳐 130만여 호에 800여만에 이르렀다. 이 해에 이정기는 당의 수도 장안을 공격하기 위해 치소를 청주에서 운주로 옮겼다.
781년, 이정기는 용교와 와구를 점령하여 당나라의 수송로인 대운하 영제거를 차단하였다. 대운하는 강남의 풍부한 물자를 낙양과 장안으로 이동시키는 당나라의 대동맥이었다. 그런데 이 대운하를 이정기가 점렴해 버리니 장안의 당나라 정부는 크게 당황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당나라 수도 장안을 향하여 20만의 대군으로 총 진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천명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인가? 승승장구하여 변주의 20만 군대를 무찔러 성에 고립시키고 낙양으로 진격하려던 순간, 큰 별 하나가 밤하늘을 가르며 떨어졌다. 이정기의 명이 다한 것이다. 당나라 마지막 거점지인 낙양과 장안을 눈앞에 남겨두고, 고구려를 위해 일생을 바쳤던 이정기는 49세의 나이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였다. 비통함을 삼키며 고구려군은 퇴각하였다. 장안에 이 소식이 알려지자 당나라 덕종 이하 문무관원들은 기쁨에 겨워 3일 동안이나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제(齊)국의 최후
다음해, 이정기의 아들 이납은 운주에서 국호를 제(齊)로 하여 황제의 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정기가 죽은 지 한 달도 안되어 그의 사촌인 서주의 이유, 덕주의 이사진, 체주의 이장경이 당에 투항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운하를 다시 개통하였다.
대담하고 지혜로운 이납은 아버지가 못다 이룬 대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운하를 끊고 변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황하를 도강하기 위해 만들어둔 배 3천여 척이 때아닌 가을 장마에 떠내려 가 버렸다. 또 한번 중원 정복의 꿈이 좌절된 것이다. 그 후 이납은 꿋꿋이 제국을 잘 지켜 나갔지만 불과 41세의 나이로 단명하였다.
이납의 아들 이사고는 제위에 오르자 부국강병책을 써 나라와 백성을 부유하게 했다. 그러나 그도 명이 짧았다. 겨우 14년간 제위에 있다가 38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 뒤를 이사고의 이복 동생 이사도가 이었다. 이사도는 이납이 중국인 후처에게서 얻은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의 아내도 어머니가 정해 준 중국 여인 위씨(魏氏)였다. 그런데 그녀는 제국의 대소사에 관여하기 시작하더니 자신의 친척인 중국인들을 데려다 제국의 요직에 앉혔다. 이사도의 말년에는 정무와 군무까지 독단하다시피 하였다.
이사도는 당 헌종이 제(齊)국을 침략하기 위하여 준비한 하음전운원(河陰轉運院)이라는 150칸이나 되는 큰 창고의 200만 섬의 군량미를 불질러 버렸다. 그리고 낙양성을 기습하여 궁궐을 불살라 버렸다. 또한 하남 이곳 저곳에 산책을 만들어 당나라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게릴라전도 감행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중국인들이 제국의 요직을 차지해 가면서 점차 나라의 기강과 고구려의 정신마저 서서히 병들어 갔다.
제국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당황제 헌종은 선무, 위박, 의성, 무령, 횡해 등의 여러 절도사에게 제국 공격을 명하였다. 또 당나라는 바다 건너 신라에게까지 원군을 요청하여 818년 7월,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제국을 총 공격하였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 백제가 멸망한 이후 또 한번의 가슴아픈 동족상잔이 벌어진 것이다. 연합군 수십만이 사방에서 협공하니 한점 섬처럼 고립된 고구려인의 제국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잠들지 않는 고구려의 혼(魂)
668년 고구려가 패망하고 100년이 지난 후, 망각의 어둠 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것 같던 고구려의 불씨가 다시 이정기 장군을 통해서 되살아나 당나라와 대적한 지 58년. 이제 그 불꽃도 영원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한민족의 혈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국이 망한 뒤 장보고는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을 무대로 동부 아시아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해상의 왕이 되었다. 중국천하를 지배하려 했던 이정기의 원대한 구상을 장보고가 바다에서 이루어낸 것이다.
그리고 다시 10년의 세월이 지난 838년, 일본의 승려 원인(圓仁)이 구법을 위해 장보고 휘하의 배를 타고 중국의 산동 지방으로 건너갔다. 그는 그 곳에서 고구려 백성들이 그 때까지도 중국인으로 동화하지 않고 마을을 이루고 독자적으로 사는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의 영웅 이정기! 어찌하여 이같이 찬란했던 민족의 영웅이, 민족의 정신이 1,200년 간 역사의 저편에 묻혀 있었던가? 왜 우리의 후손들에게 이처럼 고증이 확실한 고구려의 후예들을 가르치지 않는 것인가? 이제는 과거의 친일 식민사관의 미몽에서 깨어나야 할 때이다. 중국의 신장 위구르, 티베트, 감숙성, 안휘성, 산동성, 사천성 등지에 우리 민족의 피와 땀이 밴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참고자료:
『고구려를 위하여』, 하서출판사, 김병호
『유목민족 제국사 - 三個의 위구르 帝國』
『舊唐書』
『新唐書 烈傳』
『三國史記』
『三國遺事』
고구려 유민 이정기의 나라 평로치청왕국
중국대륙에는 서기 761년부터 817년까지 4대 58년간 당나라와 맞서며 산동반도 일대를 장악했던 독립국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고구려 유민 이정기가 세운 평로치청왕국이다.
1.고구려 유민 이정기의 나라 평로치청왕국
이정기는 서기 668년 고구려의 멸망으로 보장왕과 함께 당으로 끌려온 고구려 유민의 후손 이다. 그의 본명은 '이희옥'이며, 평로에서 태어나 평로군 부장이 되었다. 서기 755년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평로에서 산동으로 건너온 그는 치청의 절도사 ' 우희일을 몰아내고 절도사가 된다. 서기 765년 당은 유화정책으로 이정기를 치청의 절도사로 임명하지만, 그는 반당세력으로서 독립노선을 추구한다. 서기 778년에 그는 수도를 청주에서 운주로 옮기고, 계속적으로 당에 대항 하는데, 이 당시 치청의 인구는 약500만, 넓이는 18만 평방 킬로미터 정도 되었으며, 군대는 10만이었다고 전 한다. (당시에 신라의 넓이가 약 13만 평방킬로미터 정도 되었음을 볼 때, 상당한 국력을 가 지 나라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참고로 당시의 당의 인구는 5000만 정도 되었고 군대는 60 만 정도였음) 서기 781년 평로치청군은 제음에서 격전을 벌이는데, 이때 이정기(732-781)는 사망하고 서 기 782년 그의 아들 이납이 제왕에 오른다. 서기 813년 이납이 죽고 이사고가 즉위한다. 서기 815년 이사고가 죽고 동생인 이사도가 즉위한다. 이때에 이르러 당은 치청을 칠 목적으로 하음전운원에 있는 150간의 창고에 200만석의 군량 미를 비축하지만 이사도의 공격으로 불타게 된다. 서기 817년 당나라 헌종은 당군, 선무군, 위박군, 무령군(장보고의 군대)을 동원하여 치청을 공격하는데, 이사도가 전장에서 돌아오던 중 부관인 유오에게 시해당하여 사망함으로써, 서기 818년에 4대 58년간의 짧은 역사를 뒤로 하고 평로치청왕국은 멸망한다.
