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에게 씰데없는 소리, 헛소리(?)를 좀 더 찌꺼려야 겠습니다.
그동안 동서교금에, 사이비종교, 광신도들이 사회에 해약을 입혀온 것은 굳이 사례를 들지 않드라도 부지기수라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압니다.
'구원파(救援派)'
작금의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종교집단'입니다. 천하의 共憤을 일으키는 세월호사건의 세월호 소속회사의 지배자인 유모씨가 이끄는 종교집단을 말합니다. 유씨는 그 종교집단의 총수 즉, 교주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백과사전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기독교계 신흥 종교 중 특정한 구원관을 가지고 있어서 대한민국의 개신교 주요 교단에서 이단으로 지목한 교파들을 통칭하여 일컫는 말이다. 대표적으로 1962년경 대구에서 창설된 기독교복음침례회(基督敎福音浸禮會)가 있다]
또, 인터넷 자료에 의하면,
[오대양 사건과 (주)세모와의 관련설로 큰 물의를 일으켰던 권신찬의 '기독교복음침례회'는 1961 년 11월 네덜란드 선교사 길기수(Case Glass)의 영향으로 '죄사함을 깨달았다'는 권신찬과 미국 인 독립선교사 딕욕(Dick York)의 영향으로 '복음을 깨달았다'는 유병언에 의해 시작되었다. (권와 유는 장인과 사위 관계다.)
1963년부터는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끊고 독자노선을 구축, 1969년부터 1981년 말까지는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로 1981년 11월 21일부터는 '기독교복음침례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부의 소재지는 서울 용산구 한강로 1가 231-23 서울교회로서 통상 삼각지 교회로 불린다(이상 펌) ]
2014년 5월19일, 대통령담화에서 '해양경찰 해체'라고 했다고 온 언론이 속보로 전합니다. 구원파 교주 유병언이 거느리는 세월호 참사의 대응 휴유증으로, 종교집단이 운항하는 선박의 운항잘못을 제대로 예측, 관리못하고, 초기 대응이 부실하다고 해양경찰이 해체선언을 당한 것입니다. 어디, 이 뿐이겠습니까?
종교와 결사의 자유를, 밑바탕에서부터 훼손시키고 사회적 물의를 이르키는 사태가 특히, 기독교이단세력에서 시도때도 없이 빈번합니다. 그런 악의 집단이 신성해야할 종교를 이용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런 세력이 발붙일 근거를 제공하고 있는 종교의 책임이 더 크다 할 수 있습니다.
'글마들은 이단, 우리와 무관' 하다 주장할지 모르지만, 이른바 손에 들고 있는 '말씀'이라는 신성한 도구가 동일한 대도 어찌 이렇게 다른 해석, 다른 행동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까?
기독교계는 스스로 자문자답해야 합니다. 멀쩡하게 잘 지내는 사람들을 불쌍하고 나약한 죄인으로 만들어 '구제니, 천국이니 안내한다', '무조건 믿어봐라'는 식으로 건방(?)을 떨게 아니라, 그 말씀이 진리라면, 그 말씀을 욕되게 하고, 잘못 이해하고, 죄악을 저지르는 패거리들을 최우선적으로 교화하든지, 응징하든지 하여, 말씀의 진리성을, 끼리끼리 사회 말고, 일반사회에 먼저 입증하는 것이 인류사회에 대한 예의이고 도리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유모씨나 저 여의도에 근거를 둔 조모씨나 아니면, 대단한 교세를 자랑하는 여러 대형집단들들이 차이가 나봐야 오십보 백보라고 보는 것이, 일반인들이 지극히 냉소적으로 보는 시각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옛날 인간의 지식이 별로 요구되지 않을때는 자연에 의존하고, 자연에 순응하며, 큰 욕심부리지 않고 그런대로 살았읍니다. 자연에 따르다 보면, 비록 육신이 고달팠을 지 몰라도 마음은 자연과 공명하며 살았지 싶습니다.
