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知者不言 (지자불언) 言者不知(언자부지)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도덕경56장)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 무엇을 말한다는 것일까?
안다는 것은 단순한 앎이 아닌 것이다.
우주, 대지, 자연, 천하만물의 근본같은 근원적인 의문에 대한 앎,
근원적 생성원리의 지혜로운 앎을 말한다.
그것의 앎은 몇마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안다고 말한다면, 진정으로 그것을 안다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도>라고 말할 수 있으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덕경 제1장에 나오는 글이다.
즉, 도를 알지만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러니 '도를 알지만 도를 말하지 않는 것이다.
굳이 '도가 무엇이다' 말한다면, 그것은 도가 아닐 뿐더러.도를 모르는 것이다'
도덕경은 1장부터 이와같이 깊은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 비유와 은유로
인간과 자연과 우주를 노래하고 있는 詩인 것이다
'곡즉전(曲卽全) 굽은 것이 온전한 것이다'
'절학무우(絶學無憂)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어진다'
'不常賢(불상현), 현명함을 숭상하지 말라'
'天地不仁(천지불인), 천지는 인자하자 못하다'
도덕경 全篇에 등장하는 어찌보면 현대인들이 교육받은 상식에 반하는 구절들이다.
이 귀절들의 비유와 내포된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곧은 것, 반듯한 것은 영원히 유지 될 수 없는 것이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의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즉 有爲(유의)한 것이다
그러니 굽은 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것, 자연스러운 것이 항상성이 있다는 것,
그것은 無爲(무위)한 것, 그것이 온전한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설명한다 해서,
'굽은 것이 온전한 것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다.
다른 개념들도 유사하다
'도'의 레벨처럼 더높은 수준이 아닐지라도,
말로서 표현하기에는 나름대로 너무나 의미가 깊기 때문이다.
도를 무명지박(無名之樸) 즉 이름없는 통나무에 비유하기도 한다.
통나무에 이름이 붙여지고, 용도가 결정되면
그 통나무의 쓰임새는 그 용도로 한정되고
그 이전에 품고 있던 무궁한 가능성은 한 순간에 사라진다.
자연상태의 대리석 바위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무궁한 용도의 조각가능성을 가진 돌이
그 용도가 결정되는 순간 그 돌의 무궁한 가능성이 사라지고 제한되기 때문이다.
도는 이와같이 정의하고 설명하는 순간 이미 도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진실로 도를 아는 자는 도를 말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도를 설명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세상이 생기기 전부터 존재하던 태초를 있게 한
노자식 우주원리라 할 수 있기도 하다.
앞서 소개한 귀절들은 도덕경에 나오는 일부의 귀절들이다.
이처럼 도덕경 귀절들은 나름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굳이 설명하려 한다면 극히 일부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그러니 이 귀절들의 본디 의미를 제대로 안다할 수 없다는
노자의 경구가 천둥처럼 울리는 것이다
그래서, 동서고금에 1,600본이 넘는 해설서가 있다지만,
새로운 시각의 말씀(言)의 존재가 향상 있게 되는 것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동서고금에 과학자, 철학가, 명상가, 종교인들에게
무궁한 영감을 주는 도덕경은 단 5,000여자로 구성되어 있다
내 나름대로 이해하는 관점으로 볼때
'도가도 비상도'나 '지자불언 언자부지'가 다른 글귀처럼 보여도
앞서의 설명처럼 이런 생각으로 보면,
도덕경 全編(전편)에 걸쳐 일통하는 사유의 바탕과 사유방식은
동일내지는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도덕경판본은 여러종류(죽간본, 백서본, 왕필본...)가 있고.
대부분, 5,200여자의 왕필본이나 2,040여자의 죽간본과의 차이를 말하지만,
말씀의 반복이고 추가일 뿐, 그 차이는 크지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죽간본이면 도덕경으로서의 핵심은 다 표현되었다.
어쩌면 이보다 훨씬 적은 글자수로도 표현이 가능했지 싶다.
왕필본이 사족을 달아 늘어났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초간본에마저 중언부언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10만자로 이루이진 장자. 15만자로 이루어진 서서오경등에 비하면
얼마나 함축적이고 은유적인가?
52백만자의 8만대장경이 여러 핵심경전을 거쳐,
결국.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열반적정 16자의 설명과
이 경지에 이르는 수련과정의 지도서이고,
이것도 우파니사드, 힌두교'를 거쳐 불교에 이어진
신비의 외자 음절 옴'(OM,AUM)' 에 함축적으로 표현된다고 한다면
무리인가? 지나친 비약인가?
나는 도덕경을 읽을 때 항상 이점을 떠올리고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문자뒤의 뜻을 살펴 보고자 해왔다.
간결한 경구의 맛에 들었다고나 할까?
이것은 나름대로, 도덕경적 사유, 노자적 사유라 할만하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던, 言者不知일까?
함곡관 관령 윤희의 간청으로 도덕경을 남겨놓고,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한 노자의 심정이 이런 '言者不知' 심정이 아니였을까?
[노자와 융(이부영 저, 한길사]을 읽으며
문득...
2015년 6월15일
靑野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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