다음은 중국 청주박물관 부관장 씨아밍차이씨의 말이다.
"언젠가는 당신들이 찾아 올 줄 알았다.... 이정기는 당신들 한국인의 선조다. 이정기의 나라는 형식상 당나라에 속했으나 실제로는 조세, 법률 등을 독자적으로 시행하던 산동성 전체 와 하북, 하남, 안휘성을 다스린 독립왕국이었다......"
아직도 청주 범공사에 이정기가 심었다는 당추(唐楸)라는 나무가 있다고 한다..
위 글은 1997년 10월2,3일 KBS-1 TV에서 개천절 특집으로 방송됐던 "고구려 유민 이정기 의 나라 평로치청왕국"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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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발자취 및 현황
문명을 볼 때 기후 참 중요하죠. 하지만 식량에 대한 한쪽 면만 보면 안 됩니다. 인간 이 살기 위해서는 식량쪽도 중요하지만 그 외의 의식주 전반에 관한 여러 요소가 함 께 옵니다. 정치와 경제 문화 등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작용하듯이 식량증산에 따른 도구 역시 중요하거든여.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그 수단이 필요하듯 그 수단에 수반 된 것도 역시 고려해야 하죠.
양자강쪽(강남)에는 광물자원과 같은 지하자원이 드물 죠. 반면에 황하쪽(강북)에는 지하자원이 풍부하며 그에 따른 운송의 이로움과 선대 문명인 배달,조선이나 다른 민족들의 우수한 문화를 얻기가 쉬웠죠. 전쟁에 대한 두려 움도 크지만 그보다 더 큰 지리적인 이점이 더 많이 작용한 것이죠. 외형적으로 사람 을 볼 때도 그 사람의 얼굴만 보지 않죠. 그사람의 앞면,뒷면,옆면도 보아야 하죠. 그리고 그의 내면적인 모습까지 보려고 노력해야 보다 더 진실에 다가갈 수 있죠. 먹는 것에 대한 것으로 먼저 예를 들 어 설명했지만 중요한 것은 다른 면과 함께 종합적으로 봤으면 해요. 분석만 하고 끝 나면 수술한다며 배만 찢어놓은 것이랑 같죠. 종합도 함께 해야 그 수술에 대한 치료 도 할 수 있는 것이죠
한민족 모두가 유목만 했던 것도 아니고 농경만 했던 것도 아닙니다. 한민족의 일부 는 유목하고 또다른 일부는 농경을 하며 둘 다를 병 행한 부류도 있었습니다. 고대의 한민족의 영토는 드넓었으며 같은 한민족이지만 각각의 지역에 맞게 생활하였을 뿐입 니다. 지금의 각 지역들을 보세요. 어느 한나라가 과학이 발달했다고 해서 그것만 신 경썼던 것도 아니고 관광이 발달했다고 해서 그것만 주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후진국 이라 여겨도 과학이 발달한 나라도 있으며 구식과 신식이 함께 공존하는 나라도 많습니다. 인도,지나,러시아,프랑스, 이탈리아 등등 각 지역마다 그에 맞게 생활을 영위해 갈 뿐입 니다.
너무 한쪽만 보지 마세요. 지금의 지나를 보세요. 해안쪽과 내륙을, 도시와 시골을,부자와 서민들. 넓은 땅덩어리에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어우려져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농경을 이미 고대부 터 널리 하고 있던 민족이면서도 강맹한 유목,기마민족이기도 한 민족이 바로 우리랍 니다. 한민족의 수많은 지류 중 어느 하나만 보고 그 지류가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 지류들을 하나하나가 모여 적용될 때야 한민족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유목과 농경을 모두 한 부 여와 고구려는 대표적 반목반농 국가였습니다. 물론 그들의 후예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리고 부여와 고구려는 배달과 조선을 이어받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유목이나 농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헌종이란 이가 <동북아시아 중기구석기문화 연구>에 서, 대륙에서 리프팅된 제 문화권의 유사성에 대해 말한 것이 있는데 검색해보면 도움 될겁니다
역사상에서 홍산 문화와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므 로 고조선의 전 단계인 홍산 문화는 고조선의 선 조들이 이룩한 문화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그래서 힘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요동, 요서 일대에 발굴된 이 청동 기 유물은 황하유역에서 발굴되는 청동기 유물보다 연대가 훨씬 빨라 중국동부지역 에 발견되는 청 동기에도 상당한 영향 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되기까지 합니다
청동기 문화의 실존근거를 홍산문며의 발굴로, 홍산문명의 고조선이나 동이와의 연관 성을 묘실문화의 유사성으로 서술하고 있죠. 그리고 청동기 문명의 원조로 공인된것 은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인쪽에서이고, 유목민족의 이동성이라는 특성때문에 청동기 문명은 '초 원길' 즉, 지금의 고비사막북쪽과 시베리아 삼림지대 사이에서 서로는 카 스피해와 소아시아 헝가리지방 동으로는 만주와 연해주에 이르는 스텝기후지역인 대초원을 따라 유목민들끼리의 교 류로서 퍼진 것으로 보는 것이 세계사적인 상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고등학 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것이구요..그래서 특히 동북아 고대에는 유목민족=청동기문 명, 농경민족=신석기문명이라는 공식을 적용하는 것이구요
그래서 농경문명의 우월성에 대한 패러독스에서 벗어나 고대에는 유목민족의 문명적 우위성과 특성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는 논조의 책 도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청동기를 전파한 스키타이인 부터 서흉노의 갈래인 훈족, 대제국의 몽골족등을 가장 중심 예로 들면서 말이지요
빙하기는 기원전50-42C까지 엄청난 강우량증가시기를 겪고 다시 기원전42-33c까지 감소를 보이다가 기원전24C에 증가를 보여 건조한 사막지대까지 소택지화가 진행된 다 합니다..... 만주의 경우도 별반 다름이 없어 지금처럼 건조한 상태가 아닌 조금 기온이 높은 다습 한 곳이었지요.....그러므로 산해경의 곳곳에 지금은 보이지 않는 대나무 생장의 기록 이 보여집니다.....대나무는 후에 없어진 것이지요......