요즈음은 지식이 넘쳐 납니다. 지식이 없으면 인간답게(?)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읍니다. 모든 문명, 사회의 구조가 지식을 우선하고,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를 구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지식을 만들기도 하고, 지식의 필요를 만들어 그 지식이, 인간에게 알게 모르게 강요합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그 지식에 길들여 집니다. 그리하여, 육신은 다소 편하게 되었을 지 모르나, 정신은 나약하기 그지없이 변해갑니다. 지식이 인간의 삶을 좌지우지하고,
마침내, 인간이 스스로 창조한 지식에 지배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이 집을 만들어 육신을 위탁하지만, 그 집은 인간의 삶을 구속하고 지배하게 된 것과 같은 이치로 전락한 것입니다.
인간은, 상당히, 고등하고 똑똑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불안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줄 존재를 상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른바 神을 가정한 것이지요. 가령, 우리는 부족하지만, 그런 능력을 두루 갗춘 그 무엇을 신 또는 절대자라 하자, 그 신에게 끊임없이 요구되는 정신적, 육체적 능력을 대변하여줄 전지전능(全知全能)을 부여했습니다. 전지전능은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의 희망사항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벗어납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능력을 가진 존재를 상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할 수록 든실하게 부빌언덕, 즉 믿는 구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치 벼량끝에 무지막지 튼튼한 콘크리트 보호장막을 처두고, 거리를 오가고픈 싶은 심리인 것입니다.
그래놓고, 인간은 정신을 좀 자유롭게 살고자 하였으나, 그런 신에 인간정신이 길들여지다보니, 그 신이 인간의 삶,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게 되고, 이제는 신이 없이는 인간 스스로를 지켜내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고자 전전지전능의 신을 상정했으나, 오히려 인간의 영혼을 그런 신에 헌납하고, 영혼없는, 영혼부실 생명체로 전락한 형국이지요. 주객이 전도되어도 한참 전도된 작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면 자연스러위질 일도, 그 욕심은 아까워, 굳이 지키고자 하고, 그 지킴을 의해 굳이 `살펴 주소서´ 하며 애걸복걸입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욕심을 정당화하고, 욕심을 위해 신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점점 더 신에 의지하게 될 것이고, 그럴 수록 `살펴 주소서´ 작태는 성행하게 될 것입니다. 신은 더욱 기세등등 인간을 지배하는 형국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개별 인간에게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을지라도, 역설적으로 이른바 신성이 충만 할 수록, 인류의 고통은 점점 해결될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인류의 고통은 점점 해결될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기 때문에 신성이 충만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오! 신이시여!하는 절규가 난무할 수록 그만큼 세상이 개판으로 되어간다는 얘기입니다. 세상이 개판이기 때문에, 오! 신이시여!` 하는 절규가 터져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 신이시여!' 하는 세력들에게는 악마의 헛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러니 역설적으로, 신이 있는듯 없는 듯하는 하는 세상, 오! 신이시여 라는 절규가 잦아들수록 문제가 적은 세상, 바람직한 세상으로 되어간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道가 무너지면 德이 나타나고 德이 무너지면 仁이 나타나고 仁이 무너지 義가 나타나고 義가 무너지면 禮가 판을 친다는 도덕경의 구절이 생각납니다. 예를 갗추어 義를 이르키고 義를 다스려 仁을 이룩하여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던 공자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세상이 어지러운 것임을 기본적으로 전제한 것입니다. 신을 통해 구제받겠다는 발상, 그러기 위해 신이라는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는 발상은 공자식 발상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등따습고 배부르면, 황제가 누구고, 누가 이 나라를 다스리는 지 관심도, 걱정도 없다는 저 중국의 삼황오제 시대의 이상국가를 상기해보십시오. 나라를 지키는 병력이 꼭 필요한 것은 호시탐탐 나라를 노리는 세력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회에 범죄라고는 없다면, 다툼이 없다면, 경찰과 재판소가 필요하겠는가?
