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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우주천문

과학과 종교

by 靑野(청야) 2022. 6. 28.
 
2020. 7. 1. 04:23


과학과 종교, 대립된 이념과 갈등
승자는 누구인가?


20세기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위대한 두 과학이 태동한 시기
두이론을 통해 인간은 자연을, 세계를, 그리고 우주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양자역학 연구가 한창 진행되던 20세기 초기
당대 과학자들은 느꼇다.

신이 존재한다면
대체 그는 무슨 생각으로 세상을 이렇게 만든 것일까?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신은 우주를 대상으로 주사위놀이 따위는 하지 않는다."
우리가 결과를 정확히 알수 없는것은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

우주의 운영방식을 정확하게 제시해주는 과학만이 존재할뿐


1. 과학의 태동
코페르니쿠스 (1473. 2.19. ~ 1543. 5. 24.)

 

발트해에서 약 150km 남쪽에 위치한 폴란드의 번창한 도시
토룬에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태어난다.

당시 게르만 기사단에게 정복당한 후 기독교로 개종되어 약 200년 간
기독교 통치자들의 지배에 있었던 곳.

But 1400년대 초, 폴란드의 지도자들이 이에 반발하여 전투를 벌였고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버지는 왕을 경제적으로 지원함.

코페르니쿠스는 크라쿠프 대학을 다니면서
여러 학문들과 아리스토텔레스 저서의 해설서를 공부하면서
학우들과 토론을 통해 자신의 사상의 밑거름을 쌓아감.

그당시 유럽의 교수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을 분석하고 해설을 달아 학생들을 가르침

하늘의 별과 태양, 행성들은 제 5원소인 에테르로 이루어져있다는
이공계 일게이들이 보면 빼애애애애애액 소리지를 이론들


결국 그는


1529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집필하기 시작

1533년, 교확의 비서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교황과 추기경들에게 설명하기도 함
1542년, 계속된 교정 끝에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출판
하지만 그해 뇌출혈로 몸의 오른쪽이 마비되어
죽을때까지 일베 정회원급 장애를 가지고 있다가
1543년 결국 노짱처럼 세상을 떠나게

<천체에 회전에 관하여>

이게 뭐냐면
태양을 우주의 중심으로 이동시키고,
항성 천구의 1일 1회전 운동을 없애버림.


한마디로 수학적 가설을 통해
난제 중 하나인 행성의 역행 운동 문제를
별도의 가설없이 우주의 구조만으로 설명가능하게 만듬


많은 역사가들은 이를 과학혁명이 시작된 시기로 생각함.
그 중에 괴테가 한말을 보면

"지구는 우주의 중심점이라는 엄청난 특권을 포기해야 했다. 이제 인간은
엄청난 위기에 봉착했다. 낙원으로의 복귀, 종교적 믿음에 대한 확신, 거룩함,
죄 없는 세상, 이런 것들이 모두 일장춘몽으로 끝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새로운 우주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사고의 자유와
감성의 위대함을 일깨워야 하는 일이다."


-괴테, 지동설의 부각에 대한 괴테의 언급 중
​​​
"최초의 근대 천문학자이면서 마지막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자였다."
-토머스 쿤

"기독교인들은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이 시작됐을 때 천국 교리를 버려야했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창조 교리를 버려야만 할 것이다."
-대니얼C.데닛(무신론과학철학자)

 

기독교와의 마찰
1551년 교황청은 역법 개정 때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이용
그래서 이 저서를 바로 금서로 지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음

하지만 바티칸에서는 출판 당시 바로 금서로 지정하려고 했음.
결국 이 학설이 나오게 된 70년 이후 시점에서 금서로 out!!!!!!

이후
종교재판의 희생양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자라고 평가받는
이가 태어난다.


2. 근대과학의 아버지
갈릴레오 갈릴레이 (1564. 2. 15. ~ 1642. 1. 8.)

종교재판의 희생자
하지만 진리의 추구를 위해 종교와 맞선 과학자의 상징적인 존재

하지만 일게이들아 어느정도 갈릴레오의 생애를 잘 보면
과학의 자유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지 않았고
종교계와의 대립과는 상관없이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음.

오히려 요하네스 케플러가 평가에 부합되는 인물임.
요하네스 케플러는 30년 종교전쟁을 겪으면서
가족들 잃고 죽을 때까지 도망다닌 사람이다.

1564년 2월 15일
피사의 몰락 귀족인 피레네 가문에서 태어난다.
갈릴레오의 집안은 귀족 집안이었지만
태어났던 때에 가세가 기울어 생활이 극히 어려운 흙수저 집안

수도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아버지의 반대
아버지는 의사가 되길 바라면서 피사 대학으로 보냄
하지만 이새끼는 의학보다 수학에 흥미를 느끼고
본격적으로 수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함.


