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의 칠비(法華七譬) 혜량 저 / 법화경 입문 /수미산 1998.11.
법화경에는 매우 알기 쉬운 구체적인 수많은 비유가 설해져 있습니다. 우리들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남에게 알려주고 싶을 때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지요. 마찬가지로 어느 시대나 우화(寓話)는 인간의 삶이나 인생의 지혜를 가르쳐 주는데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법화경에서 뛰어난 비유가 쓰여지고 있는 것도 묘법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부처의 한없는 자비와 자유자재로 발휘하는 지혜의 표현입니다. 법화경의 칠비란 다음과 같은 일곱가지의 이야기를 말합니다.
삼거화택三車火宅의 비유(비유품 제3)
장자궁자長者窮子의 비유(신해품 제4)
삼초이목三草二木의 비유(약초유품 제5)
화성보처化城寶処의 비유(화성유품 제7)
빈인계주貧人繫珠의 비유(오백제자수기품 제8)
계중명주髻中明珠의 비유(안락행품 제4)
양의병자良醫病子의 비유(여래수량품 제16)
이 일곱가지의 비유속에 [장자궁자의 비유]와 [빈인계주의 비유]는 법을 이해하고 깨달은 제자들이 설하는 것이며, 이것은 법화경의 회좌에서 스승과 제자의 마음의 교류가 드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입니다. 또한 부처의 지혜를 체득하고 진심으로 감동했을 때는 우리들도 그것을 자유자재로 비유를 사용하여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 예를 들어 일곱가지의 비유의 그 내용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개삼현일을 나타내는 [삼거화택三車火宅의 비유]
어느 나라에 크고 오래된 대권에 사는 부자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대궐에 불이 났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것도 모르고 열심히 놀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아이들을 집 바깥으로 피신시키기 위해 아이들이 갖고 싶어 했던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가 있으니까 나와서 보라고 소리치자 아이들은 앞다투어 집을 나왔습니다. 부자는 아이들에게 양과 사습과 소가 끄는 수레보다 훨씬 좋은 [대백우거]를 주었습니다. 이상이 대략적인 내용입니다만 이 비유속에서 대궐은 현실의 세상을, 불탄집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은 고뇌에 사로잡힌 중생들을, 부자는 부처를 나타냅니다. 또 아이들은 유혹한 수단으로 쓰인 세가지 수레는 삼승(성문·연각·보살)의 가르침을 나타내고 실제로 주었던 대백우거는 일불승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이 비유는 부처가 삼승의 가르침을 설한 것은 방편이고 부처의 본의(本意)는 모든 사람을 성불시키는 일불승(一佛乘)의 법을 주는 것이라는 [개삼현일]의 법리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법화경비유품 제3에 설해져 있는 비유의 이야기로 현실의 세계는 마치 공포에 휩싸여 불타는 이 저택처럼 재난과 다툼(전쟁)이 끊이지 않고 고난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장자의 아이들의 천진하게 놀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은 그 로뇌의 세계를 찰나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기서 부처님의 광대한 자비는 현실의 괴로움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모든 고난을 해결하기 위한 법을 방편(능숙한 예)을 들어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선 성문·연각·보살의 삼승(양거·녹거·우거의 비유)을 나타내서 유인하고 그 보다도 최고의 행복의 경애인 일불승(대백우거)을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이것이 개삼현일입니다) 이 대백우거는 높이와 사방이 5백유순(약 3천 500km)이고, 금으로 된 바퀴, 은으로 된 마룻대, 금으로 된 줄, 팔만사천개의 보석방울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 안에는 모든 부처와 보살이 계시며 부처는 일불승(南無妙法蓮華經)을 수지한 우리들을 이 훌륭한 대백우거에 초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대백우거를 타고 삼세 영원히 이 끝없는 대우주를 자유자재로 돌아다닐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삼거화택의 비유를 영해했다는 비유의 글 [장자궁자長者窮子의 비유]
