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집앞에 그많은 학교를 두고, 왜 이런학교에 다녀야 해?"
부산 서남쪽, '가덕도'에 위치한,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첫주를 보내고, 집으로 데려오는 차속에서 우리 꼬맹이가 탄식(?)한 말이다.
입술이 갈라지고, 피곤한 모습이 역력한 녀석을 보니, 그때까지, 공부는 자포자기하다시피 제멋대로 살아온 녀석이 꽤나 힘들든 1주일을 보냈나 보다. 그말을 듣는 순간, 가슴밑에서부터 뭔가 치밀어 오른다.
초딩 4학년,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충격과 그 때쯤부터 접어든 사춘기 때문에 극심한 정신적(?) 고통속에서 방황하기를 3년여, 급기야 중학 2학년 성적이 35명중에 35등을 기록했다. 공부는 완전포기, 부산서 서울로 전학온 촌놈(?)이며, 공부는 꼴찌생이라고 학교친구들도 거의 없었고, 집에오면, 티비와 비디오로 시간을 보냈다. 역사를 제외한 전과목이 '가' 아니면 '양' 이였다. 도저히 서울서 공부 못하겠다고, 저거 누나를 괴롭혀, 다시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누나가 직장까지 옮겨가며 뒷바라지한다고 부산으로 따라간 것이다.
녀석이 중학 2학년때, 나도 부산으로 직장을 옮겼다. 꼬맹이 옆에서 직접 겪어보니 녀석의 상태가 너무나 심각하다. 하지만, 3학년이 되자, 초봄이 되면 언땅에 어렴풋이 생기가 돌듯, 사춘기가 서서히 벗어나는 지, '이래안되겠다', '공부를 해야겠다' 는 자각이 싹트나 보다. 하지만, 학교수업, 학원수업을 정상적으로 따라갈 수 없었다. 우선 수학.영어에 대한 자신감회복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부산대 교수인 고딩동기의 제자를 소개 받아, 전담 과외선생으로 수학을 맡기고, 영어는 동네 학원에 개인과외를 맡겼다. 수학은 거의0점상태('가' 수준), 영어는 '양' 수준에서 다시 시작한 것이다.
중학교 졸업이 가까워지자 학교성적이 조금 오르긴해도 82~85% 수준이다. 100명중 82~85등 수준이란다. 이 정도면, 일반고등학교를 가기 힘들다. 우선 거주지 인근 고등학교 배정에서 밀려날 것이고, 가더라도 아마도 3~4차에도 밀려나서 4~5차에 가서 배정될 것이다. 이때는 부산시 어느 구석 미달 학교에 배정될지 모른다. 날이면 날마다 아침을 챙겨 보내고 저녁을 챙길 것인가? 중학교때는 딸아이가 맡았지만, 고등학교 3년을 또 누가?, 나로서는 요리할 능력도 관리할 능력도 안되고 자신이 없었다. 의욕은 생길 수 있지만, 아마도 불가능 한 일이였을 것이다. 중학교 3학년 봄부터 이문제로 고민하다, 길이 대안학교밖에 없을 것 같아서, 전국의 대안학교를 거의 다 다녀보았다.
당시 공립 대안학교는 전국에 6~7곳. 일반계고등교육이 불가능한 학생을 대상으로, 그야말로 국가에서 지원하고 관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학교였다. 대신에 사립대안학교는 많이 있었다. 대부분 기독교, 불교, 원불교등에서 운영하는 대안학교이다. 민간단체에서 운영하고 있는 대안학교도 있다. 문교부 학력인증이 되는 학교도 있고, 안되는 곳도 있다. 이런 학교는 검정시험을 치러야 한다.
사립대안학교별로 나름대로 입학조건이 까다롭다. 예를들어, 포항 한동고등학교는 한동대 캠퍼스에 붙어 있는 부설대안학교다. 이학교는 기독교 재단으로, 부.모. 학생이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어야 입학조건이 된다. 주변에 수소문하니, 부모가 목회자, 전도사등으로 대외, 해외활동을 할 경우, 고등교육이 소홀하기 쉬우니, 이를 배려(?)한다고 입학이 다소 용이하다 한다. 여기도 수요가 있을 터이니, 경쟁이 있을 것이다. 조건을 알고보니 언감생심(焉敢生心) 포항까지 헛걸음을 한 것이다.
늦둥이한테는 대안학교 마저 보낼 자격마저도 없다 싶어, 다시 여러모로 기숙사 있는 학교를 수소문 하는 끝에 '백민호 동기' 의 소개로 가덕도에 있는 모고등학교에 지원을 한 것이다. 월요일 등교, 週中은 기숙사생활을 하며, 금요일 퇴교하는 시스템이다. 우여곡절끝에 이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 대부분 우리꼬맹이 비슷한 사정의 학생들이 지원한다. '꼴찌들만의 모임' 이라 할 만하다.
