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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잡록/수상록.에세이

45년만의 이산친구들 재회

by 靑野(청야) 2015. 10. 21.

'아아들을 다 어디가고 할배.할매들만 있노?'

 

어제밤 거가대교를 넘어, 중학교 때까지 살던 동네어귀에 있는 병원에

중딩 동창의 부친 조문을 갔었다.

 

열댓명 모여있던 고향친구들 보고는 한소리 아니할 수가 없었다

 

1960년대 초등학교는 일제식 건물(무슨 지붕인지 기억없다)에다

1970년 2월에 졸업한 중학교는 양철지붕 건물이였다.

 

그외 대부분의 주변동네는 초가지붕이였는데,

1959년 6살, 추석날 새벽에, 거제도-부산을 강타한 사라호 때,

중학교 건물의 양철 판이  童話속의 아라비안 양탄자처럼, 

바람에 날아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당시, 사라호가 지나간 초가지붕 모두가 벌거벗었고

바람이 자자지자 바로 햇빛이 나서

동네에, 흔해 빠진 밤나무, 감나무 밑으로 달려가 

밤을 줍고, 감을 주웠던 기억이 난다.

 

감나무, 밤나무가 있던 그 동네 어귀에 언제 그런 종합병원이 들어섰는 지,

 

장례식장에는 45년만에 보는 친구가 태반이다.

 

마침 60~70년만의 남북 이산가족 재회가 금강산에서 열리고 있다는 데,

남북의 이산가족재회처럼 얼굴이고 이름이고 못알아보겠는 친구들,

얼굴은 가물가물 알아보겠는 데 이름을 모르겠는 친구들!

 

그런 친구들 모두 初老의 모습이다.

重老의 모습도 여럿이다

 

시골의 따거운 햇빛속의 일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돌아가신 친구들도 여럿이다.

장례식에 온 친구들 중에는 술을 못하는 친구도 있고,

오지 않은, 오지 못하는  친구들 소식도 들려준다.

 

세월은 비켜가지 못하니,

남은 세월동안 친구들을 몇번을 더 보랴?

앞으로, 한10년, 20년까지라도 이 친구들을 자주봐야 할터인 데...

 

거가대교를 넘나드는

길거리는 45년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모습으로 개벽되었다.

세월의 무상함을 다시한번 실감한다

 

우리 보다 몇년 나이많은 선배들의 시절,

거가대교의 거제쪽 마을의 초등학교 수학여행은

부산이 아니라 장례식장이 있는 우리 동네였다카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 인근 동네살았던 부산에사는 이정재는 아이라꼬 펄펄뛴다)

 

                                   <거가대교 주변지리(펌)>

 

내고향은 연초면, 이정재는 섬중의 섬, 하청면 칠천도가 고향이라 하네. 

거제시(당시 고현이라 불렸다)라고 적혀있는 곳이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이고, 

육이오동란중, 인근 수십리가 피난민들로 들끓었다.

연초면 연초시장쪽으로까지도 피난민이 들끓고 

거제시청 부근, 포로수용소부근등이,  

덕포해수욕장부근 같은 변두리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의 수학여행 코스였다?

지금은 최소한 2차선 이상 도로가 온 섬구석구석 연결되어 있으나

당시에는 자갈길에 먼지 풀풀날리는 신작로라는 길이

겨우 교행할 정도의 폭으로 주요지역만 연결하고 있었지만,

변두리 지역은 그나마도 없었다고 한다.

현재 거제도가 25만~30만이 산다해도,

바닷속으로 가라 앉을 듯이 북적거리는 데,

육이오시절 피난민이 몰려오며, 약200만이 살았다 하니,

포로수용소를 중심으로 인근 촌시장주변에

허가, 무허가 가릴 게제가 아니였을 판자촌들이 들어서,

인구만으로는 아마도 지금의 자갈치시장 만큼이나 북적거렸을 게다.

 

우리집 아랫채 초가에도 흑인상사(?)가 방을 얻어 있어,

그 흑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달콤한 껌을 사탕인양 얻어 먹었었다는

6살 위의 형의 기억을 어릴때 자주 듣고 신기해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상상컨데,

온갖 피부색깔의 유엔군 병사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온갖 조선 사투리의 피난민들이 시장으로 몰려 나오면

당시의 시골치고는 얼마나 신기하였겠는가? 얼마나 가관이였겠는가?

 

당시, 우리동네는 통영과 장승포로 통하는 길목이라

비록 비포장이나마 하루에 두세번 버스라도 다녔지만

비포장 찻길이 없었을 것은 물론이고

버스구경도 할 수 없고, 바다에 연했다 뿐이지,

지리산 골짜기 동네 못지 않는 외토리 지역인

거가대교 끝쪽 동네 어린애들한테는 

당시, 자갈치 시장보다 더, 신기하고 가관이였을 우리 동네로,

수학여행 올만도 하지, 수학여행오고도 남지.

 

일찌기 고등학교 시절, 부산 자갈치 시장까지, 목선으로  3시간,

이후 카페리시대에 녹산 서쪽 안골포를 통해, 1시간 남짓 거리로 다녔는 데,

이제는 웅장하게, 바다위로 솟은 현수교,

해저 49미터까지 지나가는 해저터널등으로

15km를 넘게, 육지와 이은 거가대교를 통해,

승용차로 10여분만에 바다를 넘나든다.

 

                                      <거가대교 원경(펌)>

 

 

                                     <거가대교 해저터널안(펌)>

 

                                       <거가대교 야경(펌)>

아름다운 거제주변 해변,

바다위로, 바다밑으로

 

장엄하게 건설되어 있는 대교 주변의 밤 풍경은 더욱 아름답다.

 

차로 달리면서

눈은 아름다운 거제山野, 고향산천, 대교주변 밤풍경을  열심히 훑어 지나지만,

마음에는 고향을 떠나, 부산 딸래미 집에 다달으도록,

45년전후의 일들이 한편의 긴 영화필름처럼 돌아간다.

 

'과거에 집착하는 만큼 미래는 짧아진다' 카는 데,,

 

과거를 돌이켜 주던, 어제의 回想길 같으면,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지만,

 

고층아파트 단지로 변해버린 고향동네

어쩐지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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