숙신의 화살인 <호시>도 그걸로 만든 것이 많습니다....하지만 한웅배달국의 갈래왕 조 상나라와 주나라시대에 나타나게 되는 죽간은 사용하지 않았고 그 대신에 그런 지 역에서 잘 자라고 있던 나무를 써서 껍질이 있는쪽을 얇고 반듯하게 베어내면 큰 손톱 모양의 단면을 가진 한쪽은 둥글고 한쪽이 평평한 가벼운 나무판이 됩니다......거기 에 불로 지져서 녹도문을 새겼을 것입니다......단순한 뜻새김부호가 많았겠지요.......
목간이라고도 볼수 있겠지만 아직은 조금 그렇네요.....이것이 서토(중원대륙)로 들어 가 죽간도 되고 갑골문으로도 달라지며 또 불에 지져 뜻을 아는 걸 본받아 갑골점을 쳤을지도 모릅니다.....실제로 소부리씨는 오래 전부터 짐승의 넓적한 뼈를 사용하여 뼈점을 쳐왔지요.....상(은조선)나라에서도 거북의 등껍질을 쓰기에 앞서 소부리씨(예 맥족)와 같은 짐승의 넓적한 뼈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근세고려에 들어서면서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뛰어난 재질의 종이라 만주와 몽골, 중원대륙 등 아시아 전지역에서 닥나무종이가 최고의 상품으로 떠올랐 죠. 그래서 근세조선의 닥나무종이 한지가 유명해진 것이죠. 타림분지塔爾木盆地(탑리목분지)는 David.H.Childress의 <중국..중앙아시아..인도 의 잃어버린 도시들>이라는 글에서도 기원전3415년까지 민물호수로서 이루어졌으며 이 커다란 호숫가 근처에 이 곳으로부터 나온 타림강과 여러 시내들이 흘렀다고 하였습니다. 고비사막은 이때 기름진 들로서 호수의 기슭에 있었는데 곤륜산맥이 타림호의 남쪽 언저리를 이루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지구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자연환경을 끊임없이 변화시켜왔고 변해갈 것입니다. 특히 노아의 방주로 유명한 홍수가 일어나던 때가 기원전24C입니다. 이 당시의 홍수는 지금의 터키지역인 소아시아뿐만 아니라 중동,동아시아 등 전세계 적인 홍수기였죠
한웅배달국은 지금의 미국이 51개의 나라인 여러 주들이 뭉친 연방국가처럼 크게 아 홉나라의 연방국가였죠. 물론 한웅배달국의 후예인 단군조선국 역시 여러 제후국을 거느린 연방국가였습니 다. 한웅배달국의 연방제후국 중 하나였던 수메르(수밀이)는 외세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 닙니다. 과거 서양에서 노아의 방주로 일컬어지는 전세계적 기상이변인 홍수에 의해서였습니 다. 물론 그 지역마다 홍수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어느 것은 정사로 또 어느 것은 신화, 종교서적(성경) 등등의 방식으로... 이 대홍수라는 천재지변으로 수메르는 무너진 겁니다. 그 뒤 백인민족인 아카드족에 게 혼혈정책을 강요당하고 중동을 지배한 모든 것을 철저히 파괴당하고 말죠. 중원대륙에 있던 한민족연방국가들 그것도 상(은조선)나라 이전의 요,순 임금시대 나 하왕조를 비롯 여러 우리 제후들이 홍수의 범람을 막으려고 한웅배달과 단군조선에 도움을 청하고 받은 기록도 있죠
그래서 그들은 치수법을 배워 범람하는 홍수로 인한 비옥한 토지를 가질 수 있었던 것 이죠. 그리고 징기스칸이 유라시아에 대제국을 세웠을 때 한웅배달이전 한민족의 시조 환국 을 재현한다는 뜻에서 제후국의 이름을 차카타이 한국,오고타이 한국,킵착 한국, 일 한국 등으로 붙이죠
제후국의 왕 또는 어떤 지역의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말인 한(汗)은 하늘을 뜻하는 글 자인 한(桓)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주: 단군조선 이전의 우리나라는 한국(桓國) : 고대한국--> 배달한국)즉 한(桓)에서 한(韓), 한(漢), 한(汗)이 나온 것입니다.] 또 한(汗 : HAN)이 몽고로 건너가 칸(KAN : 징기스칸)이 되었으며, 징기스칸의 유럽 정복 때 서구로 건너가 킹(KING)이 되었으며, 그후에 전세계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몽골의 칸(KAN)이 서구의 킹(KING)이란 단어로 변화되어 자리잡는 이러한 과정은 하버드대학에서의 연구결과로도 발표된 바 있습니다. 그리고 한류방 세셰속의한국 게시판에서 2007-04-26에 썼던 [위대한 한글]이란 글과 그 댓글,리플등을 읽어보면 꽤 도움이 될 겁니다
물론 2007-05-12에 썼던 [종합보충]이란 글도 읽어봐도 좋을 것입니다. 내용이 길어 서 인내가 필요하지만... 다음 게시판이 최근에 다시 리뉴얼하여 한류방 자유게시판 을 없애는 바람에 그 게시판에 있던 글쓴이mars로 검색해서 보던 자료목록들이 보기 어렵게 됐습니다
굳이 메뉴가 사라진 한류방 자유게시판을 보려면 통합검색이나 세계엔에서 /한류방 자유게시판/이라는 단어를 대입해서 거꾸로 올라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 자유게 시판을 어렵게 찾아들어가서 다시 글쓴이를 mars로 검색하면 자료목록들이 나옵니 다
본인이 처음 한국상고사의 제왕의 계보를 보고 처음에는 의문이었습니다. 집권기간에 따른 수명이 너무 길어 허황되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여러 곳에서 조사를 한 결과 꼭 허구라고 볼 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 다
이 분들의 연세를 보면,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상식으로 도저히 수긍이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잖아도 한국 상고사를 부정하고 왜놈들과 쥐나 그리고 한국의 식민주의사관 학자 들에게 좋은 공격 목표의 빌미가 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전에 부정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야 곱은 147세였으며 아브라함은 175세, 모세는 120세, 아담은 930세, 그의 아들 셋은 912세, 노아의 방주 로 이름난 노아는 950세까지 살았다는 기록에 비교하면 참 양호한 편입니다
그러나 그전에 부정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야 곱은 147세였으며 아브라함은 175세, 모세는 120세, 아담은 930세, 그의 아들 셋은 912세, 노아의 방주 로 이름난 노아는 950세까지 살았다는 기록에 비교하면 참 양호한 편입니다