금요일 오후에 녀석을 학교에서 데려오고, 월요일 아침에 학교로 데려다주기도 하거나, 금요일 하교는 몇시간이 걸려도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하고, 월요일만 데려다 주기도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려면, 버스2번, 지하철 한번, 대기시간 포함 2시간~2시간 30분정도 걸리니, 데려다 주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길 3년이 다 되간다. 산내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부산 정관 저거누나 집옆에 얻어둔 전세집으로, 그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산내로... 끝없는 세월과의 싸움이지, 언젠가는 끝나겠지, 선택의 여지 없으니 수행자처럼 묵묵히, 기사노릇을 했다
''고1때는 나가 선민의식(?)이 젖어 있었던 것 같다. 그때문에 정말 코피터지게 공부했다"
"??" 무슨 소린가해서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나는 저들보다 차원이 다르다. 그런 나가 저들보다 공부를 못하면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코피 터지게 열씸히 공부했다고, 수능시험 전날 기숙사 퇴사한다고 짐쫌 실어달래서 모처럼 하교를 시켜주는 차안에서 녀석이 모처럼 말문을 연다. 학교를 가보니, 서울이고 부산이고 전학다니며, 그 또래 기준으로 보면, 산전수전 다 겪었으니, 공부는 못해도 보는 것이 많았던지, 지눈에는 너무나 애들 수준이 말이 아닌 것이다. 그녀석 말대로 코피 터지게 공부했다면, 결과가 좋을 수밖에.
중학교때와는 달리, 1학년 1학기 때부터 전교에서 수학.영어 빼고 1~2등급이다. 수학.영어는 3~4등급수준, 개인과외가 아직은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학생들의 수준이 그나마 낮아서 그정도 등급수준이지 싶다. 하지만, 2학년 들어서 부터 효과과 서서히 나타났다. 우리 꼬맹이 한테, 미적분은 불가능 하지 싶었는데, 어느듯 미적분.확율등의 시험에서 조금씩 성적이 오르기 시작한다. 영어도 상당히 성적이 오른다. 생활기록부도 선생님들이 상당하게 평가해 주고 있다. 담임과 상담 한번 안하고 방치하였는 데, 입학 첫주만에 '내가 집앞에 그많은 학교를 두고, 왜 이런학교에 다녀야 하나?' 한 이후 일체의 언급이 없더니, 내 걱정과 다르게 후진(?)고등학교 입학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정신차리고 철이드는 계기가 되면서, 학교에서 멘토로 자청하여 또래들에게 멘토역활도 하면서, 그런대로 착실하게 고과과정을 적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성적이 오르자, '이른바 인서울(In Seoul), 즉 서울권 소재대학입학' 도 가시권에 들어온다. '인서울 대학' 에 응시할 희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수능을 치르는 정시모집에는 경쟁력이 없어 보인다. 치열하게 공부하는 것을 본적이 없는 나로서는 걱정이 앞설 수밖에. 3년동안, 금요일 집에 와서 주말내내, 공부라고는 하는 것을 본적이 손꼽을 정도이니 무슨 경쟁력이 있겠는가? 자기 딴은 '평일 학교.기숙사에서 코피터지게 해서 주말이면 집에 와서 쉰다' 고 강변(?)하지만, 영 신뢰가 안간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에 입학 전후로 기억되는 데, 녀석에게,'In seoul, 대학에 합격하기만 하면 '문정동 법조단지에 얻어둔 오피스텔을 사용하게 하겠다' 고 구두약속을 했다. 설마 인서울 성적이 되겠어? 그냥 동기부여 목적이였다고 했지만, 딸래미한테 엄청 나무람을 당했다. '학생에게 무슨 그런 오피스텔을 혼자 사용하게 하느냐? 너무 심했다. 그냥 원룸얻어주면 되지' 라고.
하지만 녀석이 수시로 다짐을 해 올 때마다 애초 약속을 확인해주기를 수차하다가 정착 3학년이1학기 성적을 보자 'In Seoul" 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닌 것 같에서 슬그머니 약속파기냄새를 풍겼다가, '아빠가 여차저차하는 것 믿고, 얼마나 코피 터지게 공부했는 데, 지금와서...' 하는 바람에, (속으로는 일단 합격하고 부터 다시 생각하지 뭐..) 또 약속이 유효함을 다짐해 줄 수 밖에.
마침내, 수시입학전형시기가 다가왔다.