부처가 개삼현일의 법문을 삼거화택의 비유로 설하자 수보리·가전연·가섭·목건련 등 사대성문이 그 비유를 요해(了解)했다는 요지를 비유의 형식을 들어 설하여 말씀드리는 곳입니다. 옛날의 어떤 장자의 아들이 어려서 가출하여 타국에서 가난 불안 초조 등의 괴로움의 생활한지 50년 간이 경과했을 무렵에 자기자식을 찾으며 어떤 성에서 머물고 있었을 때 곤궁하기 짝이 없는 가출한 궁자인 아들이 찾아들었다. 궁자인 아들을 본 아버지는 곧 자기자식임을 직감했으나 궁자는 장자의 위용에 압도되어 도망을 치고 맙니다. 장자의 하인이 잡으려하자 놀란 나머지 기절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두사람의 하인을 보내서 똥을 치는 청소부가 될 것을 권유하고 스스로는 누더기 옷을 입고 궁자에게 접근하여 기회를 노리다가 [이후는 나의 아들과 같이 대하리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궁자는 20년간 청소부로서 일을 계속하다가 마침내는 장자의 심부름꾼으로 또다시 집안재산의 계산관리를 담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던 차에 임종이 가까워진 장자는 친족·국왕·대신등을 모이게 하고 [그는 실은 나의 아들이고, 나는 실은 그의 아버지이니라. 지금 나의 소유의 일체의 재물은 모두 이는 아들의 소유이니라]라고 말하고 가업(家業)을 궁자에게 맡겼다고 하는 이야기로 장자는 부처이며, 아들은 범부(凡夫, 경문상으로는 이승인 성문·연각을 가리킴이고, 부처는 이와같이 하여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법화경신해품 제4에 설해진 비유의 이야기로 아버지가 50년전에 가출한 아들을 마음속으로 근심 걱정하는 것은 소리도 아끼지 않고 법화경을 수지할 것을 가르쳐 주려고 해도 상대가 등을 돌리고 무간지옥에 떨어진 중생을 부처님은 안타까와 하는 것에 비유해서이고, 아들이 가난을 원망하는 것은 법화경을 비방했기 때문에 무간지옥에 떨어진 중생들이 부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고생시켜 홀로 서게하고 결국은 모든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부처가 무상의 보취(寶聚 : 南無妙法蓮華經)을 믿음(제목봉찬)으로써만 삼세제불의 만행만선(萬行萬善)수행의 모든 보물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대목입니다.
3.일미평등(一味平等)을 밝히는 [삼초이목三草二木의 비유]
부처의 설법은 일미평등인데, 중생의 근성(根性)에 차별이 있는 것을 초목의 크고 작음에 의해서 비유하는곳으로 이 비유는 사대성문이 [장자궁자의 비]를 가지고 개삼현일의 철리(哲理)를 영해(領解 : 부처의 설법을 듣고 마음으로 깨닫는 것. 회득하는 것.)한 요지를 말하고, 이에 대하여 부처가 보설(補說)·시인(是認 = 述成)한 것입니다.
비유의 내용은, [잠시 구름이 전세계를 뒤덥고 일시에 비가 쏟아졌다고 하자, 비는 초목과 약초 모두를 적신다. 그리고 모든 나무는 대소·상중하에 따라 비의 이익을 받는다. 한점 구름이 가져다준 비는 초목에 미치고, 초목은 각각의 종성(種姓)에 따라서 성장하듯이 동일한 대지에서 자라며 동일한 비에 젖으면서도, 갖가지의 초목에는 각각의 차별이 있다. 여래(如來)도 구름과 같이 세상에 출현하여 널리 일체중생을 위해 대음성을 가지고 법(法)을 설한다.] 삼초이목(三草二木)에는 여러 가지의 해석이 있으나 법화문구권7상에서는 [소(小)의 약초를 인천승(人天乘)으로 중(仲)의 약초를 성문·연각으로, 상(上)의 약초와 소수·대수(小樹·大樹)를 보살에 배(配)하고 있슴이니, 그 가운데 상의 약초는 삼장교(小乘)의 보살, 소수는 통교의 보살, 대수는 별교의 보살에 해당시키고 있습니다. 법화경 약초유품 제5에 설해진 비유의 이야기로 우리들의 사회는 다양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우주의 근본 법칙인 [南無妙法蓮華經]은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관찰하는 대철리입니다.
