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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장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심우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철학.에세이.한시.기타자료/유익한 글모음

사표 던지고 돌아갈 고향도 없는 사람들에게

by 靑野(청야) 2019. 11. 12.
‘때려치워 버릴까?’
   
   직장인들치고 사표를 던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수십 번 던지고도 남았겠지만 이런저런 사정을 고려해 꾹 참고 넘어가는 것이 우리네 처지다. 그런데 그만두겠다고 마음을 먹자마자 바로 사표를 던진 사람이 있었다. 동진(東晋) 때 살았던 도연명(陶淵明·365~427)이다. 도연명은 민정기의 ‘유몽유도원’ 때 소개했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쓴 시인이다. 405년 11월,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41세의 도연명이 팽택현(彭澤縣)의 현령으로 부임한 지 80여일 되는 날이었다. 관청에 출근하자마자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다. 군(郡)에서 감찰관을 파견한다고 하니 의관을 잘 갖춰 입고 그들을 배알하라는 지시였다. 그 말을 듣자마자 도연명은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내 어찌 다섯 말의 쌀 때문에 그깟 시골뜨기 아이에게 허리를 굽힌단 말인가?(吾不能爲五斗米折腰)”
   
   그리고는 사직서를 제출한 다음 미련 없이 관청을 나와버렸다. 농사를 짓는 것만으로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가 어려워 어쩔 수 없이 출사(出仕)했던 도연명이었지만 마지막 자존심까지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이때 도연명이 ‘일신상의 이유로 회사를 그만둡니다’라고 휘갈긴 사직서는 두고두고 지식인들 사이에서 찬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이 바로 ‘귀거래사(歸去來辭)’다.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과격한 그의 행동을 보면서 사람들은 “배가 불렀지” 혹은 “믿는 구석이 있나 보네”라고 하면서 비난하지 않았다. 대신 가난한 삶을 향해 거침없이 발을 내디딘 그의 결단력을 응원하고 박수 쳐줬다. 그의 행동이 구설수에 오르는 대신 부러움이 섞여 회자될 수 있었던 것은 사직서의 내용이 누가 봐도 감탄할 만큼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의 경영이 악화되어 해고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퇴사였던 만큼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도 없었다. 벌써 다섯 번째 퇴사인 만큼 이미 그 업계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어 이직이나 재취업에 성공할 확률도 낮았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자리를 박차고 나온 도연명이었다.
   
   우리는 왜 날마다 사표 던질 생각을 하면서도 도연명처럼 ‘오불능위오두미절요!’를 외치지 못할까. 우리는 다섯 말이 아니라 겨우 한 말, 아니 한 됫박의 쌀이 아쉬워 꾹꾹 참고 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잘 살고 있는가. 혹시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엉거주춤 살고 있는 모든 직장인들에게 도연명이 선망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귀향 이후 도연명의 일거수일투족은, 걸음걸음마다 이야깃거리가 생겨났고 발 딛는 곳마다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도연명은 가난 속에서도 유유자적(悠悠自適)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준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도연명이 과감하게 사표를 던질 수 있었던 이유는 돌아갈 고향이 있어서였을까. 나도 고향에 물려받은 땅이 있었다면 도연명처럼 행동할 수 있었을까. 정년도 되기 전에 귀향, 귀촌했다는 사람들의 얘기가 들릴 때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러나 직장인들은 알까. 취직하고 싶어도 취직이 안 돼 절망한 사람들에게는 사표를 쓸까 말까 고민하는 것조차도 사치로 보인다는 것을.
   