그렇다면 보통 인간의 수명은 얼마나 될까?(여기서부터는 예사체를 쓰더라도 양해 ^^;) 이탈리아의 통계학자 보디오는 인간수명의 한계를 70세로 보고 있는데, 이것은 상식 적인 상한선으로서 여러 선진국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프랑,파류,파블로프와 같은 학자들은 100세까지는 생물학적인 접근이 가능하 다고 말하고 있고 르브넬이나 봐만 같은 학자는 115세 전후를 인간 수명의 한계로 보고 있는가 하면, 메치니코프,풀무산,보코모렐 같은 학자들은 150~160세로 주장하고 있다. 한편 하르렐이나 하벤 같은 학자들은 인간의 수명을 성숙에 필요한 시일의 10배로 보 고 있어 200세까지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학자들의 이론이다
그럼 실제로 공식기록에 나타난 장수의 기록을 살펴보면, 덴마크의 도라켄버그는 146세, 스코틀렌드의 잰킨스는 백육십구세, 노르웨이의 요셉 슬린트는 160세, 콜롬비아의 자봐이어 페이러라라는 백육십구세, 헝가리의 야노스 로웬 부부는 모두 장수하여 남편이 172세, 부인이 164세까지 살았는데 공교롭게도 한날 한시에 숨을 거두었고 그 머리맡에는 116세의 아들이 임종을 지켜보았다
구 소련의 코카서스 지방에 살던 사라리 오구리무스리모프는 1973년 9월에 168세3개 월만에 죽었는데 그 당시 아들은 143세였고 막내손자는 93세였다고 하며, 이 지방에는 인구10만명당 10명의 비율로 100세이상의 장수노인이 있다고 한다. 코카서스 지방 외 남이 에콰도르의 발가봐, 캐시물 지방의 훈사왕국 등도 장수자들의 천국으로 100세이상은 보통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서남 해안의 한 마을도 100세 이상된 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장수 마을로 보도된 적이 있다. 그 외 쥐나 방중술의 원류로 알려진 유해첨은 600세, 이청운 선인은 257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1928년에 상해신보에 보도됐으며 이팔백은 무려 800세를 살았다고 한다. 달마대사는 280세, 히말라야의 성 자 바바자는 600세를 살았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위 글이 무조건 아니다라고 하는 것도 무리라고 본다
100세 전후의 집권기간은 그 개인의 집권으로 보아도 무방하고, 그 이상의 수백년의 집권기간은 개인의 집권이 아닌 왕조의 집권이라는 보는 것이 타 당하다. 나라이름은 동명으로 유지되면서 왕조만 바뀐다는 말이다. 나라를 그대로 이루고 있으면서 왕조만 교체된 역사도 세계에는 부지기수고 나라가 없어졌다가도 다시 그 나라의 후예를 자처하며 그 국가명을 쓴 역사 역시 부지 기수죠.....
가까운 예로 유럽의 왕조들이나 아랍의 국가들을 둘러봐도 알 수 있을 겁니다 @@이 상하게 이 다음 게시판에서는 숫자6과 9를 붙여쓰면 아예 입력이 안 되네요. 아마 음 란성 금칙어로 올라 애꿎은 이들만 생기는 것 같네요.@@
▒ 서량지(徐亮之) : 대만대학 교수>>>대만대학의 서량지 교수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4천여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 中原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苗族:동이東夷)이 점령하여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이 중국에 들어온 뒤에 점점 서로 더불어 접촉하였다" 고 하였으며 "은(殷)과 주(周) 이전과 은나라 주나라 대에도 동이의 활동무대가 실로 오늘날(의) 산동, 하북, 발해 연안, 하남, 강소, 안휘, 호북지방, 요동반도, 조선반도의 광대한 지역을 모두 포괄하였는데 "산동반도"가 그 중심지였다" 고 하였다
▒ 왕동령(王棟齡) : 중국 역사학자>>>중국학자인 왕동령(王棟齡)은 『중국사(中國史)』에서 "한족이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현재(의) -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江西)등 지방은 본래 "묘족(동이)의 영속지"였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이(九夷)인데 임금은 치우(蚩尤)였다" 고 주장하고 있다
▒ 임혜상(林惠詳) : 중국 역사학자>>>임혜상(林惠詳)은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에서 "맹자가 말하기를 순(舜)임금은 동이의 사람이다고 하였으니, 오늘날 우리가 순임금은 은나라 사람의 조상임을 추측하여 알 수 있다. 은나라 사람이 바로 동이인데 동방에서 흥기하였다
은나라가 망한 뒤 기자(其子)가 동쪽 조선으로 달아난 것은 조선 역시 은민족의 소거지(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퍼온이 주: 은민족은 (고)조선민족과 같은 민족이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고 하였다
▒ 시로코고르프 : 소련 역사학자>>>소련의 인류학자인 시로코고르프는 『중국사』 에서 "BC 3,000년경 동이족은 이미 황하 양자강 서강의 중류이동(中流以東)(강의 가운데 의 동쪽)의 중간지역에 살았으며, 지나족은 이보다 1,500~2,000년 후에 동방천자 치우(蚩尤)가 다스리는 동이족의 나라인 강회(江淮)지방에 진출하였다" 고 주장하였다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Schliemann, Heinrich]이 트로이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트로이의 존재는 그냥 신화의 일부나 호머의 이야기로만 치부되어 지금도 진 실이 아닌 허구로 여겨졌겠죠. 그리고 일반사람들이 우리고대사가 거짓이라 치부하는데 그것은 짱골라나 왜의 방해 때문에 우리의 유적을 조사하지 못 해서일뿐이죠. 연구나 조사할 노력조차도 안 해 놓고 무조건 거부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식민사학자들이 실증주의를 주장하는데 그럴수록 더더욱 우리의 유적을 알아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처음부터 거짓이라는 딱지를 붙인다는 것은 실증사학에 위배 되는 짓 곧, 스스로를 기만하는 자승자박이죠
녹도(신시)문자는 산동성과 강소성,안휘성 어림의 대문구문화 유적지의 질그릇에 새 겨진 그림과 평안도 영변도호부 읍지인 영변지에 적혀져 있는 글씨 그리고 만주 흑룡강성 영안현 서남쪽에 자리잡은 길림성 경박호나 두만강 700여리의 송화강 기슭에 있는 선춘령과 부오소리지역의 새김글씨에 보입니다. 나중에 배달사람 공손헌원(황제)의 일을 적었던 같은 배달사람인 창힐이 일찍이 한웅 배달에 들어와 자부선생에게 배울 때 녹도(신시)문을 처음 보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를 깨우쳐 황제(공손헌원) 밑에 일하면서 이 녹도(신시)문을 바탕으로 약 간 고쳐 만들어 새 발자국 모양으로 된 한(韓)자의 실마리를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한(韓)자의 원형인 한웅배달국시대의 녹도(신시)문자와 한글의 원형인 단군조선국시대의 가림토를 썼던 것으로 보이는데 은조선의 갑골문자보다 더 오래된 내몽골지역의 홍산배달문명에서 신시문자의 형태 의 증거를 찾았다는 지나학자가 고백을 한적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자신들의 역사가 아니라 해서 짱골라들이 그 유물들을 도로 숨기고 그 유적지역을 군사통제구역으로 하여 아무도 접근 못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누가 증거를 들이대라 하지만 과거 우리 영토를 빼앗긴 상태니 가서 보고 확인할 수 도 없죠