인간에게는 각각의 입장과 역할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가 여러 가지 형태나 종류가 다른 풀과 나무 등을 평등하게 적셔 꽃을 피우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과 같이 어떠한 개성을 지닌 인간이라도 법화경(南無妙法蓮華經)의 올바른 신앙에 철저한 가운데 꽃핀 나의 [생명의 꽃], [인간의 꽃(人華)]은 결코 시드는 일이 없습입니다. 그리고 영원하고도 존극한 성불의 경애라는 열매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삼세 영원한 행복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4.개삼현일의 철리(哲理)를 비유하는 [화성보처化城寶処의 비유]
내용을 개설하자면 5백유순(五百由旬 : 약 3,500km)의 먼길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도중에 피로에 지친사람들의 앞의 리더(導師)가 3백유순을 지나간 곳에 신통력으로 성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이곳이 목적지인줄로 착각했던 사람들의 생각을 훈계하고, 이것은 일시적인 휴식을 위한 화성(化城 : 부처가 중생을 화도하기 위해서 방편력으로서 설치한 성. 신기루 같은 것)이며, 보처(寶處 : 구극의 진리인 일불승)는 멀지 않았다고 격려함으로써 장도(長途)의 여행을 성공케하는 줄거리입니다.
법화경 화성유품 제7에 설해진 비유의 이야기로, 사람들은 모두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세계에는 갖가지 고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에 어떤사람은 인생에서 막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리더(부처님)의 총명한 격려는 사람들 피곤을 풀어주고 희망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化城).
이 적절한 리더의 인도에 의해 사람들은 자기 생명을 드넓게 열면서 현실의 과제를 하나씩 하나씩 온 힘을 다해 도전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행복과 안온의 세계(寶處)를 구축해 간다는 것입니다 (화성 즉 보처로 여는 것입니다.) 부처님(리더)과 함께 있다념 성불이라는 [행복]과 [안온]의 경지를 자기 것으로 할 수 있고 [함께하지 않을 때] 바로 불신의 마음을 일으켜 퇴전해 버린다면 길을 잃고 무간지옥에 떨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사람들의 피곤을 풀어주고 항상 희망을 심어주면서 사람들을 성불시키기 위해 사람들이 최고의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앞날에 어떠한 위험이나 곤란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앞으로 전진해 가는 것입니다.
5.일체중생의 생명속에 있는 불성(佛性) [의리계주(衣裏繫珠 : 속옷에 숨긴 무가의 보배구슬)이라는 빈인계주貧人繫珠의 비유]
가난에 지쳐 유랑을 하는 어떤 사람이 관리였던 친구의 집을 방문하자 술대접을 받고 만취가 되어 잠들고 말았습니다. 이때에 그 친구는 공무로 출타해야 했으므로, 잠들어 있는 친구의 의복뒤면에 무상의 가치가 있는 무가의 보배구슬을 꿰매 주었습니다. 취기에서 깨어난 그는 그런 사실을 전혀알지 못한채 유랑의 길을 떠나 여러나라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의식을 얻기도 힘들 정도로 고통의 나날이였습니다. 그 후에 옛날의 그 친구를 만났을 때 친구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크게 놀라며, 보배구슬의 일을 물었습니다. 비로소 그는 놀라면서 자기의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함과 동시에 매우 기뻐했다고 하는 이야기 줄거리입니다. 법화경오백제자수기품 제 8에 설해진 비유의 이야기로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들이 무상의 보물(불계)을 몸에 지니고 있는데도 그것을 지각하지 못하고 낮은 깨달음으로 만족하는 것에 대해 반성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야기한 비유입니다. 남자가 옷안쪽에 [무상의 보물]이 꿰매져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그 [보물]을 보고는 크게 환희하는 것은 자신의 몸에 [불계]를 지니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고뇌를 거듭하던 사람이 미혹에서 깨달아 우주의 근본리듬인 법화경의 제목(南無妙法蓮華經)을 낭랑하게 불러감으로써 생겨난 [생명의 환희]를 비유한 것입니다.
6.상투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보배구슬[계중명주髻中明珠의 비유]
계중명주( 中明珠)라고 상투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무상의 보배구슬이란, 사랑과 평등 평화와 기쁨이 가득판 평화로운 세계를 실현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던 전륜성왕이 싸움에서 가장 공훈이 있었던 사람에게만,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주지 않았던 무상의 보배구슬인 계중, 상투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명주(明珠)라 하는 것입니다. 법화경문구권9상에는 [명주(明珠)라는 명(明)은 중도(中道)의 지(智)를 비유하고 원(圓)은 상(常)을 비유하며 재정(在頂)이란 극계(極界)의 종(宗)으로 하는바.