하지만 돈이 없어서 대학 중퇴하고
피렌체에서 가정교사 하면서 수학연구를 계속함.
1589년 피사 대학의 수학 교수가 되고
<운동에 대하여>를 저술


그리고 높은 곳에서 무게가 다른 물체를 떨어뜨리는 실험으로
낙체의 속도가 무게에 비례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잘못되었음을 증명.

이것이 유명한
'피사의 사탑에서 낙체 실험'

하지만 이거 실제로 한거 아님
갈릴레이 전기 작가가 돋보이게 하고 싶어서 
그냥 논리적인 추론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론 반박함.

근데 논리적 추론으로 이 실험이 실제로 증명된거면 대단한거 아니냐?

1609년 당시 막 개발되었던 망원경을 접하게 되고
곧바로 망원경의 개량에 착수
1609년 후반부터 1610년 초에 걸쳐 밤하늘을 관찰하면서
우연히 발견한 몇 가지 주장을 공표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성의 위성을 발견한 것

"목성의 위성을 통해 우리는, 지구가 1년 주기로 태양 주위를 회전하고 있으며, 다시 그 지구 주위를
달이 돌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거부하고 우주의 이러한
체계마저 거부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심을 잠재울 수 있는 강력하면서 우아한 주장을 갖는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눈앞에는 지구 주위를 도는 달처럼 목성의 주위를 배회하는, 그리고 그들 모두
12년의 공간을 태양 주위로 대회전하는 궤적을 밟는 4개의 별이 펼쳐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갈릴레오의 저서 <시데리우스 눈치우스> 中


이후 목성의 위성들에 대한 그의 천체 관측 사항들을 종합해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Calculating. . . . .


갈릴레오 :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코페르니쿠스 지지한다 



 



다음해, 갈릴레오는 뛰어난 학자들이 많았던 예수회의
영향력 있는 철학자들과 수학자들에게 자신의 망원경의 성능을 증명하고,
그들 스스로의 눈으로 목성의 4개의 위성들과 관련된 사실들을 보도록 하기 위해 로마에 감
로마에 있는 동안 린체이 아카데미의 회원이 됨

1612년, 우주의 태양 중심 이론에 대한 반대가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제 토마소 카치티가
지구의 운동에 대한 갈릴레오의 의견을 비난 


비전문가가 자기 사상에 아니꼽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에 회부시켜버림.
결국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과거 자신의 주장을
"맹세코 포기하며, 저주하고 혐오한다"고 선언하고 겨우 풀려남

1633년 가톨릭 교회의 단죄에 따라,
종신 징역형을 받았으나 감형되어 가택연금에 처해졌고
모든 저서는 금서 목록에 오르게 됨.
1642년 결국 죽을때까지 가택연금.

훗날 평가는
과학적 연구 방법으로써 수학적 법칙과 경험적 사실의 수량적 분석을 확립
근대 관측천문학, 물리학, 과학의 아버지라 불림.

다음해 1643년
지금까지 태어난 가장 위대하고 유례없는 천재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그가 태어나게 된다.

3. 과학사에 대적할 자가 없는 거인
아이작 뉴턴 (1643. 1. 4 ~ 1727. 3. 31)

1643년 1월 4일
잉글랜드 동부 링컨셔주 울즈소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아이작 뉴턴
1개월 일찍 태어난 미숙아라 몸이 양말에 들어갈 정도로 작았다라는 말이 있다.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집나가 버림.
뉴턴은 외할머니와 외삼촌 집에 남겨져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게 된다.

한가지 일화를 말하자면

새아버지는 의붓 아들인 뉴턴과 갈등이 심하고 허구한날 때리고 욕함.
그래서 뉴턴은 때때로 틀딱 아버지를 때리고 죽이는 상상을하고,
집을 불태우겠다고 협박과 폭언도 일삼았다.

1661년 6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
1665년 미적분학의 기초인 이항정리를 일반화 시킴
하지만 이때 영국에 흑사병이 대대적으로 유행하게 되어 학교는 폐교

뉴턴 스스로도 2년간의 휴학기간에 대해 말하는데
"발견에 있어서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리고 유명한 뉴턴의 사과일화도 이 때 일어난 것임.
일화 관련해서 허구의 이야기다 아니다 논쟁이 많은데
실제로 동시대 영국 과학자 윌리엄 스터클리가 쓴 회고록에
사과이야기가 나옴.

근데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하기 위한 사례로 언급했을 뿐
뉴턴이 땅에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과 역학법칙의 진실 모두를 깨달은 것은 아님
후대 사람들이 왜곡해 부풀린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도 인간들은 뉴턴이 사과나무 보고 다 깨달은 줄 알고 있다.