9월중순의 일이다. 꼬맹이 1학년 2학년 때만해도, 까마득하게 멀어만 보이든 대학 입시, 마침내 코앞에 닥친 것이다. 수시모집응시 접수는 각 대학입학처에서 공고된 응시지침대로 정해진 기간에 인터넷상으로 서류를 접수한다. 학교마다 응시조건이나 전공(학부나 과)별 모집인원, 경쟁율이 틀리다. 수많은 학교들중에, 3학년 2학기 중간시험을 치르고 받아든 성적표를 기본으로, 최대 6대학을 지원할 수 있다.
6개대학과 전공할 분야를 정하고 지난해 경쟁율, 올해 모집인원, 추가모집을 고려하여, <안정권>, <적정권>, <도전권> 대학을 2개씩 한정하기로 하였다. 꼬맹이 저거 누나, 저거 매형, 꼬맹이 3인이서 골을 싸매고 모든 작업을 해놨기에, 나는 추인만 했다. 문과를 지원했기 때문에 딱히 의견을 말하기 곤란하다.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정한 지원대학은 학교에서 인터넷으로 선생의 지도를 받아 인터넷 접수를 하는 모양이다.
"빈아, 쌤한테 물어봐라. 여차저차 대학이 안정권인지 어떻는지" 마지막 접수전에 꼬맹이한테 넌즈시 알렸다.
"샘이 인서울 사례가 없어서, 어떻다고 말하기 곤란하다" 했다고 전한다.
우여곡절끝에, 6개대학에 지원서를 냈다. 모든 대학에 떨어져도, 추가모집이 4~5차나 있으니, 어쨋튼 그 중 1개대학에 갈 수 있겠지? 막연한 희망을 걸고.
원하는 대학, 원하는 전공이 문제다. 원서를 접수하고 부터 발표가 띄엄띄엄 이어오다, 2018년 12월14일 모든 대학이 수시합격자 발표를 마무리한다. 그때까지 느긋이 발표를 기다려야 할지, 안절부절 해야할 지, 종잡을 수 없다. 전혀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대학에 떨어지면 수능시험을 쳐서 가거나, 재수를 해야한다. 나로서는 '盡人事待天命'의 심정으로 기다리는 수밖에, 하지만, 당사자인 녀석은 속이 지극히 타는 모양이다.
"합격하게 해주세요, 제발요. 바른 생활 그 자체가 될께요'
원서를 접수하고 나서 녀석이 카카오톡 상태메세지를 올렸다. 간혹 녀석의 심리상태를 확인한다고 카카오톡 메세지를 확인하고 캡쳐해 두곤했는 데, 녀석의 이메세지를 보는 순간, 무언가 잠시 북받쳐 오른다. '내가 집앞에 그많은 학교를 두고, 왜 이런학교에 다녀야 하나?' 한탄으로 내 가슴을 저미게 하더니 또 한번 가슴을 울린다. 얼마나 간절했으면...그럴만도 하다. 애처롭기 그지없다. 꼭 합격통보를 받아야 할 텐데...
복수로 대학에 합격하면 어느 한 학교를 선택해야 한다. 원하는 대학에 바로 합격이 안되고 추가 모집대상이 될 경우에는 다른 합격한 학교에 일단 예비등록을 하고, 추가모집대상이 합격으로 바뀔 경우, 원하던 대학교에 등록여야 한다. 이미 예비등록한 학교는 취소하여 예비등록비를 반환는다.
딸아이, 사위, 꼬맹이에게 모든 것을 맡겨도 최종 추인을 위해서, 진행을 관망하고 여차하면 괘도수정을 위해서, 나도 열씸히 대학별 사이트를 뒤지고, 언론기사를 체크하며 공부를 해두었다. 이 나이에 이 무슨...
이후로 수시로 녀석의 심리상태를 체크한다고 녀석의 상태메세지를 들여다 보는 데, 녀석은 이 메세지를 자주 바꾼다. 부자간 대화가 진중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니, 나로서는 상태메세지를 들여다 보며 녀석의 속마음을 짐작하는데 참고한다. 녀석의 심리 변화를 수시로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도 발동한다.
'즐거운 나의집'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과거를 반복한다-조지 산티아나'
'효율적인 삶' ...
수시원서를 내고는 초기의 불안정하고 간절함이 절절하던 상태가, 주변 친구들이나 학교 쌤, 과외쌤등 관련인사들의 의견이나 조언을 듣고서 그런지, 많이 안정이 되어 가는 느낌이다. 카톡 상태메세지에서 여유로움을 느껴진다. 무엇이 '효율적인 삶'인지, '즐거운 나의 집'은 지금 이 순간인지, 희망인지...