   
   바람과 별과 오름의 섬 제주도
   
   김성오(50) 작가는 제주도 토박이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50년을 제주도에서만 살고 있는 진정한 제주도인이다. 그가 그린 작품에는 ‘오름결’처럼 거의 예외 없이 오름이 등장한다. 오름은 화산이 폭발할 때 가스나 불, 수증기가 분출되어 나오는 구멍 주위로 생긴 작은 화산체를 뜻한다. 제주도에는 용눈이오름, 거문오름, 다랑쉬오름, 새별오름 등 368개의 오름이 있다. 오름의 형태는 말굽형, 원추형, 원형, 복합형 등 다양하다. 제주도의 참모습은 오름 위에서 봐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오름은 제주도만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 다양한 오름의 모습을 김성오는 그만의 필치와 색감으로 오롯이 전달해준다. ‘오름결’에 나타난 오름들은 갈색·황색·녹색 등 다양한 색이 뒤섞여 편안한 파스텔톤으로 형체를 드러냈다.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색감이다. 그런데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맨 밑바탕이 온통 붉은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슨 이유일까. 제주도는 화산섬이다. 화산은 땅속 깊은 곳에 불과 에너지를 품고 있다. 화산이 품고 있는 그 강렬한 생명의 에너지를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바탕색에 붉은색을 칠했다. 화면 맨 뒤에 있는 해를 둘러싸고 있는 붉은색이 바탕 전체에 칠해져 있는 셈이다. 붉은색은 오름 생성의 근원이 되는 생명의 에너지다. 그 붉은색 위에 각각의 색을 칠한 뒤 날카로운 칼로 긁어내기를 반복한다. 오름과 길의 형태에 따라 무수히 반복되는 가느다란 선은 그 형태가 왜곡되거나 축소되면서 바람에 의해 깎이고 둥글둥글해진 제주 자연의 특징을 드러낸다. 긁힌 선 아래 보이는 붉은색은 제주도의 땅속 깊은 곳에서 아직도 불 같은 에너지가 꿈틀거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성오는 평생을 오름을 오르내리며 살았다. 눈을 뜨면 눈앞에 오름이 있었고, 저녁밥 먹고 산책을 갈 때도 오름 곁이었다. 작가의 아버지는 오름이 있는 초원에서 생계를 위해 ‘테우리’가 되었다. 테우리는 마소를 방목하여 기르는 목동의 제주 방언이다. 작가는 테우리인 아버지 곁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테우리의 삶이 넉넉할 리 만무했지만 그의 곁에는 항상 제주의 자연이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삼나무 숲과 밤나무 밭, 돌담 울타리 너머 펼쳐지는 초원을 놀이터 삼아 보낸 어린 시절은 결코 남루하지 않았다. 푸석푸석한 바위틈으로 강렬한 바람이 불어오고, 해 질 녘 소의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사라진 뒤 풀숲 위로 별들이 쏟아질 때면 그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감에 젖어 살았다. 가난했지만 안온했던 아버지의 품에서 잠들곤 했던 기억이, 그가 오래도록 제주의 오름과 평온을 화폭 위에 옮기면서 앞으로도 여전히 계속 붓을 잡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고향, 우리가 그리워하는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이 오롯이 담겨 있는 작품, 그것이 김성오의 오름 시리즈다.
   
   
▲ 장승업. ‘미산이곡’. 1891년. 종이에 연한 색. 126.5×63㎝. 간송미술관


   장승업이 그린 ‘향수’
   
   ‘미산이곡(眉山梨谷): 미산의 배 골’은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1843~ 1897)이 1891년에 그린 작품이다. 화면은 중앙에 서 있는 나무를 중심으로 좌우가 대조적이다. 좌측은 산과 집과 나무로 꽉 찬 구도인 반면, 오른쪽은 시원한 강이 여백을 차지했다. 산과 나무와 원경의 산봉우리에 칠한 푸르스름한 물감빛은 담박에 사람의 마음을 무장해제시켜 버릴 정도로 편안하고 산뜻하다. 여백이 강조된 오른쪽 강가에는 소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소년과 광주리를 머리에 인 아낙네가 보인다. 그 뒤로는 어부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는 배 한 척이 전부다. ‘미산이곡’은 장승업의 작품 중에서 가장 서정적인 울림을 주는 수작이다. 그림 속 장소는 정지용의 시 ‘향수’에서처럼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다.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이다. 정지용은 시의 각 연(聯)이 끝날 때마다 이렇게 적어놓았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의 향수의 대상은 고향이다. 장승업이 향수를 그렸다.
   