입에 거품을 물고 신을 찾고 구하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개판으로 되어간다는 것, 구원파가 이를 반증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문제는 내 것을 지키고자 하는 욕심이 크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이른바 천국은 지옥이 있기 때문에 성립합니다. 지옥이 없이는 천국만의 존재가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옥이 없이 천국만 존재한다면. 이미 그것은 천국이 아니라 그냥 저 세상일 뿐인 것입니다. 굳이 천국이라 우기는 것은 이승에 있는 나약한 인간들이 위안받고자 하는 욕심일 뿐일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인류가 지식을 창조하는 똑똑함이 크지만, 그 지식에 지배당할 수 밖에 없는 어리석음도 역시 더 없이 크다 하겠습니다. 그것은 인간개개인을 나무랄 일이 아니라, 인간이 진화에 있어서도 이직은 욕심을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불안전한 개체이기 때문일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생인류의 한계 아니겠습니까?.
구원파등의 사이비들의 작태를 보면서, 그런 집단들이 기생하는 원인제공을 한 기존의 이른바 정상적(?) 종교, 그들의 대오각성과 이성적 노력없이는 '오!주여, 어쩌구저쩌구..'식의 회계정도로서는,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사회의 변화속에서, 아마도 이런류의 사건은 더욱 은밀하고 더욱 파괴적으로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불안감이 크집니다.
그것은 현생인류가 이 불안전한 것을 교육, 진화, 과학발전, 종교를 통해 극복하지 못하면, 언젠가는 멸망하고 새로운 인류의 탄생이 필연적일 것이라는 것을 함시하는 것 아닐까요? 후세대를 위해서도 매우 우려스렵습니다.
그러니, 개개인은 물론이고, 정치, 사회, 교육,과학, 종교,,, 각분야가 대오각성하고 제대로의 길로 가야할 것입니다. 이 문명이 진화하되 제대로 진화하여야 할 것입니다. 헌데, 어디서, 언제 어떤 계기로 그런 길이 열릴지? 내만 눈을 감으면 되는 것일지?
그동안 동서교금에, 사이비종교, 광신도들이 사회에 해약을 입혀온 것은 굳이 사례를 들지 않드라도 부지기수라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압니다.
'구원파(救援派)'
작금의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종교집단'입니다. 천하의 共憤을 일으키는 세월호사건의 세월호 소속회사의 지배자인 유모씨가 이끄는 종교집단을 말합니다. 유씨는 그 종교집단의 총수 즉, 교주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백과사전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기독교계 신흥 종교 중 특정한 구원관을 가지고 있어서 대한민국의 개신교 주요 교단에서 이단으로 지목한 교파들을 통칭하여 일컫는 말이다. 대표적으로 1962년경 대구에서 창설된 기독교복음침례회(基督敎福音浸禮會)가 있다]
또, 인터넷 자료에 의하면,
[오대양 사건과 (주)세모와의 관련설로 큰 물의를 일으켰던 권신찬의 '기독교복음침례회'는 1961 년 11월 네덜란드 선교사 길기수(Case Glass)의 영향으로 '죄사함을 깨달았다'는 권신찬과 미국 인 독립선교사 딕욕(Dick York)의 영향으로 '복음을 깨달았다'는 유병언에 의해 시작되었다. (권와 유는 장인과 사위 관계다.)
1963년부터는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끊고 독자노선을 구축, 1969년부터 1981년 말까지는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로 1981년 11월 21일부터는 '기독교복음침례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부의 소재지는 서울 용산구 한강로 1가 231-23 서울교회로서 통상 삼각지 교회로 불린다(이상 펌) ]
2014년 5월19일, 대통령담화에서 '해양경찰 해체'라고 했다고 온 언론이 속보로 전합니다. 구원파 교주 유병언이 거느리는 세월호 참사의 대응 휴유증으로, 종교집단이 운항하는 선박의 운항잘못을 제대로 예측, 관리못하고, 초기 대응이 부실하다고 해양경찰이 해체선언을 당한 것입니다. 어디, 이 뿐이겠습니까?
