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Also sprach Zarathustra ]
이 책의 제3부까지가 출간된 것은 1880년대의 전반이지만, 당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아직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과 근대 휴머니즘의 영광에
신뢰를 보내고 있었던 시기이고, 따라서 신의 죽음이라는 현대의 니힐리즘적 상황을 선구적으로 감지하고 그 극복의 방도를 획기적인 철학적 에세이로서
결실을 본 이 책이 당초에는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무시되었다. 이 책은 일단은 이야기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따라서 이 책의
개요를 서술한다.
제1부 서두의 "짜라투스트라의 서설"은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된다. "짜라투스트라는 30세 때 그의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서 산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그의 정신과 그의 고독을 즐기고, 그 일에 10년 동안 싫증내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드디어 그의
마음은 변했다". 그는 "다시 인간이 되려고 원한 것"이고, 여기서 그의 이른바 "몰락"이 시작된다. 몰락이란 그가 그 고독한 사색생활에 의해서
성숙한 사상을 사람들에게 제공하기 위해서 고독을 떠나서 속세에 내려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최초로 만난 것은 숲 속의 성자이다.
이 성자에게 경의를 표하면서도 결별한 후에 그는 자기의 마음을 향해서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 늙은 성자는
자기의 숲 속에 있으면서 신이 죽었다는 것에 관하여 아직 아무것도 듣지 않고 있다". 신의 죽음을 인식한다는 것은 참으로 창조적인 의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지는 현재 있는 그대로의 인간에 대하여 엄하게 철추를 가하는 행동으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에 대한
짜라투스트라의 사랑의 실상인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숲 곁에 있는 마을로 들어가서 그 시장에서 다수의 민중을 향하여 한 줄타기꾼의
곡예에 빗대면서 "인간은 초극되어야 할 존재이다"라고 비로소 초인사상을 말한다. 그러나 민중은 그것을 자기자신의 문제로 들어주지 않고 도리어
조소로써 맞는다. 거기서 그는 다음으로 "최후의 인간"을 제시함으로써 역의 방법으로 초인사상의 의의를, 즉 인간의 자기초극의 필요성을 민중에게
납득시키려고 한다. 최후의 인간이란, 현재 있는대로밖에 있을 수 없는 인간, 이제는 어떠한 자기초극의 가능성도 안에 가지고 있지 않는 가장
경멸해야 할 인간이다. 그러나 민중은 그러한 인간이기를 오히려 원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짜라투스트라는 알게 된다.
이 때 줄타기꾼이
곡예사의 성화에 못이겨 추락하는 사건이 돌발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줄타기꾼의 시체를 메고 출발하나 곧 곡예사를 만나 "이 마을에서 떠나라"고
경고를 받는다. 다음으로 마을의 입구에서 묘파는 이로부터 조소를 받지만, 그것에는 답하지 않고 밤길을 더듬어서 곧 동네에서 떨어진 외딴집에 사는
늙은 은둔자를 찾아 빵과 포도주를 얻고서 어느 깊은 숲속에 시체를 파묻고 그리고 곧 잠든다. 그리고 다음날 늦게 잠이 깬 그는 "하나의 새로운
진리"를 알게 된다. 그것은 시장에서 민중을 상대로 말하는 것의 어리석음이라는 진리이고, 그는 이제는 "살아있는 길동무"를, 즉 "함께 창조하는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때 한낮의 태양이 정남에 떠있고 그의 머리 위에는 한 마리의 뱀을 지닌 독수리가 광대한
원을 그리면서 공중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독수리와 뱀은 그의 하인이고, 그의 자랑과 현명함을 상징한다. 그의 현명함은 세인과 원활하게 사귀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그의 설교활동을 효과적인 것으로 하기 위한 필수의 덕성이다. 한편 그의 자랑은 그의 실존의 핵심을 이루는 덕성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가 결코 갖지 않을 수 없는 덕성이다. 이 핵심적인 덕성을 에워싸고 그 주변을 가리고 있는 가면의 정신 혹은 의지가, 그의 현명함인
것이다.