   상단의 제발(題跋)에 의하면 이 그림은 죽계(竹溪) 노인의 조카가 장승업에게 부탁해 미잠(眉岑)의 남쪽 골짜기에 있는 백부의 산장을 그렸다고 되어 있다. 골짜기 이름을 적은 부분이 삭제된 까닭에 그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죽계 노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백부를 위해 제발을 쓴 조카가 누구인지도 밝혀져 있지 않다. 굳이 그림의 내력이 적혀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죽계의 조카는 100여년 후에 이 그림이 죽계 집안을 벗어나 어느 미술관에 걸려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산장 주인과 조카의 이름 그리고 그림의 배경이 된 지역의 내력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다만 이곳에 대한 설명은 가히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답다.
   
   ‘미산은 우뚝하고 이곡은 그윽하다. 수석은 밝고 고운데,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로 가리고 덮었다. 그중 숨고 드러남은, 두서너 집뿐, 나귀는 풀 언덕에 풀어놓고, 닭은 대숲 바자에서 운다. 들밥 이고 가는 여인네 개를 끌고, 목동은 소를 탔다. 고기잡이 배 하나, 푸른 갈대 물가에 있구나. 몇 이랑의 돌밭에, 반쯤 향기로운 차 심었구나. 황홀한 그 경치, 진짜인가 그림인가. 오원의 필묘 또한 족히 자랑할 만하구나. 신묘년 4월’.
   
   동네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동네 이름을 ‘배 골(이곡)’로 지은 것을 보면 배나무가 많은 골짜기였을 것이다. 흐드러지게 핀 배꽃 위로, 달은 훤히 비추고, 은하수가 삼경을 알릴 때면 마을은 어떤 모습일까. 고려시대의 이조년(李兆年)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다정도 병인 양 하야’ 잠 못 들어 할 것이다. 이런 추억과 전설과 그리움을 간직한 곳이 고향의 이미지다.
   
   
   도연명의 낙향을 그린 귀거래도
   
   ‘미산이곡’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처음 본 장소인데도 왠지 낯설지가 않다. 왜 그럴까. 그것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온 낙향의 행적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도연명의 이름은 잠(潛), 자는 연명 또는 원량(元亮)이다. 호는 오류(五柳)선생인데 후세에는 정절(靖節)선생이라 불렸다. 그가 낙향해 살았던 마을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가 있어 스스로 오류선생이라 했다. 그는 천하 명산인 여산(廬山)과 파양호(罷揚湖)라는 호수가 있는 강서성(江西省) 심양(潯陽) 시상(柴桑) 사람이다. 그가 살던 동진 말기는 왕실의 세력이 약화되고 무력을 앞세운 신흥 군벌들이 서로 각축을 벌이던 시대였다. 세력을 잡은 군벌들에 의해 왕이 유폐되는 일은 다반사였고 살해당하는 일도 흔했다. 정치가 불안정하니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봉기가 끊이질 않았고 이민족의 침입도 빈번했다. 도연명이 모두 다섯 차례나 출사와 은퇴(隱退)를 되풀이한 것은 이런 어지러운 시대 상황이 한몫했다. 정치가 불안하거나 말거나,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거나 말거나 오로지 자신의 배만 채우면 된다는 식의 정치인들과는 그 결이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그가 사표를 던진 이유가 단순히 ‘자기 성질을 못 참아서’ 한 행동이 아니라는 얘기다.
   
