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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장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심우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수상잡록/수상록.에세이

고향잃은 상실감

by 靑野(청야) 2014. 9. 26.
피천득은 '고향은 늙지 않는다'고 했다. 고향은 낙원이라고도 했다. 두고온 고향은 늙지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망부석처럼  우리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향토 연구가이신 황규성 향사(鄕士)같은 이는 고향을

첫째 어머니 품안 같은곳.
둘째 아름다운 자연.
셋째 유년시절의 기억이 어린곳
넷째 정신적 귀의처.

그런 고향을 가진 사람은 그래서 축복이다라고 하였다.

요즈음은, 도시화와 국제화가  진전되고, 小産과 개인주의가 만연하면서,  혈연공동체가 점차 붕괴되고, 어머니 품안 같은 곳, 유년시절의 기억이 어린 곳의 의미로는 고향을 상실해 가고, 나아가 고향소멸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주변인물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지구를 떠나는 이들뿐만아니라, 직장을 떠나는 이들도 상당히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반평생을 직장에서 보낸 이들에게는 직장이 고향과 다름아닌 것이다. 대부분 반평생 땀흘려 가꾼 직장,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고, 어린자식이 장성하게 자랄 때까지, 인생의 연륜, 추억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직장이야 말로, 현대인들의 또 다른 고향인 것이다.  그래서, 도중에 직장을 떠나든, 정년퇴직을 하든, 정들었던  직장을 떠나면서 대부분  상실감에 젖게 된다. 이 때받는 상실감은, 고향의 상실감과 같은 同類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속에 언제나  품고 있던 종래의 고향에 대한 의미도, 현대인들에게 낯설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종래의 고향의 의미가 어쩔 수 없이 변질되가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이마저도 언젠가는 더욱 큰 상실로 이어질 것이다. 문명화가 진전되고, 자원의 소모에 기반한 성장을 속성으로 하고 있는 현대문명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고향의 향수를  향유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현대인들이, 이런 각박한 현대문명생활로부터 위안과 안식을 구하는 일이 늘어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상실한 고향을 대체하는 귀의처를 구하여,  현대인들이  종교나 끼리끼리 모임에 탐닉하게 되고, 아름다운 자연이나 정신적 귀의처를 많이 찾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인 것이다 그것은 고향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이 아직도  큰 현대인들의 몸부림인 것이다. 그런 현상은 나이든 세대일 수록 더욱 절박한 몸부림으로 다가온다.

'대인은 만리밖을 내다보며 고된 수련을 통해 또 다른 삶의 둥지를 틀고,  중인은 천리안팍을 내달으며 질주하고 소인은 백리안에서 우물안 개구리처럼 산다' 는 말이 있다. 그 만큼, 대인의 고향은 천하가 되고, 소인의 고향은 향토가 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보면, 현대인의 삶은 대부분 대인의 삶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 여건인 물리적 공간으로 그 의미를 새길 일이 아닐 것이다. '마음의 작용, 즉, 대인의 마음은 만리를 넘나들며  걸림이 없이 주류무체한  것이고,  소인의 마음은  자기 주변에 머무른다' 는 뜻이리라. 그래서, 고향의 상실감은 소인보다 대인이 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대인의 삶이 행복한 삶이고, 소인의 삶이 그보다 덜한 삶이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고향은 애국적, 국수적 의미에서의 고향이 아니라 존재사적으로 사유된 고향, 즉, 인간 현존재의 본질이 거기에 거주한다는 그러한 의미에서의 고향'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의 진리의 망각과 이로 인한 존재의 망각, 즉, 인간 현존재는 자신과 존재의 관련을 망각함으로써 자신의 고향을 상실한다' 고 말한다.

그렇다면, '존재와 진리의 인식' 의 노력으로  고향의 상실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인가? 

하이데그와 야스퍼스같은 실존주의 철인들의 말씀을 접하다보면, 고향을 말하는 데, 고향냄새는 안 맡아지고, 너무 철(쇠)냄새만 난다. 네게는 그렇다는 말이다.

문명화로, 도시화와 국제화가 진전되고, 小産과 개인주의, 자원의 소모에 기반한 성장을 속성으로 하고 있는 현대문명화가 인간으로 하여금 고향상살의 원인이라한다면, 탈문명화, 자연과 하나가 되는 삶, 자연 그 자체가 되는 삶이라면, 고향의 상실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인가?