대체로 "짜라투스트라의 서설"에서 이와 같은 한 주야에 걸친 사건이 서술되고 있으나, 그것이 끝나면 드디어 "짜라투스트라의
설화"가 시작한다. 22장에 이르는 제1부의 이 설화는 신의 죽음을 배경으로 하는 초인사상을 주제로 하는 것이고, 그의 제자라고 자칭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향해서 행해진다. 그 장소는 "얼룩소라고 불리는 마을"이다. 제노바를 생각케하는 이 마을은 그의 마음에 드는 마을이어서 그의 산중의
동굴에서 걸어서 이틀의 거리에 있다.
제1부의 최종장 "증여하는 덕에 대하여"는 그가 이 마을에 고별을 고할 때, 그의 제자들을
향해서 한 이별의 말이다. "이제야 나는 혼자서 걷는다. 나의 제자여! 너희들도 또한 이제 떠나서 혼자서 가라! 그것이 내가 바라는 바다".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나를 버리고 스스로를 찾아라, 하고 명한다. 그리고 그대들이 모두 나를 부정했을 때 비로소 나는 그대들의 곁에 돌아
오려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이야기는 제2부로 옮긴다.
그 최초의 장에서 짜라투스트라는 다시 산중으로 돌아오고 이 고독한 자의 몸에
몇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에, 그의 지혜는 성장하고 그것의 충실 때문에 그를 괴롭히게 되었으나, 어느날 아침 그는 다시 하산을 결심한다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나의 적들이 강력해지고 나의 가르침의 초상(肖像)이 비틀어졌다. 그래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내가 그들에게 준
선물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이다. 나는 나의 친구들을 잃어버렸다. 나는 내가 잃은 자들을 찾아야 할 때가
온것이다!"
제2부는 22장으로 되어 있고 그 주제는 "권력으로의 의지"라는 사상이다. 이것은 인간의 자기초극을 지향하는 초인사상이
인간존재를 넘어서서 세계원리에까지 확장된 것이다. 그러나 제2부의 전반(무도가(舞蹈歌) 이후)에 이르면 제3부의 주제인 "같은 것의
영원회귀(永遠 回歸)"라는 사상이 점차로 뚜렷하게 암시되고 제3부로 옮겨간다. 제2부의 설교활동은 시실리아 섬들을 생각케 하는 "지복(至福)의
섬들"에서 소수의 제자들을 향해서 행해지는 것이지만, 영원회귀사상은 그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들에게조차, 아니 그 자신에게조차, 부주의하게
털어놓을 수 없는 놀라운 심연의 사상이다. 그가 제2부의 설교활동을 끝내고 또 한번 산중의 동굴에 돌아오려고 할 때, 마지막 장 "가장 조용한
때"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나의 친구들이여! 너희들이 보다시피 나는 흐트러지고
재촉을 받아 마지못해 복종하면서 갈 각오를 했다.-아아 너희들로부터 떠나가는 각오를! 그렇다. 다시 한번 짜라투스트라는 그의 고독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곰(불평가의 뜻)은 이번에는 별수 없이 자기의 동굴로 돌아간다!" 이것은 영원회귀사상을 참으로 나의 것으로 하기 위한 고투가
예감되기 때문이다.
제3부는 니체가 "이 책의 근본구상"이라고 부르는 영원회귀사상을 주제로 하여 16장으로 구성되고, 사상적으로도
시적으로도 이 책의 클라이맥스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짜라투스트라는 거의 오로지 그 자신에게만 이야기하고 혹은 노래 부른다. 이 제3부의
전반에서 그는 "지복의 섬들"에서 산중의 동굴로의 귀로의 도상에 있다. 서두의 "유랑인"이라는 장에서 아침 일찍 섬 저쪽 편의 정박장에서 배를
타기 위해서 한밤중에 섬등선을 넘어가면서 자기 마음 속을 향해서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이 나타난다.