이미 홍산배달문명은 세계학자들에게는 공공연한 비밀이죠, 그리고 해외사이트들에 도 그런 사실이 돌아다니고 홍산문화,하가점문화,장강문화 등 여러 배달 문화 등에 관 한 학자들 논문이 발표되고 있죠. 지금 짱골라들은 세계 여러 학자들의 유적방문조사 를 막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유적들마저 나무를 심어 파괴하거나 댐 건설이라는 미명 하에 물속에 수장시키거나 하는 방식 등으로.... 자신들의 유적이라고 우기는 놈들이 자기 스스로 그 유적들을 파괴한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배달민족이 이룬 문명의 역사 진실이 밝혀질까봐 그 들은 그 유적들을 군사통제구역으로 해서 아무도 못 들어가게 막고 언론통제를 하고 있죠. 물론 인터넷 포털의 야후나 구글에 협박을 해서 진실을 가리고 조작하는 것도 서슴치 않죠
현재 티벳,위구르 등을 비롯한 수천만의 이민족들을 몰살시키고 여러 소수민족들을 폭력을 동반하며 역사공정하는 등 끊임없이 조작된 내용을 세뇌교육시키고 있죠. 하 루라도 빨리 여러 민족들을 짱골라화시키기 위해... 법륜궁 수련자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장기 적출은 기본이죠. 근래에 뉴스나 신문기사 에서도 나온 내용이니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몇몇 어떤 내용들은 한국내에 친쥐나를 동조하는 무리가 있는지 몇몇 내용들 은 아예 인터넷접근을 막고 있더군요. 법륜궁을 나타내는 파~뭐시기라 치면 마치 음란성의 내용을 차단하는 양 접근이 안 되죠. 한국정부의 통신부에서 음란사이트 차단과 함께 같이 도매급으로 취급하는 모 양입니다
독일학회에서도 짱골라들의 저런 유적개방을 막고 학자들 조사를 막는 것에 대해 항 의를 하는 중이죠. 전에 러시아학자들이 티벳의 무슨 피라미드라나 몽골 등의 동아시 아의 유적들에 대한 학설발표를 짱골라들이 말도 안 되는 걸로 덮어씌우기 바쁘더군 요. 혹시 매일 짝퉁만 생산하는 짱골라들이 러시아나 미국,독일을 비롯한 유럽보다 과 학 이 앞선다는 생각은 안 하겠지?
러시아 학자들의 티벳의 피라미드 발견이나 몽골과 만주,연해주의 유적들 조사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죠.독일학자들의 만주,몽골지역의 고분,피라미드 등 조사와 함께 말이죠. 오마이뉴스나 중앙일보에서도 일부 다루었던 내용이니 찾아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혹은 동북공정이다 서북,서남공정 등으로 날조하고 언론통제하는 짱골라 등 의 행태나 쥐나학자들의 태도가 모범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겠죠.
짱골라들과 왜놈들의 만행이 굉장히 합리적으로 보인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뿐... 뭐 한국에는 모든 이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조국마저 팔아먹는 친쥐나,친왜,친미 등의 극우매국노들이 판치는 나라니.....진실된 자신의 역사마저 부정하는 나라이니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죠
KBS역사스페셜시리즈에서도 홍산문화 등을 비롯한 여러 배달문명에 관한 내용을 방 영한 적이 있고, MBC에서도 홍산배달문명을 뉴스형식의 방송을 한 적 있죠. 그리고 연세대교수가 요하문명론 이라는 책도 올해에 출간했죠
한웅배달국의 신시에서 나와 중원대륙의 산동성,하남성을 경유한 배달민족 복희씨는 하남성의 진陳에 터전을 잡게 되죠. 이때 복희씨와 함께한 배달민족 비치수리씨(화서華胥부족)들은 새부리(산동성)의 지 마울(제음濟陰)지역에 살림터를 마련하여 크게 일어나게 되고, 복희씨와 함께한 배달민족 누에검씨(뇌신雷神부족)들 역시 산동성지역에 자리를 잡 게 됩니다. 이 누에검씨들은 일찍이 산뽕나무 잎을 먹고 아름다우면서도 고운 실을 뽑아내는 천 잠天蠶(하늘누에)을 잘 다루었는데 복희씨를 따라 가는 중 산동성을 터전으로 잡게 되어 이 산동지 역은 산뽕나무 누에비단실을 만들어내는 누에치기가 성행하게 되죠. 배달민족인 복희씨는 대략 기원전 3528~3413년경의 사람으로서 음양오행의 환역법桓易法을 갑자甲子로 시작하는 복희팔괘를 창안하게 됩니다. 그의 무덤은 현재 산동성 어대현魚臺縣 부산鳧山의 남쪽에 있습니다
참고로 환역(桓易)이란 한웅배달국시대부터 단군조선국시대로 전래된 철학으로서 세 상만물의 구성과 그들 사이의 운행이치를 밝힌것이죠. 훗날 복희가 한웅배달국의 환역을 이용하여 新易을 창안하니 이를 희역(羲易)이라 하 며 한웅배달국의 갈래왕조들인 하(夏)나라 때는 연산역(連山易)으로, 상(은殷조선)나라 때는 귀장역(歸藏易)으로 그리고 주(周)나라때는 문왕과 그 아들 주공이 이를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풀이를 해 놓은 주역(周易)으로 변모되어 전해지게 됩니다. 하여튼 여기서 눈여겨 볼것은 한웅배달국시대의 자부선생이란분이 삼청 궁에서 윷놀이를 만들어 환역을 강연했다는 것이죠. 이러한 기록으로 본다면 환역의 역사는 단군조선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듯 합니 다. 환역의 그당시 모습은 알길이 없으나 윷놀이를 가지고 강연하였다 하므로 그것을 단 서로삼아 추론은 가능하리라 봅니다
쥐나 짱골라들의 사서를 주의깊게 들여다 보면 옛날부터 쥐나족들은 북으로는 황하 의 위쪽과 동으로는 태행산맥을 경계로 결코 발을 들여놓지 못 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왜 그들의 도읍이 장안과 낙양을 벗어나지 못 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황하를 경계로 한 하남에서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 시기 북경을 비롯한 그 주변의 모든 땅은 배달민족의 것이었으며 황하 위쪽은 짱골 라 자신들이 말한 것처럼 서쪽은 서융과 백이 동쪽은 북융과 산융이라는 융적의 땅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진시황이 동으로 순행할때도 그렇고 초한의 싸움도 어디에서 주로 일어났는지 보시면 금방 알게 될 겁니다.