어쩌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삶이야말로  무소유의 삶 아닌가? 자연은 언제나 내곁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굳이 소유하지 않아도 되고,. 그래서 무소유의 삶에는 육신이 머무르는 주변이 곧 고향인 경지이고, 나아가서는 상실할 고향마저도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구나!,

.......

'서울로 다시 올라가자. 아빠곁에서 살자'

우리 꼬맹이 하도 부산으로 살려가자 해서, 올봄, 학기가 시작하자  지누나의 직장까지 옮겨가며 같이 내려 보냈더니, 부산에서 방황하기는 마찬가지. 이대로 가서는 안되겠다 싶어, 다시 전학시켜, 내곁으로 데려 갈려고, 수차 상의도 하고, 회유도 하고, 급기야 명령하듯 결론을 내려도, 요지부동,  '나는 가기싫다' 하며, 평소 호랑이 비슷하게 무서워하는 아빠인 나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다.

녀석이, 그토록, 지 어미와 살던 집, 살던 동네와 동네친구들에 집착하여, 부산으로 가자하던 것은, 거기서 살던 지 어미에 대한 그리움, 그 어린시절의 추억이, 나름대로 고향의 향수때문이였던 것이다. 그것이, 가장 원시적이고, 가장 순수한 고향에 대한 동경의 발로를 표출하였던 것이였다. 그래서, '부산가서 살자', '부산집에 가서 살자' 노래를 부른 것은, 고향을 떠난 상실감에 견딜 수 없는 아픔을 표현한 것이였다.

우리 꼬맹이는 지금 부산에 내려가서 살지만, 어머니 없는 고향, 성장하며, 자연스레 변해버린 옛친구들의 모습에서, 고향답지 않은 고향을 겪고 있다. 차라리 마음속에 동경하고 간직한 채로 있었으면, 상실의 아픔이 적으련만, 고향답지 않은 고향에서 여전히, 고향의 상실감에 젖어 몸부림치고, 처절히 맞서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서울로 가지 않으려 한다. 상상속의 동경과 향수보다, 상실감을 맛보더라도, 고향이 주는 위안이 더 크나보다. 하지만, 거기에다 큰 추억을 간직하고 있던 집을 팔아버렸으니...

참 나도 우둔하였지, 녀석에게,  대인의 마음가짐을, 무소유의 삶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 그런 녀석의 마음을 좀더 빨리 헤아렸다면, 부산 집을 덜렁 파는 게 아니였다. 부산 집은, 지어미와의 추억이 서린 곳, 그런 집을 판다는 것은 녀석에게, 크나큰, 고향의 상실을 의미한다. 녀석에게 고향에 대한 상실감이 얼마나 클 것인가 고려하였다면, 그 상실감이 치유되기 전에 그 집을 파는 것이 아니였다. 지금에사 깨닫는다. 녀석의 방황을 지켜보다 마침내 깨닫는다.  

'녀석의 상실감을  회복시켜 주어야 할 의무가 나에게 있는 데, 그 상실감을 헤아리지 못하고, 덜렁 집을 팔아버렸으니, 엎친데 덮치기 한 꼴이로구나'

'만년의 사람들의 생활은, 고향을 잃은 상실감과의 투쟁이구나'

문득묻득 깨달음만 얻을 뿐,  겉으로는 태연한 척, 아들, 딸의 고향잃은 상실감을 회복시켜준다고 이리뛰고 저리 뛰고, 설쳐보지만, 좀 처럼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홀로 침대에 들 때마다, 나역시  아직은 소인수준이라, 녀석들 못지 않게, 큰 상실감을 앓게 된다. 나름대로, 마음대로 휘젖고 다니던 인생의 마당을, 나이들어가면서, 이제는 마음대로 뛰놀 수 없구나. 체력도, 건강도 그렇고, 주위의 시선도 그렇고, 무었보다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사실만으로, 개구리처럼 우물안으로 움추리게 되고, 주변에 집착이 더 해간다.

그것이, 나에게는  고향의 상실감이상으로 다가온다. 현실의 상실감도 상실감이려니와 미래에 대한 상실감에 대한 우려가 더욱 가슴에 사무치는 것이다. 그 자체가 또 다른 상실감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나자신의 상실감, 고향을 잃어가는 상실감의 회복이 더 시급한지도 모르겠다. 시도때도 없이  탁배기를  찾는 횟수가 늘어가는 것이 그걸 말해준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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