종교와 결사의 자유를, 밑바탕에서부터 훼손시키고 사회적 물의를 이르키는 사태가 특히, 기독교이단세력에서 시도때도 없이 빈번합니다. 그런 악의 집단이 신성해야할 종교를 이용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런 세력이 발붙일 근거를 제공하고 있는 종교의 책임이 더 크다 할 수 있습니다.
'글마들은 이단, 우리와 무관' 하다 주장할지 모르지만, 이른바 손에 들고 있는 '말씀'이라는 신성한 도구가 동일한 대도 어찌 이렇게 다른 해석, 다른 행동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까?
기독교계는 스스로 자문자답해야 합니다. 멀쩡하게 잘 지내는 사람들을 불쌍하고 나약한 죄인으로 만들어 '구제니, 천국이니 안내한다', '무조건 믿어봐라'는 식으로 건방(?)을 떨게 아니라, 그 말씀이 진리라면, 그 말씀을 욕되게 하고, 잘못 이해하고, 죄악을 저지르는 패거리들을 최우선적으로 교화하든지, 응징하든지 하여, 말씀의 진리성을, 끼리끼리 사회 말고, 일반사회에 먼저 입증하는 것이 인류사회에 대한 예의이고 도리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유모씨나 저 여의도에 근거를 둔 조모씨나 아니면, 대단한 교세를 자랑하는 여러 대형집단들들이 차이가 나봐야 오십보 백보라고 보는 것이, 일반인들이 지극히 냉소적으로 보는 시각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옛날 인간의 지식이 별로 요구되지 않을때는 자연에 의존하고, 자연에 순응하며, 큰 욕심부리지 않고 그런대로 살았읍니다. 자연에 따르다 보면, 비록 육신이 고달팠을 지 몰라도 마음은 자연과 공명하며 살았지 싶습니다.
요즈음은 지식이 넘쳐 납니다. 지식이 없으면 인간답게(?)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읍니다. 모든 문명, 사회의 구조가 지식을 우선하고,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를 구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지식을 만들기도 하고, 지식의 필요를 만들어 그 지식이, 인간에게 알게 모르게 강요합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그 지식에 길들여 집니다. 그리하여, 육신은 다소 편하게 되었을 지 모르나, 정신은 나약하기 그지없이 변해갑니다. 지식이 인간의 삶을 좌지우지하고,
마침내, 인간이 스스로 창조한 지식에 지배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이 집을 만들어 육신을 위탁하지만, 그 집은 인간의 삶을 구속하고 지배하게 된 것과 같은 이치로 전락한 것입니다.
인간은, 상당히, 고등하고 똑똑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불안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줄 존재를 상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른바 神을 가정한 것이지요. 가령, 우리는 부족하지만, 그런 능력을 두루 갗춘 그 무엇을 신 또는 절대자라 하자, 그 신에게 끊임없이 요구되는 정신적, 육체적 능력을 대변하여줄 전지전능(全知全能)을 부여했습니다. 전지전능은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의 희망사항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벗어납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능력을 가진 존재를 상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할 수록 든실하게 부빌언덕, 즉 믿는 구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치 벼량끝에 무지막지 튼튼한 콘크리트 보호장막을 처두고, 거리를 오가고픈 싶은 심리인 것입니다.