참고로 서융,북융,산융 등으로 불리는 융족은 사실 배달민족의 갈래입니다. 서융만 해 도 한웅배달국 초기에 배달민족인 반고가 가서 세운 배달제후국의 사람들입니 다. 백이의 이夷는 배달민족의 또다른 표현이니 말 안해도 우리 민족이란 것을 아실 것입 니다. 그리고 진시황의 진나라 역시 한웅배달국 갈래왕조입니다. 진나라는 배달민족 그 중에서도 흉노계의 나라입니다. 배달민족은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으로 시대를 변천해가면서 여러 민족으로 나누 어지는데 북쪽은 배달계 흉노로 서쪽은 배달계 융족 등으로 동쪽은 배달계 동이로 중원대륙에는 회이, 견이, 풍이 등 여러 배달계로 나누어집니다. 그래서 배달민족 말 할 때 구환九桓,구이九夷 등으로 불리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갈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흉노는 돌궐,선비,몽골,거란,오환,저족 등으로 갈라지죠. 융족은 이후에 강(티벳)족과 흉노의 갈래들인 달단(타타르), 중앙아시아의 여러 부족 들로 갈라지고 합쳐지는 등 변화를 거듭합니다. 동이족 역시 예족,맥족,환족과 숙신,말갈(여진)족 등으로 갈라지고 합쳐지는 변천을 겪습니다. 서흉노는 유럽으로 진출하여 아틸라의 천하를 이루어내죠. 아틸라의 죽음 이후로 그 들은 지금의 헝가리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선비족은 수나라와 당나라 북위 북연 등 여러 나라를 세우죠. 거란족은 요나라를 세우고, 여진족은 금나라,청나라를 세우죠. 몽골족은 원나라를 일 으키고, 우리는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고구려),남부여(백제),대진국(발해) 등을 세우죠. 서돌궐(투르크)은 아랍으로 건너가 오스만투르크(터키)를 이룩하죠
쥐나 짱골라들의 왕조는 한,송,명 셋뿐이죠. 그 외의 대부분 왕조들 삼황오제시대,하,상(은조선),주,춘추전국,진,수,당,요,금,원, 청 등과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고구려),남부여(백제),대진국(발해) 등 모두는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의 제후국 또는 갈래왕조국가들입니다
게르만족이 서고트족,동고트족,반달족,알란족,주트족,색슨족,앵글족 등으로 나누어졌 었죠. 배달 계열 훈족(서흉노)의 유럽침입으로 이들 게르만족계열이 로마(이탈리아), 브리티니아 (영국),갈리아(프랑스),이베리아반도(스페인,포르투갈) 등 서유럽으로 이 동해 퍼지죠
이 사실들에 관한 학자들의 논문도 여러 편이고, 독일의 ZDF방송국에서 도 훈족에 대 해 다큐방송도 있었죠. 어차피 훈족이 흉노계라 하든 투르크(서돌궐)계라 하든 어차피 배달갈래민족이죠. 배 달갈래 흉노계가 나중에 선비,오환,돌궐,거란,몽골,저족 등으로 나누어진 것이니...
보다 많은 이들이 알기를 바라며 옛고토를 회복할 뿐만 아니라 유쾌,상쾌,통쾌한 팍스 코리아나가 되도록 우리 모두 다물하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근세조선이 침묵을 지 키고 있을 때, 왜국은 1592년이후부터 포르투갈의 조총 등을 비 롯한 문물,난학(네덜 란드 학문),프랑스,독일,미국 등 많은 서양의 문물을 300년간이 나 꾸준히 받아들이 고 발전시켜 지금의 강국이 되었습니다. 물론 독일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수십개의 소 국으로 갈라진 약소국 독일은 끊임없이 주변 유럽의 열강에 당해왔습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그로 인한 과학의 집중적 투자 등으로 독일은 하나 의 나라로 통일할 수 있었으며 그 저력 으로 세계1,2차대전까지 일으키는 최강국이 된 것입니다. 서양은 동양으로부터 문 물 을 받기 시작해 서 그리스,로마 문명의 기초를 다질 수 있 었죠. 하지만 중세시대의 미 쳐버린 종교때 문 에 건축 기법 중 시멘트공법마저 잊어버 릴 정도로 암울한 시대 죠
하지만 아랍의 문명을 다시 받아들이면서 르네상스를 이루 어 과거의 학문,문화 등을 서서히 되살리기 시작하죠.세계최초의 종합병원이나 도서 관 아라비아 숫자 등 뛰어 난 동양 아랍문명이 없었다면 어림도 없었죠. 하물며 플라톤 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 의 여러 고대 저서 등이 아랍의 도서관에 보관되지 않았다면 아마 서양의 문명은 벌 써 사장되 어 한참이후에나 다시 발전을 이루어 나갔을 것입니다. 이 부분은 전에 ebs 교육방송 에 방영된 bbc역사관련 다큐멘터리 등에서 나왔던 내용입니다. 배달부터 시작하여 고구려,발해까지 위대 한 선조들이 이룬 업적을 짱골라에게 우리 조상까지 다 빼앗기 고 역사마저 빼앗기게 만든 그 후손이 못 나서 그렇지 그 조상이 못 난 것은 아니죠. 아무리 뛰어나도 그 후 손이 못 나면 아무 소용없죠. 우리의 전례뿐만 아니라 잉카,마 야,캄보디아의 크메르, 인도의 여러 문명,종교때문에 모든 발전이 거의 정체되게 된 근 동,중동의 아랍문명 등등...