"나는 한 사람의 유랑인이고 한
사람의 등산자이다". "단지 돌아왔을 뿐이다. 결국은 나 쪽으로 귀향하는 것이다.-나 자신의 자기는 결국 자기에 속하는 것이고, 오래도록 타향에
있고 일체의 사물이나 우연 속에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나의 최후의 산장 앞에 서서 내가 해야할 최후의 최후까지 유보된 것의 앞에
서있는 것이다. 아아, 나의 가장 험한 길을 나는 올라가야 한다! 아아, 나는 나의 가장 고독한 방랑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가 여기서 "최후의
최후까지 유보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의 자기가 본래 있어야 할 곳에까지, 즉 영원회귀사상의 교사(敎師)로까지 성숙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 장에서 그는 선상(船上)에 있다. 그가 본 "환영과 수수께끼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형태이지만 선원들을 향하여 여기서
처음으로 영원회귀사상에 대하여 주제적으로 이야기한다. 우선 이 사상이 갖는 니힐리즘을 초극한 경지가 "이것이 생이었던가? 자 다시 한번!"이라고
정식화된 후에 이렇게 말한다. "보라, 이 순간을! 순간이라는 이름의 통용문에서 한줄기의 긴 영원의 오솔길이 뒷쪽으로 뻗어있다". "일체의 제
사물 속에서 달릴 수 있는 것은 벌써 언젠가는 이 오솔길을 달렸음에 틀림없었던 것이 아닌가?" "일체의 제 사상 속에서 달릴 수 있는 것은 이
밖으로 통하는 긴 오솔길도-장래 언젠가는 달림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영원히 회귀하는 것이 틀림없는 것이
아닌가?"
이리하여 "지복의 섬들"에서 4일의 여정(旅程)정도 멀어졌을 때에 그는 "뜻에 반하는 지복"이 닥쳐와서 다음으로 "일출
전"이라는 장에서 고독한 혼과 천공과의 아름답고도 심원한 이야기가 서술된다. 그리고 다시 육상으로 올라온 그는 가지가지 우로(迂路)를 지나 여러
도시를 통과하면서 최후로 "얼룩소라고 불리는 마을"을 지나서 결국 그의 동굴에 귀향한다.
"오오, 고독이여! 너 나의 고향인 고독이여!
나는 거친 타향에서 거칠게 산다는 것, 너무나도 긴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너의 곁으로 귀향하니 눈물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귀향"이라는 장의 서두의 한 글귀이다.
이하 제3부의 후반은 산중의 고독 속에 있는 그의 최후의 자기초극의 과정이다. 그리하여
"신구(新舊)의 제판(諸板)에 대하여"라는 30장에 달하는 긴 장에서 이 책의 전설교의 요약이 행해진 후 "회복하고 있는 자"라는 장에서
영원회귀사상에 대하여-그의 하인인 동물들의 말이지만-다시 주제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일체는 가고, 일체는 돌아온다. 존재의 쳇바퀴는 영원히
회전한다. 일체는 사멸하고 일체는 다시 꽃핀다. 존재의 세월은 영원히 지나간다". "일체는 깨지고 일체는 새롭게 접합한다.