아득한 옛날에는 나로서는 꿈도 꿀수 없는 환경이였고 시기였다. 대학에 떨어지면, 농사짓는 아버지를 도와 농부가 되는 수 밖에. 합격해도, 너무나 가혹한 환경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일체의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이 암담하고 미래가 어두워서 그랬는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불경, 도덕경, 실존주의, 허무주의(?) 철학서나 책들, 입시와 무관한, 그 나이에 참으로 무거운 주제의 서적들을 탐닉한 기억이 난다. 아직도 그영향이 남아 있다.
녀석도 무언가 간절함에 목매달지만, 그것에 짓눌리지 않고, 이런저런 자료를 뒤져보고 나름대로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녀석에게 다가가, 뭔가 애기를 해주고, 보듬어주고 싶지만, 기회가 오지 않는다. 평소 아빠와 대화자체를 기피하여 왔기 때문이다.
'I believe I can fly
수시발표가 시작되기 약 한달을 남겨두고, 녀석의 상태 메세지가 바뀌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기다리겠다는 다짐인지? 자신감인지?
수시원서를 접수 할 때쯤부터 부쩍 성숙해지고 아빠에게 대화의 벽을 스스로 허물며 다가왔지만, 이전의 예로볼 때, 녀석이 쑥스러하거나, 짜증낼 터이니, 대놓고 물어 보기 뭣하다, 그저 짐작만 하고 조심스레 지켜볼 뿐이다. 상태 메세지는 계속 바뀌었다. 합격자발표를 기다리며 마음이 불안정하다는 증거이리라. 꼬맹이에게나 나에게나 참으로 고통스런 행보의 결말이 긍정적으로 나타나릴 기대 하지만, 어찌될지.
수시발표의 마지막은 12월14일에 이루어진다. 추가 모집은 그 이후에 수차에 걸쳐 이루어지기 때문에, 개인적인 학교 선택의 완료는 12월 말이 되어야 끝이 난다. 그전에 몇몇학교는 발표를 시작했다. 이 때까지는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잠정적이다. 합격으로 통보받으면, 타대학 합격이나 추가모집 합격여부에 따라 학교 선택이 달라진다. 추가모집대상이 되어도, 합격에서 결원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역시 타대학 합격이나 추가 모집대상이라면 학교선택이 달라진다. 입시접수에서 부터, 학교 행정업무에 이르기까지 복잡도가 장난이 아니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다른 나라대학들은 는 어떻게 하는 지 궁금하다
11월이 들어서자, 마침내, 우리 꼬맹이도 잠정적(?)으로 2곳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모든게 불확실한 상태에서 첫 학교 합격을 확인하는 순간 모든 가족들이 만세를 부를 듯이 기뻐했다. 일단 '인서울 목표는 달성' 되었기 때문이다. 꼬맹이의 간절한 소망이 일단 이루어졌기에 내심 참으로 다행이고 기쁘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2번째 대학이 합격하고부터는 '인서울'은 당연한 듯이, 첫합격의 감동은 반감된다. 간사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아빠 내가 대학가면, 용돈은 알바해서 벌어쓰겠다." 며칠전 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꼬맹이가 한 말이다.
"안그래도 된다. 건강하고,공부만 열심히 하면된다" 했더니,
"2000년 부터 19년동안, 나를 키운다고, 엄청 돈이들어갔을 터이니, 양심이 있으면 용돈은 벌어써야 마땅하다"
비록, 뻥이 될지라도, 그 마음씀씀이가 기특하다.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만큼 성숙해지고 있는 중이라 생각하니 기쁘기 한량없다.
우리 늦둥이가 지난 가을에 18세, 주민등록증도 나왔다. 이제부터 그녀석이 갈 길이 더욱 바쁘고 부족한 점은 너무 많지만,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참고, 절제하며 그 녀석말대로 코피 터지게(?)) 공부하고, 노력하여 온 과정을 지켜보면서,
''I believe he can fly!'
앞으로 녀석에겐 비상할일만 남았다고, 비상할 수 있을 것을 것이라 믿는다. 이제 아기새가 둥지를 떠나듯, 20년 가까이 품어온 늦둥이, 이제 내품을 떠날 날이 가까워 온 것이다.
늦둥이에 대한 기록도 무리 할 때가 되었다.
동기 홈페이지부터 카페에 이르기까지, 그러니까 2000년부터 9년 동안 늦둥이 양육기를 써 온 것이다. 양육기는 총102회째다. 마지막 102회는 대학 입학을 기록하며 마무리 지을 계획이였으나, 욱조성이 명명한 '가덕도 프로젝트' 목표인 'In Seoul ' 을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동안 10년 가까이, 순전히 개인사인 우리 '늦둥이 양육기'에 관심과 성원을 보내준 동기들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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