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일이 다가오는 모양이다.
이때쯤이면, 선사들의 말씀이 되새겨진다. 겸허히 되새겨지는 것은 나 자신으로서도 무척 편하고, 바람직스러웁게는 데, 요놈의 되새김중에 항상, 의문이 씹히는 데야 나로서도 어쩔 수 없네. 뒤틀린(?) 위장이 그나마 약하니, 그냥 넘길수도 없고....
돈오점수(頓悟漸修)!, 돈오돈수(頓悟頓修)!
[근래의 불교역사에서 깨달음의 문제, 즉 ‘돈오돈수 돈오점수’ 논쟁만큼 치열하게 전개된 논쟁도 없을 것이다. 깨달음(인식)과 수행(실천)의 입장과 관련해 치열한 논전을 벌였던 돈점논쟁은 1981년 당시 조계종 종정이던 성철(性徹 1912~1993)스님이 <선문정로(禪門正路)>를 통해 이 문제를 끌어냄으로써 달아올랐다. 다시 말하면 ‘돈오점수와 돈오돈수(頓悟頓修)’의 논쟁은 성철 스님이 '보조(普照)국사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가 선문에서 바른 길잡이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역기능을 했다'고 지적하면서 제기됐다.
그 이후 이 주제에 대해 불교계 내외를 막론하고 많은 관심과 논의가 이어졌다. 논쟁은 대개 세 갈래로 나뉘고 있다.
첫째는 성철 스님의 돈오점수에 대한 비판을 재비판하면서 돈오점수설을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보조사상연구원측의 입장을 들 수 있다.
둘째는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설을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해인총림측 스님들의 입장이다.
셋째로는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각각의 입장이 가진 근본 취지를 최대한 받아들여, 당면한 한국불교의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실마리로 삼고자 하는 박성배 교수의 ‘돈오돈수적 점수’설의 입장이 있다.
“스스로의 불성을 깨달은 뒤에도 자기 속에 배어 있는 습기를 수행으로 닦지 않고는 깨달음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돈오점수론에 대해 “깨달음 뒤에도 닦을 번뇌가 있다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다”는 돈오돈수론
성철 스님은 돈오점수사상에서 ‘돈오’는 해오(解悟 ? 도리를 깨닫는 것)인데, 이는 곧 지해(知解, 知見解會의 준말로 思量分別에 의한 지식을 말한다. 우리말로는 ‘알음알이’ 정도의 뜻을 지니고 있다)라고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돈오돈수의 돈오는 해오가 아닌 궁극적 깨달음인 증오(證悟)요, 미세망념(微細妄念)마저 끊어진 완벽한 깨침인 구경각(究竟覺)이라는 것이다. ] (이상 출처: http://blog.daum.net/togulnet/4830790)
이른바 깨달은 성현들의 말씀에 새파란 속세인이 어쩌구 저쩌구 토를 달고, 시비거리같은 어설픈 논리를 풀어헤친다는 게 영 뒤끝이 캥기기는 하다만 어쩌겠는가? 이른바 선각자들의 깨달음이 보편타당한 것이라면, 마땅히, 시비가 없어야 할 터인데,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있는 모양, 그러니, 그렇다고 생각이 드니, 부뚜막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고양이 심뽀가 또 발동하네....
도대체, 깨달음이란 무었인가? 무엇을 깨친다는 것인가? 도리란 무엇인가? 완벽한 깨침이란 어느 수준의 깨침인가? 속세인의 마음속엔 우선 이런 원초적인 의문이 앞선다.
조금도 결함이 없는 완전한 모든 진리를 문득 깨닫는다는 '원실돈오(圓實頓悟)' , 완전(完全)히 얻은 마지막 깨달음이 '구경각 (究竟覺)'이라는 데, 완전히 얻는 마지막 깨달음이라는 게, 그 깨달음의 대상이라는 게, 俗人의 입장에서, 鐵人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궁금하다.
그리고 비록 완전히 얻는 마지막 깨달음이라 할 지라도 그 깨달음의 수준이라는 게 천편일율적인 것이 아닐진 대, 그 수준 또한 궁금하기 그지없다. 조금도 결함이 없는 완전한 진리라는 것도 가당찮지만, 그 진리를 깨달았다면, 제대로 깨달았다면, 그 깨달음의 수준 또한 궁금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가사, 그게, 그 대상이라는 게, 인간의 삶의 근본도리라던지, 삼라만상, 만물의 생성과 성장하고 소멸의 원리일지? 아니면, 대우주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것일지? 만물의 이치를 깨치는 깨달음이라 치자. 그러면, 그 깨달음의 수준 또한 있지 않겠는가?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만유현상을 일통하는 더 이상 의 깨달음의 수준이 필요하지 않는 궁극의 깨달음일 터이다. 그러므로 그 깨달음을 얻었다면, 과히 '완벽한 깨침'이라 할 만하다". 성철스님이 말한 '구경각'이 이런 수준일까? 만물의 이치를 깨닫거나 만유을 일통하는 그런 수준일까? 아니면...