   도연명이 사표를 던지고 ‘보무도 당당하게’ 고향집을 향할 때 그는 배를 타고 파양호를 건넜다. 그의 배가 가볍게 흔들리며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바람은 한들한들 옷깃을 스쳐갔다. 그가 탄 배가 저만치 보이는 집 지붕과 처마를 향해 다가갈 즈음, 어린 하인들이 서서 손을 흔들며 반가이 맞이했고, 자식들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서 있는 사람 중에는 들판에서 일하다온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아내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장면은 ‘연명귀은도(淵明歸隱圖)’ 혹은 ‘귀거래도’라는 이름으로 무수히 많은 화가들의 상찬을 받아 한·중·일 세 나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미산이곡’의 장면도 ‘연명귀은도’를 변용한 것으로 보여 익숙한 것이다. 그의 걸음걸음은 모두 화제(畵題)가 되었다. 그가 울타리 옆에서 국화꽃을 돌보는 장면은 ‘동리채국(東籬採菊)’으로, 국화꽃을 꺾다 문득 고개를 들어 먼 산을 바라보는 장면은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으로, 해가 어둑어둑 저물어갈 무렵,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대는 모습은 ‘무송반환도(撫松盤桓圖)’로, 술이 익자 머리에 쓴 갈건을 벗어 술을 거른 이야기는 ‘갈건녹주도(葛巾漉酒圖)’로 탄생했다. 이 모든 작품들은 도연명이 ‘길을 잘못 든 것이 그리 오래지 않았으니, 오늘이 옳고 어제가 그름을 깨달았네’라고 선언한 후 그 선언을 삶으로 실천한 전원시인을 찬탄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 출판된 제임스 케힐의 ‘화가의 일상’에 의하면, 도연명의 ‘귀거래사’가 관료의 은퇴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성 회화’로 자주 그려졌다고도 소개되어 있다. 제임스 케힐의 견해를 도연명이 수긍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정년 때까지 묵묵히 자리를 지킨 사람의 인생도 일찍이 젊은 나이에 자리를 박차고 나와 귀향한 사람 못지않게 위대하다는 의미를 부여한 점에서 ‘도연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규모가 훨씬 더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마음속의 고향이 진짜 고향
   
   무엇이 작가로 하여금 붓을 들게 할까. 고향의 힘일 것이다. 버드나무와 느릅나무가 서 있고 대숲 바자에서는 닭이 우는 곳. 그곳이 고향이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들밥을 이고 가고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고향이다. 그러나 그런 고향은 더 이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변화가 어찌나 빠르던지 아무리 그림같이 멋진 장소라도 10년이면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린다. 아마 길재(吉再·1353~1419)가 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라고 읊는 대신 ‘산천이고 인걸이고 도무지 찾을 곳을 모르겠네’라고 한탄했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편히 쉬고 싶은 고향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심리적인 공간이다. 우리가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는 이유는 그곳에 따뜻한 기억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김성오 작가가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행복했다고 기억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육지인들이 생각하는 제주도는 비행기 타고 가서 잠시 쉬었다 오는 휴가지일 뿐이다.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제주도이든 강원도이든 사람의 삶터는 비슷비슷하다. 다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장소로도, 잊고 싶은 장소로도 기억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사직서를 품고 다니는 그대여.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는 노랫가사를 잊지 마시고 용기를 내시기 바란다.


吾不能爲五斗米折腰!(오불능위오두미절요)

 

쥐꼬리 월급 때문에 허리를 굽히지 않겠다!

도연명(陶淵明, 365~427)은 동진(東晉)과 남조의 송(宋)나라 시대를 살면서 학인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상황에 놓였다.

도연명은 “군주는 만악의 근원이다”라며 무군론(無君論)을 펼쳤던 포경언과 비슷한 시대를 살았다.

그의 시대도 위진남북조시대에 속하는 만큼 정치적 불안은 학인과 평민에게 커다란 고통으로 다가왔다.
(포경언의 “군주는 만악의 근원이다” 중 )

도연명이 생존할 당시 동진은 다섯 명의 황제가 재위에 올랐다. 그 중 8대 간문제(簡文帝)가 경우 2년(371~372)간 자리를 지키다가 병으로 죽은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4명은 모두 자리에서 쫓겨나거나 살해당했다. 특히 9대 효무제(孝武帝, 재위 372~395)는 총애하던 장귀인(張貴人)에 의해 질식사를 당했다.(김창환, [도연명의 사상과 문학], 19쪽 참조) 이렇게 황제가 자리에 있지만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유력한 신하가 권력을 농단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도연명은 자신이 원했다기보다는 나이 드신 어머니와 가난한 집안 때문에 관직에 나섰던 것이다.

그는 ‘음주’ 제19에서도 29세에 벼슬에 나아가야 했던 사정을 읊고 있다.