1667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다시 돌아와 석사 학위를 받고 연구를 시작
1672년 어느날 캄캄한 방 안
가느다란 빛줄기가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빨간색부터 보라색에 이르는 빛의 분산을 확인하게 된다.

이렇게 갈라진 전체색의 빛을 렌즈에 통과시키면 다시 백생광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뉴턴은 색은 빛의 기본 요소이며, 백생광은 스펙트럼상의 모든 색이 합쳐진 결과라고 결론을 내림.
스펙트럼상 모든 빛은 각각 굴절 정도가 다르며 고유하다는 사실도 밝혀냄.

아무튼 뉴튼은 만유인력 말고도  많은 업적을 이룸.

1. 미적분학의 발명
2. 뉴턴 물체의 운동에 관한 3원칙
(관성, 가속도, 작용 반작용의 법칙)
3. 중력의 발견 (만유인력)
4. 광학 (프리즘)


그렇게 수많은 업적을 달성한 후


1727년 3월 31일 84세의 나이로 평안하게 세상을 떠남.
영국의 위인들이 잠든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안장되었고
뉴턴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자연과 자연법칙이 밤의 어둠 속에 감춰져 있었다.
신께서 말씀하시길 뉴턴이여 있으라 하시니 어둠이 모든 빛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뉴턴의 묘비명은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알렉산더 포프가 뉴턴을 칭송한 글귀임.


그가 연구에 사용했던 망원경과 프리즘 등의 기구가 묘사 되어있고
라틴어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이곳에 아이작 뉴턴 경이 묻혀 있으니, 하느님과 같은 정신력에 의하여
그가 발견한 수학적 원리로 행성의 운행, 혜성의 경로, 바다의 조석을 처음 밝혔으며,
일찍이 어떠한 학자도 의심하지 않고 있던 광선의 본성을 발견하였다.
또한 자연, 고대, 성서에 관하여 세밀하고 예민하며 확실하게 해명하여
전능하신 하느님이 존엄하심을 철학적으로 증명하였다.

인류가 하느님 곁에 이토록 가까이 있었다는 것은
실로 우리의 큰 기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642년 12월 25일 출생, 1726년 3월 20일 사망"


뉴턴은 생각보다 종교의 압박을 받지 않았는데
이는 본인이 종교에 대한 의견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거나 출판하지 않았기 때문임.
한마디로 종교의 심기를 건들지 않아서 조용히 지나감.


하지만 종교를 원천적으로 반박하는 이가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진화론을 주장하고 종의 기원 저서의 작가
찰스 다윈이다.

4. 진화론과 창조설 불을 지피다
찰스 다윈 (1809. 2. 12. ~ 1882. 4. 19)

1809년 2월 12일 영국 슈루즈베리
부유한 의사 로버트 워링 다윈과 수잔 사이에서 2남 4녀중
다섯번째 아이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난다.

찰스 다윈 할아버지는 이래즈머스 다윈으로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진보 지식인으로 이름이 난 의사
외할아버지는 영국 도자기 산업의 창시자이며, 도예가이자 기업가인 조시아 웨지우드
둘다 박물학자

그 영향으로 어린시절부터 박물학적인 취미를 좋아하고,
8세때 새줍하는 얘들처럼
식물, 조개, 광물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게 됨.

어려서부터 할아버지가 쓴 책들을 읽으면서 생물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됨.
하지만 의사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원했고,
의대로 진학시키려고 설득하고 또 설득 하지만
피를 봐야한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가졌고,
의학보다는 곤충 채집같은 경험에 입각한 자연계의 다양성을 좋아함.

결국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의학을 배우던 중 1827년 대학교를 그만둠.
하지만 다시 케임브리지 대학교 신학과에 들어가 신학, 고전, 수학을 배움.

종의 기원 집필


1831년 최고 성적으로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하고
세계일주를 하게 되는데, 이때 아버지의 반대가 극심했음.
하지만 에딘버러 대학 재학시절의 은사인 존 스티븐스 헨슬로의
간곡한 설득으로 아버지는 세계일주를 허용하게 됨.

1831년 12월 27일 시작한 <비글호>의 항해
피츠로이가 의도한대로 5년이나 지속되었고,
다윈은 그 시간 대부분을 육지에서 지질학을 조사하면서
자연사 수집물을 수집하면서 보냄.

세계일주를 하면서 표본을 차곡차곡 모으게 되고
이때 갈라파고스 섬도 들리게 된다.