서양 역시 마찬가지죠. 동양의 문명이 없었으면 다시 르네 상스를 일으키지도 못 했죠. 또 회계제도는 우리나라도 개성상단의 사개송도치부법이라는 훌륭한 복식부기법이 예전부터 사용되어왔고 시스템도 현대 서양의 그것에 비해 결코 뒤쳐지지 않습니다. 숫자는 한웅배달시대에는 산목으로, 단군조선시대에는 산대 등으로, 시간이 많이 흘 러 근세조선에 들어서는 쥐나의 숫자나 조선산이라는 고유숫자도 사용했습니다. 물론 숫자표현체계는 아라비아숫자가 더 쓰기 편한듯 싶습니다
이 우리부기법은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서있어 1910년대 오스트리아 경영학회에 보 고되어 고려의 회계시스템이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에 전파되었다고 주장되었으나 왜국의 학자가 이를 반박하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당시 왜국의식민지배를 받던 우리나 라의 상황때문에 묻히게 됩니다. 물론 금속활자에 대한 앞선 사용 또한 마찬가지죠. 참고로 서양이 동양을 서서히 따라붙다가 17세기초에 이르러, 여러 분야의 발전 에서 조금씩 추월하기 시작하죠.
그리고 서양이 세계대항해시대를 열게 된 배경 중 자연의 영향도 큽니다.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유럽은 소빙하기시대였거든요. 그래서 최북단에 있던 영국은 식량문제 등을 비롯한 여러 악조건을 타개하기 위해서 상공업을 장려시키고 과학을 위시한 학문을 공부하 고 세계로 뻗어나갈 필요성이 컸 죠.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끝내는 산업혁명을 일으키 고 그리하여 전세계에 미국,호주 등 의 영연방이 생기게 된 기저가 되죠
7000년을 대륙의 지배자로 군림하다 그 후 2000년은 혼란을 거듭하다 이제는 이렇게 반도에 처박혀 옛 영광은 다 망각하게 되었지만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다른 이들이 하는데 위대한 문명의 후손인 우리가 못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역사는 돌고 돕니 다 과거 반도신라나 근세조선같은 어리서은 시대가 있었지만 그들 백성이 나쁜 것이 아 닙니다. 그 위정자들이 나쁜 것이죠
백성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악용한 위정자들 이 나쁜 것입니다. 김씨,이씨,박씨,고 씨,강씨,연씨 등의 각 가문이나 혹은 만주,연해 주,경상도,전라도,함경도 등 각 지방이 나 또는 각 왕조 등에는 언제나 영웅과 매국노가 있어왔습니다. 그러니 하나 를 보고 나머지마저 나쁘다고 판 단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자제했으면 합니다. 전두환 이나 노태우 같은 쓰레기 도 있고 한국동해영역을 왜놈들에게 거의 팔아먹은 김대중 도 있습니다
지금도 한국에는 매국노들을 비롯하여 쓰레기 정치가들이 각 지방색을 들먹여서 가 뜩 이나 좁은 나라의 국민들을 쪼개고 서로에게 불화를 일으키도록 만들죠. 우리는 절 대 그들의 어리석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됩니다 반도내의 배달쥬신족이 다른 지역 의 같은 배달쥬신족들을 배척해서 수많은 전쟁을 스스로 불러낸 것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는 통합하여 앞으로 나아가야지 그렇지 못 하 고 분열하면 지금의 한국은 아니 반 도의 배달쥬신족은 또다시 수많은 종족으로 갈라지고 약해지겠죠. 우리는 합 쳐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통합되고 강해져야 지금의 몽골내각 이 한국에 연방의 손길 을 보내는 것을 잡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만 주를 아우르고 조 선족을 안을 수 있는 것 입니다. 고대의 배달과 쥬신 역시 지금의 미 국처럼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많은 제후국을 거느 린 연방제국이었습니다. 우리가 나 아갈 길 은 끊임없이 합치고 강해져 나아가는 길입 니다
그리고 이 말하는 본인은 경상도태생 입니다. 하지만 그전에 자랑스런 배달쥬신의 후 예입니다. 다시 한번 고토를 회복하고 배달쥬신 과거의 영광을 재현했으면 합니다. 세 계를 주도 하는 팍스 코리아나를 위한 그 날까지 우리 모두는 다물하도록 노력해야 합 니다
그래야 다 물을 이루어 다시 영광의 진정한 최강 대한국으로 거듭날 수 있는 최소한 의 토대를 마 련할 수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 정신의 회복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 기 위해서는 올바른 역사부터 먼저 다 시 세워야 하겠죠. 역사란 현실의 거울이요 미 래의 지표라고 합니다. 진실되고 확실 한 역사관정립은 분명히 후대에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자 우리 미래의 도약대가 될 것입니다
평화를 바라면 전쟁을 대비하라!란 말도 있죠.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기회가 와도 준비소홀로 실력이 부족하여 그 기회를 잡지 못 하겠죠. 하물 며 주변4강국에 둘러싸인 한국은 풍전등화의 위기라 볼 수 있습니다. 손 놓고 있다가 는 평화는 커녕 모든 것을 잃게 될 겁니다. 과거의 기상을 잃어버린 근세조선만 봐도 알수 있죠
[소위 세계화]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 확고하게 확립된 위에 이뤄져야 [진 정 한 세계화]가 이뤄질 수 있습니다. 각 국가의 역사교육,민족교육,국민교육이 바로 [그 나라, 혹은 민족의 정체성]을 기르는 교육이죠.[시민교육]은 세계인으로서 갖춰 야할 [보편적인 윤 리/덕목]을 가르치는 것이죠. 따라서 [역사교육]은 없고 [시민교육]만 한다는 찌질이의 절규에 정말 웃기는 일입 니 다.