깨달음을 얻었다하여도, 그 깨달음이라는게, 유한한 생명을 가진 육체적 한계와 제약조건을 완전히 뛰어넘는 그런 수준은 아닐 터이다. 다시말하면, 아무리 깨달음의 수준이 極高하다하드래도, 깨달음의 대상은 인간과 무관할 지는 모르지만, 그 깨달음의 주체 즉 깨달은 자는 육체를 가진 인간의 몸으로 나타나는 이상, 육체와 무관할 수 없는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게, 여러 도리중의 하나를 깨친 수준일 수도 있고, 궁극적인 도리일 수도 있겠으나, 궁극적인 진리를 깨친 수준이라하여도, 그 깨침은 완전할 수 없는 육체를 통해, 발현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하지 않을 까?.
궁극적인 깨달음, 지고한 깨달음을 얻는 다면, 그 깨달음 자체만으로는 더 이상의 깨달음을 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만약에, 깨달음을 얻은 후, 그 깨달음의 수준을 높혀야 하고, 깨달음을 유지하기 위해, 번뇌와 씨름하여야 한다면, 그 깨달음이 진정한 궁극의 깨달음이 아닌 것은 자명하다.
다만,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었느냐?' 하는 것이 요체인데, 궁극적 깨달음을 얻었다하여도, 깨달음의 주체가 육체를 가진 인간인 이상, 깨달음을 높이기 위한 수행은 아니라 할지라도, 육체를 다스리고, 육체적 제약을 극복해나가가 위한 딲음은 부단히 이루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깨달음 뒤에도 닦을 번뇌가 있다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는 돈오돈수론의 요체는 육체적 제약과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궁극적 깨달음의 수준, 깨달음의 본질을 말함이었을 것이고, 육체적 수습과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육체적 딲음이 필요한 것은, 육신없는 깨달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깨달음을 얻은 육체라 할지라도 생명유지의 차원에서 끊임없는 다스림과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불성을 깨달은 뒤에도 자기 속에 배어 있는 습기를 수행으로 닦지 않고는 깨달음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돈오점수론은 이점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였을 까? 그렇다면, 어찌보면, '돈오점수' 식 깨달음은 인간적인 깨달음(?)의 수준이라 할 만하지 않는가?
돈오돈수식 깨달음은 '궁극의 깨달음'만이 '진정한 깨달음'이고, 그 깨달음의 수준은 궁극적이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다는 것인데, 과연 그런 수준에 올랐느냐?, 그런 궁극의 깨달음을 얻었느냐?, 그런 수준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긴 하나, 깨달음 자체만을 두고 볼 때는 보다 본질적이라 할만하다 하겠다. 깨달은 후에도 번뇌가 있고 없고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인 이상, 육체적 제약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뿐, 이는 진리 자체, 궁극적인 깨달음 자체와는 별개의 사안일 게다.
달마의 면벽9년, 성철스님의 10년의 장자불와등의 수행의 결과로 궁극적인 깨달음을 가져왔느냐 아니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수행의 수단, 수행의 강도나, 수행의 기간등이, 깨달음을 이끌어낸 요인은 되나, 깨달음 자체, 궁극적 깨달음 자체는 아닌 것이다.
성철선사의 말씀은, 장자불와 10년의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하지만, 자신이 얻은 깨달음이 궁극적인 것이나 완벽한 깨침이던 아니던, 그것과는 무관하게, '궁극의 깨달음과 그 수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함이 아니였을까?.
이에 비해,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완성해 간다는 돈오점수식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깨달음이, 돈오돈수식개념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수행을 계속한다는 것이, 그 깨달음이 중간과정의 깨달음이라서, 더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양인지, 얻어진 깨달음이, 육체적 한계와 제약조건 때문에 흐려지고 퇴색되는 것을 막고, 이미 얻어진 깨달음을 그 수준에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인지 아리송기는 하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더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을 계속하는 것이라면, '이런 깨달음은 궁극의 깨달음'이 아니라는 성철선사의 지적은 지당하다고 봐야 할 터.
돈오점수식의 깨달음이 궁극적 깨달음이라 할지라도, 수행을 하지 않으면, 번뇌가 쌓이고, 흐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은, 궁극적 깨달음이 육체속에서 유지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인 데, 유한한 생명인 이상, 그 육체적 딲음이 필요하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하자가 없어 보인다. 육신없는 깨달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성철선사의 말씀대로, 궁극적인 깨달음은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딲을 번뇌가 없어야 하는 것이 이상적인 깨달음이겠지만, 그런 깨달음이라 할 지라도, 깨달은 당시의 수준대로 영원히 지속되기를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서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궁극의 깨달음을 얻는 다 하여도,깨달음의 수준이 어지러워짐이 없다면, 어찌 그를 인간의 몸이라 하겠는가? 인간의 몸이 아니라면은 궁극적인 깨달음이 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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