계중( 中)이란, 실(實)은 권(權) 때문에 숨겨지는 것이며 계( )를 해(解)함은 즉 개권(開權)이 되는 것이며, 주(珠)를 수여함은 즉 현실(顯實)이니라]라고 있으며. [이전권교]를 설하는 동안 [실교]를 숨겨왔던 것을 [계중]에 비유하고, 그 [상투]를 푸는 것은 [개권]이며, 풀어서 [주(珠)]를 주는 것은 일왕(一往)은 법화경을 나타내고 있으나, 재왕(再往)은 [수량오저내증의 南無妙法蓮華經)]을 가리키게 되는 것입니다. 법화경안락행품 제14에 설해진 비유의 이야기로 지혜와 복덕으로 이 세계를 다스리는 [법]과 [가르침]의 왕자인 부처는 이 전륜성왕과 같이 [마]와 TK우는 부처의 기품있는 전사들에게 여러 가지 경을 설해 기쁨을 주지만 법화경만은 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장마를 격퇴시킨 최고의 용사에게 왕이 상투안의 명주(보배구슬)을 주는 것처럼 법화경을 설하는 것입니다. 부처는 언제나 일체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법을 설하고 부처의 종자을 심는데 열중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부처에 대해서 사견(邪見)을 가진 사람, 편견을 가진 사람, 만심에 찬 사람이 반드시 박해를 하려고 합니다. 부처의 사명을 받아 함께 싸우는 (자행화타의 신심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우리들에게도 반드시 장마가 다투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중의 명주라는 최고의 불도(南無妙法蓮華經)을 수지하고 그 장마와 싸우는 그 곳에 우리들은 어떠한 적에게도지지 않는 강한 생명의 경애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실한 안락의 도(道)인 것입니다.
7.부처의 상주를 밝힌 [양의병자良醫病子의비유]
옛날에 어떤 의사가 있었습니다. 의사가 여행을 간 사이 자식들이 독약을 마셔 버렸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들을 보고 색과 향이 좋고 맛도 좋은 약을 바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곧바고 약을 먹고 치유된 아이도 있었지만 독이 몸에 퍼져 본심을 잃어버린 아이는 마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버지는 다른 나라에 가서 사신을 시켜 자신이 죽었다고 알리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한탄하고 슬퍼하며 마침내 마음을 고쳐먹고 양약을 마셨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돌아왔습니다. 이 비유에서 의사란 석가모니부처님을 가르치며 양약은 법화경을 가리킵니다. 의사가 여행을 가서 아버지가 죽었다고 알린 것은 부처는 영원히 상주하는데 열반을 방편으로써 나타낸 것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또 양약을 마시려고 하지 않던 아이는 석가모니부처님재세시 불법으로는 구제되지 않는 탐·진·치 삼독이 강한 말법의 중생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법화경여래수량품 제16에 설해진 비유의 이야기로 위대한 의사인 아버지를 부처에 비유하고 그 아이들을 중생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설해진 것처럼 위대한 아버지, 부처가 언제나(영원히)곁에 계신다면 이 아버지의 아이들과 같이 우리들(중생), 불자는 어느사이에 교만한 마음이 생겨 아버지, 부처의 위대함을 깨닫지 못하고(수근이불견, 雖近而不見, 가깝게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방법(謗法)의 독을 마셔 버리는 것입니다.
이 방법의 도기 깊숙이 스며들어 마음이 전도된 중생들은 이 색깔도 맛과 향기도 좋은 약(법화경)을 따르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입니다. 거기서 부처는 중생을 구하기 위해 부처의 입멸 = 열반(생사의 거듭된 모습)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본심을 자각시켰던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가 죽었다]고 아이들을 속이는 것처럼 부처는 중생을 구하기 위해 방편으로 입멸, 열반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의 생명은 멸하지 않고 영원하게 계시고 있기에 [생]과 [사]를 무한히 되풀이 하면서 중생을 구해 왔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南無妙法蓮華經이라고 스스로 자진해서 불러 나간다면, 이 부처의 영원한 생명을 각지하고 방법의 독을 마시는 일도 본심을 잃어버리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의 괴로움에 빠진 사람들은 그릇된 사종교의 독약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살아있는 것 자치가 즐겁다]고 말할 수 있는 자타 모두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행복경애를 확립하여 [환희중에 대환희]의 인생을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부처의 사자로서 포교홍법을 실천해 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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