“옛날에 오랫동안 굶주림으로 힘겨워하다 쟁기를 던지고 벼슬살이에 나갔지. 가족 돌보는 것조차 제대로 못해 추위와 굶주림은

나를 옴짝달싹못하게 했지. 나이는 30이 다돼가니 마음속으로 부끄러움이 많았지.”(이치수 역주, [도연명 전집], 179쪽 참조)

도연명은 추위와 굶주림으로부터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자 그동안 밀쳐놓았던 관직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하지만 억지로

나아간 관직은 결코 유쾌할 리가 없었다. 그는 어렵사리 얻은 관직으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고향으로 와버렸다.

출사(出仕)와 귀은(歸隱)을 되풀이하던 도연명은 41세(405년 8월)에 평택현의 현령이 되었다.

 

이때 두 가지 일이 생겼다. 첫째, 평택현의 상급 기관인 심양군(尋陽郡)에서 독우(督郵, 순찰관)를 보내서 직무 감찰을 실시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아전들은 도연명에게 감찰을 잘 받으려면 의관을 정제하라는 둥 독우를 마중하라는 둥 여러 가지를 요구했다.

둘째, 정씨(程氏)에게 시집갔던 누이가 무창(武昌, 후베이성 지역)에서 죽는 바람에 상을 치러야 했다. 도연명은 두 가지 일이

겹치자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관직을 내던졌다.

“나는 쥐꼬리 월급 때문에 허리를 굽히고서 향리의 소인배를 정성스레 섬길 수 없다!”(吾不能爲五斗米折腰, 拳拳事鄕里小人邪!)

 

唐(618-907)나라는 우리의 삼국과 통일신라시대에 해당되는 시기다. 唐詩라는 말에서 보듯, 詩문화가 무척 성행했었다. 李太白, 杜甫, 李商隱, 孟浩然, 王維 등, 기라성 같은 詩人들이 모두 이 때 사람들이다.

그러나 실제 淸나라 때 와서야, 全唐詩라는 책은 편찬되었다. 唐나라 2,200여명의 詩人의 48,000여수의 詩를 집대성해놓은 것이다.

300년이 채 안 되었던 唐王朝였음을 감안한다면 매우 엄청난 숫자다. 또한 시와는 다른 산문은 어떠했는가? 이 책이 나오고 얼마 뒤, 다시 당나라의 산문들을 모은 全唐文이 편찬되었데, 무려 3,042명의 文人의 18,488편의 산문들이 수록되었을 정도로,

그 기라성같은 작품의 폭이 넓었던 시대였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운문과 산문들이 많고 많다 보니 여러 流派가 뒤섞여 있었다. 시부문의 경우 田園詩派라는 유파가 있었다. 글자 그대로

田園에 묻혀 살면서, 그 정취를 노래한 시인들의 부류를 일컫는다. 당시 유명한 陶淵明(372-427)이 유파를 열었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물론 이때는 東晉이 무대였고, 천하가 어지러워 老莊으로 대표되는 道家思想이 성행했었던 때였다. 선비들은 초야에 묻혀 벼슬에

나서지 않았고, 소위 식자층들은 시국을 한탄하며, 술과 시로 나날을 보냈던 시기다.

陶淵明이 그 중심에 있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게다가 도연명은 자연을 좋아하고 屈己從俗(스스로를 굽혀 세속에 따름)을 워낙 싫어하였다. 그래서 벼슬세계에 받아들여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 憤世疾俗(세상에 울분을 느끼고 싫어함)하며 세상 벼슬을 멀리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대단히 많아 생활이 말이 아니게 궁핍하였고 보다 못한 친척이 말단 관직 하나를 알선해 주었던 彭澤令이라는

자리로 지금의 면장쯤 되는 자리였던 모양이다. 봉급은 쌀 다섯 말이었고, 그의 나이 마흔 하나였던 때다. 호구지책을 위해 잠시 천성을 굽혀 응하기는 했지만, 도무지 할 짓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집무는 내팽겨 두고 매일 술이나 마시며 자연을 노래하며 살았다.

이렇게 미련 없이 구호와 같은 사표를 던지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부임한지 두 달 남짓되던 때의 일이다. 집에 돌아와 자연을 벗 삼으면서,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읊은 것이, 바로 그 유명한 ‘歸去來辭(귀거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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