(옛날 덴마-크의 "그룬트비히"라는 사람은 [너는 크리스찬이 되기 전에 먼저 덴마-크 인이 되라]고 했죠.) 유태인들이 부르짖는 시온주의, 독일의 게르만주의 운운하는 것 도 다 같은 맥락입니다. 미국도 다민족국가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 민족사회,인종사회로 굴러갑니다. 그 에 따라 인종차별도 심하고... 그래서 미국 정치계에서 스패니쉬계나 흑인종,동양인 등을 비롯한 각 단체들의 힘겨루기가 극심합니다
근데 미국내 한국사회만 결집이 안 되는 편이죠. 그래서 미국에서 부당한 이익을 받 는 면이 더 큽니다. 흑인이나 스패니쉬계 등 은 각각의 정치의원이나 이익,인권 등 다 양한 수단을 마련해 미국 정부에 압력을 주어 보다 많은 것을 이끄는 것에 비하면 정 말이지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가 되고 있는 유럽공동체마저도 각국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합니다. 물론 미국도 마찬가지
그런 기반이 되는 정체성교육도 없이 세계화를 추진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사상누각입 니다. 그렇게 따지면 보스니아 내전이나 아프리카의 여러 내전과 같은 위험을 안게 되 는 겁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나 슬로바키아로 나누어진 것이나 구소련이 무너진 후, 여러 국가가 들어선 것만 봐도 현재는 한울타리의 세계화라는 이 면의 신민족주의시대로 볼 수 있는 겁니다. 하여튼 자신의 주변도 살피지 못 하면서 인류애,세계화를 부르짖는 찌질이들이 된다 면 우리는 곧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폭풍전야의 풍전등화같은 어려운 상황 에 놓여있는 겁니다. http://blog.daum.net/mykimcj815/9613327 여기 가시면 현재 한-몽 골 국가연합에 관한 내용이 있으니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홍산배달문명의 발견이 세계 학자들 사이에는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으나 쥐나 짱골라들이 학자들 유적방문조사 자체를 막고 있으니 정말 답답한 실정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더 알려고 강해지려고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처음 시작 은 단일민 족으로 시작했을지 모르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민족이 여러 계 통으로 나 누어졌죠. 그래서 지금으로서가 아닌 오래전부터 우린 다민족국가라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과 형제들이 처음에는 하나였지만 시간이 흘러 먼 친척이 되고 그 후 에는 남남 이 되어 다시 서로 만나 부둥켜 살아가는 세상처럼 말입니다 수많은 배달쥬 신족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여러 분파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래 서 그 기원은 배달쥬신족이라는 것에서 시작되지만 그 세부의 역사에 있어서는 그 분 파된 민족의 고유한 역사인 것입니다. 역사는 그 민족의 것이지, 시대적인 영토 변화 에 따라 역사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의 흥망의 역사에 따라 그 영토의 변 화가 있을 뿐이지요... 몽골의 역사는 몽골 그 자신들의 것이고, 훈제국의 역사는 헝가 리의 것, 오스만투르크 (서돌궐)역사는 터키의 것, 부여 고구려 백제 등의 역사는 대 한민국인 것처럼 우리 형제들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 런데 이것에 대해 억지를 부리는 짱골라들이 문제입니 다. 치우 천 황이나 태호복희씨 등 남의 조상도 자기 조상이라 하고 짱골라의 한,송,명 의 3왕조를 제외한. 수많은 배달쥬신왕조들이 이룬 발견,발명,업적 등을 자기 것이라 고 어거지를 부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짱골라의 억지에 대해 우리는 보다 정확 히 민족을 분 류하고 그것에 따라 역사 를 논리적으로 반박하려고 할 뿐이죠
만약 누가 우리 자신이 역사나 민족을 너무 확 대시킨다고 성질을 낼지도 모르죠. 하 지만 그것은 사대주의 매 국노나 짱골라나 쪽바 리 등의 의견에 동조하는 행동일 수 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 만 배달쥬신족이 시간이 지나 이렇게 여러 가지로 나누어졌다 는 사실만 언 급하려 하 고 끝내려 하죠 그러나 짱골라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 니, 그것에 대해 배달쥬신 족 이 나누어졌다 고 말하는 것 이상의 사실을 지적하며 그 들의 무지를 일깨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문제를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원 인을 제거해야 되는 데, 그 문 제의 원인과 원인제공자인 짱골라나 쪽바리에게는 아 무 말 안 하고 가만히 있 으 면서, 그에 대해 지적하는 우리자신 스스로를 타박한다 면 말이 안 되죠. 그런 어 리석은 짓은 공정하지도 못 할뿐더러 스스로를 자학하는 꼴 이죠
혹시 헝가리나 터키의 유럽,근동 혹은 이전 타타르 등의 중앙아시아 등의 민족들이 우 리와 많이 다르다고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들의 모습은 오래동안 꾸준히 동양 의 피 보다 서양의 피가 많이 보급된 하나의 결과일뿐입니다 헝가리나 터키 중앙아시 아의 여러국가들의 그 시작은 배달형제들에서 시작하는 것입 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브라질 등을 위시한 남미에서는 같은 부모밑에서라도 황인종, 흑인종,백인종의 다양 한 자식형제들이 태어납니다 유럽이 중남미를 침략하는 과정 중에 워낙 많은 피가 섞 여버렸기 때문이죠. 그들의 가계를 보면 인디언,독일인,스페인,포르투칼,영국인 등 다 양합니다. 그래서 남미에서는 같은 친형제끼리라도 피부색이 다른 것이 다반사입니다
이는 이전에 kbs나 mbc 등의 다큐멘터리 등을 비롯하여 세계각국 유명 방송국들에 서 도 다룬 다큐나 뉴스,과학 등 여러 방송물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한번 참고해도 좋 겠 네요. 그리고 조선족이라 나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뒤에서 못된 짓만 꾸미는 짱골라가 나쁜 것이죠
졸본부여 (고구려)건국이 서기전 227년쯤 됩니다.
즉 진시황의 진나라보다 5,6년 먼저 건국됐죠 당나라 구당서에도 졸본부여(고구려)역사900년이라 나오고, 광개토태왕비 비문에도 그렇게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남한은 졸본부여(고구려)가 신라보다 늦게 건국한 700 년 역사라 가르치니 정말 한심합니다 어쨌든 왕씨는 짱골라의 한나라보다도 한참 먼저 건국된 졸본부여(고구려)의 귀족가문입니다
출처: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04&articleId=56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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