그래놓고, 인간은 정신을 좀 자유롭게 살고자 하였으나, 그런 신에 인간정신이 길들여지다보니, 그 신이 인간의 삶,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게 되고, 이제는 신이 없이는 인간 스스로를 지켜내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고자 전전지전능의 신을 상정했으나, 오히려 인간의 영혼을 그런 신에 헌납하고, 영혼없는, 영혼부실 생명체로 전락한 형국이지요. 주객이 전도되어도 한참 전도된 작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면 자연스러위질 일도, 그 욕심은 아까워, 굳이 지키고자 하고, 그 지킴을 의해 굳이 `살펴 주소서´ 하며 애걸복걸입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욕심을 정당화하고, 욕심을 위해 신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점점 더 신에 의지하게 될 것이고, 그럴 수록 `살펴 주소서´ 작태는 성행하게 될 것입니다. 신은 더욱 기세등등 인간을 지배하는 형국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개별 인간에게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을지라도, 역설적으로 이른바 신성이 충만 할 수록, 인류의 고통은 점점 해결될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인류의 고통은 점점 해결될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기 때문에 신성이 충만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오! 신이시여!하는 절규가 난무할 수록 그만큼 세상이 개판으로 되어간다는 얘기입니다. 세상이 개판이기 때문에, 오! 신이시여!` 하는 절규가 터져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 신이시여!' 하는 세력들에게는 악마의 헛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러니 역설적으로, 신이 있는듯 없는 듯하는 하는 세상, 오! 신이시여 라는 절규가 잦아들수록 문제가 적은 세상, 바람직한 세상으로 되어간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道가 무너지면 德이 나타나고 德이 무너지면 仁이 나타나고 仁이 무너지 義가 나타나고 義가 무너지면 禮가 판을 친다는 도덕경의 구절이 생각납니다. 예를 갗추어 義를 이르키고 義를 다스려 仁을 이룩하여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던 공자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세상이 어지러운 것임을 기본적으로 전제한 것입니다. 신을 통해 구제받겠다는 발상, 그러기 위해 신이라는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는 발상은 공자식 발상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등따습고 배부르면, 황제가 누구고, 누가 이 나라를 다스리는 지 관심도, 걱정도 없다는 저 중국의 삼황오제 시대의 이상국가를 상기해보십시오. 나라를 지키는 병력이 꼭 필요한 것은 호시탐탐 나라를 노리는 세력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회에 범죄라고는 없다면, 다툼이 없다면, 경찰과 재판소가 필요하겠는가?
입에 거품을 물고 신을 찾고 구하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개판으로 되어간다는 것, 구원파가 이를 반증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문제는 내 것을 지키고자 하는 욕심이 크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이른바 천국은 지옥이 있기 때문에 성립합니다. 지옥이 없이는 천국만의 존재가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옥이 없이 천국만 존재한다면. 이미 그것은 천국이 아니라 그냥 저 세상일 뿐인 것입니다. 굳이 천국이라 우기는 것은 이승에 있는 나약한 인간들이 위안받고자 하는 욕심일 뿐일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인류가 지식을 창조하는 똑똑함이 크지만, 그 지식에 지배당할 수 밖에 없는 어리석음도 역시 더 없이 크다 하겠습니다. 그것은 인간개개인을 나무랄 일이 아니라, 인간이 진화에 있어서도 이직은 욕심을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불안전한 개체이기 때문일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생인류의 한계 아니겠습니까?.
구원파등의 사이비들의 작태를 보면서, 그런 집단들이 기생하는 원인제공을 한 기존의 이른바 정상적(?) 종교, 그들의 대오각성과 이성적 노력없이는 '오!주여, 어쩌구저쩌구..'식의 회계정도로서는,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사회의 변화속에서, 아마도 이런류의 사건은 더욱 은밀하고 더욱 파괴적으로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불안감이 크집니다.
그것은 현생인류가 이 불안전한 것을 교육, 진화, 과학발전, 종교를 통해 극복하지 못하면, 언젠가는 멸망하고 새로운 인류의 탄생이 필연적일 것이라는 것을 함시하는 것 아닐까요? 후세대를 위해서도 매우 우려스렵습니다.
그러니, 개개인은 물론이고, 정치, 사회, 교육,과학, 종교,,, 각분야가 대오각성하고 제대로의 길로 가야할 것입니다. 이 문명이 진화하되 제대로 진화하여야 할 것입니다. 헌데, 어디서, 언제 어떤 계기로 그런 길이 열릴지? 내만 눈을 감으면 되는 것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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