비글호의 세계일주 동선

그렇게 세계일주를 하고 남미 대륙이 조금씩 융기한다는 논문을 씀.
1838년 지질학회 서기에 선출되고 지리학자로도 활동하고 동물학 연구에도 전념
1942년 건강이 나빠지자 런던 교외에 은거하면서 진화론에 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는데 힘을 기울임
1842년 생물계 최초의 연구서 <산호초의 분포와 구조> 발표
1844년 <화산도의 지질학적 관찰> 출판
1846년 <남미의 지질학적 관찰> 발표
1856년 진화론을 쓰기 시작
1859년 '종의 기원' 발표
어떤 형태의 생물이 오랜 세월동안 환경에 맞추어서 서서히 모습을 변화해 간다는게 핵심

찰스 다윈 :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다!!!!"

기독교 : "신성모독이다!!!!"

1860년 영국 옥스퍼드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냐 아니냐를 놓고 영국 사회 각계 인사들이 모여서 논쟁을 벌임

다윈을 지지하는 측 : 찰스 라이엘, 앨프리드 월리스, 토머스 헉슬리 등

기독교 측 : 영국 성공회 주교인 윌버포스
윌버포스 : 그대의 할아버지쪽 선조가 원숭이냐, 할머니쪽 선조가 원숭이냐??
헉슬리 : 부도덕한 인간을 할아버지라 하느니 정직한 원숭이를 할아버지라 하겠다!!

결국 논쟁은 종결.

다윈은 진화론을 주장하면서 끝내 죽을때까지 창조설을 부정했다.
1882년 4월 19일
73세의 나이로 사망.
잉글랜드 성공회 성당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신과 과학의 대립이 한창 심할때
또 한명의 천재가 태어나는데...

5. 현대의 천재, 이론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879. 3. 14 ~ 1955. 4. 18)

독일제국 울름에서 전기 회사 사장이었던 유대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베르트 아인슈타인

초등학교 시절 유럽인들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로 상처를 받기도 했다는데
유대인들이 유럽의 전라도 같은 새끼들이라
어느 나라에서도 유대인 OUT!!! 외치는거임.

아무튼 이새끼는 학교에서 수학성적은 좋은데
군머식 전체주의 교육이 싫어해 반항적인 학생으로 여겨짐.

근데 이새끼도 대학교 성적을 보면 처음부터 특출나고 그런건 아니였다.

1900년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를 졸업
시민권 문제와 유대인 배척 문제로 인해 취직을 못하고
가정교사, 임시교사 등을 전전하다가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 후, 특허 사무소의 심사관으로 채용된다.
1905년 다섯 편의 논문들을 연달아 발표하는데
이때 4편의 논문들이
현대 물리학에서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이라는
두 축을 등장시키게 되는 혁명적인 논문들

참고로 아인슈타인은 광전효과로 노벨 물리학상 받음.

1933년 미국 방문 중에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집권자가 되어 미국으로 망명해서 생활하고
1955년 4월 18일 프린스턴 대학교 자택 근처의 병원에서 76세의 나이로 노짱따라 감.
뭐 다른 사항에 관련된 것들은 일게이들이 어느정도 다알거라 생각하고 생략한다.

아인슈타인은 유대교와 기독교 세계관의 야훼를 부정하였고,
자유의지의 존재도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믿지 않았고,
생명체의 사고는 주로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생전에 아인슈타인은 이런말을 했다.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또한 나는 물리적인 죽음을
경험하고도 살아남은 사람이란 것을 상상할 수도 없으며, 믿고 싶지도 않다.
유약한 영혼들이 두려움이나 터무니없는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진 나머지 그런 사고를 전도한다.
나는 삶의 영원성이 미스터리로 남은 지금 그대로에,
그리고 내가 현 세계의 놀라운 구조를 엿볼 수 있음에 만족하며,
또한 비록 작은 부분이기는 하지만, 자연에 스스로를 체화한 이성의 일부를 이해하는데
내가 전력투구해온 삶에 만족한다."
-아인슈타인, "Mein Weltbild" (1931)

1954년 철학자 에릭 구트킨트에게 보내는 편지


"내게 신이라고 하는 단어는 인간의 약점을 드러내는 표현이나 산물에 불과하다.
성서는 명예롭지만 꽤나 유치하고 원시적인 전설들의 집대성이며 아무리 치밀한 해석을
덧붙이더라도 이 점은 변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 1954년 1월 3일 편지

"인간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우주에 나타나 있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감성적인 확신이 내가 이해하는 신이다"

 

-아인슈타인


한마디로 우주를 초월한 존재만이 나의 신이다!!!

승자는 없다
과학과 종교 서로 대립되지만
종교는 절대 인간의 사회에서 사라질수 없고
과학은 문명의 이기로 계속해서 발전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분명 과학의 승리라고 믿는다. 눈에 보이는 실체일 뿐만 아니라
관점을 달리해서 본다면 이것도 하나의 종교가 됨.
이제 종교가 아니라 윤리와 도덕에 부합되는가가 문제일뿐

 

출처: 메르헴의 지식허브   https://meruem.tistory.com/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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