존재의
동일한 집은 영원히 스스로를 짓는다. 일체는 헤어지고 일체는 다시 인사를 교환한다. 존재의 원환(圓環)은 영원히 스스로에 충실하다". "모든
찰나에 존재는 시작한다. 모든 '여기'를 에워싸고 '저기'의 공은 회전한다. 중심은 도처에 있다. 영원이 밟는 소로는 굽어있다". "이 같은
생, 동일한 생으로, 최대의 것에 있어서도 최소의 것에 있어서도 동일한 생으로 나는 영원히 회전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제3부는 시간의 본질에
관한 "한밤중의 노래", 즉 "오오, 인간이여! 마음이여! 깊은 한밤중에 무엇을 말하는가? <나는 잠자고 있었다. 나는 잠자고
있었다.-깊은 꿈에서 나는 깨어났다.-세계는 깊다. 내가 생각하기보다 깊다. 세계의 고통은 깊다.-쾌락은-마음의 번뇌보다 더 깊다. 고통은
말한다. 지나가라! 고. 그러나 일체의 쾌락은 영원을 바란다.-깊은, 깊은 영원을 바란다!>라는 노래의 여운 속에서 최종 장 "7개의
봉인"(혹은 옳소와 아멘의 노래)을 가지고 끝난다.
제1부의 최종장에서 짜라투스트라는 그의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어느 날엔가 너희들은 나의 벗이 되고, 같은 희망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때 나는 재삼 너희들의 곁에 있어서 너희들과 함께 거룩한
정오를 축하하리라 생각한다". "<모든 신들은 죽었다. 이제 우리들은 초인으로 살기를 원한다> 이것이 언젠가 거룩한 정오에 있어
우리들의 최후의 의지이기를!". 이 세번째의 하산은 이 책의 최초의 구상에 있었지만, 제4부에서 끝난 이 책에서는 실현되지 않는다. 제4부는
제3부까지와는 흐름이 다르고 세 번째의 하산에 앞서는 일종의 "간주곡"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제4부는 20장으로 되어 있다.
그 최초의 장 "벌꿀의 공양"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하여 다시 몇 세월이 짜라투스트라의 혼의 위를 지나갔으나 그는 그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희어져버렸다". 이하, 이 한 장(章)은 어느 날의 사건이고 다음 장에서 최종 장까지는 그 다음 아침부터 다음다음
아침까지의 꼭 한 주야(晝夜)에 걸치는 사건이다. 즉 그는 인간이라는 물고기들을 꼬시기 위한 미끼로서 그의 산의 자유라는 꿀을 던진다. 그러자
신의 죽음이라는 현대의 니힐리즘적 상황에 절망한 "고등인간들"이, 이 절망을 초극한 짜라투스트라를 찾아서 그의 산중의 동굴로
올라온다.
그들은 위대한 피로의 예언자, 두 사람의 왕, 정신의 양심적인 자, 마술쟁이, 신이 죽었을 때에 실직한 늙은 교황, 가장
추한 인간, 스스로 걸인이 된 자 및 짜라투스트라의 그림자와 같은 면면들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자기를 그들과 구별하면서도, 그들이 이 대중의
시대에 있어 사는 방법을 모르는 그 고등성(高等性) 때문에 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아니 그들은 모두 그의 자기존재의 여러 가능성인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고민에 있어 그 자신도 어느 정도는 함께 고민하는 것이다. 이 함께 고민한다는 것, 즉 그들에 대한 "동정"을 초극하는 것에
의해서, 그가 그의 최후이고 최고의 성숙을 쟁취하는 것이 제4부에서의 그의 과제이다. 제4부는 다음과 같은 말과 더불어
종결된다.
"<좋다! 이렇게 된 것도-이제야 이루었다! 나의 고뇌와 나의 동정-그것에 무슨 일이 있겠는가! 도대체 내가 뜻하는
바가 행복을 얻는 것인가? 내가 뜻하는 바는 나의 사업을 성취하는 것이다! 좋다! 사자가 왔다. 우리들의 아이들이 가까이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열이 났다. 나의 때가 왔다.-이것은 나의 아침이다. 나의 대낮이 시작한다. 자아 올라오라. 올라오라. 너 위대한 정오여!>-이렇게
짜라투스트라는 말하고 그의 동굴을 떠났다. 이 자태는 어두운 산속에서 나타나는 아침의 태양처럼 이글거리면서 힘찬 것이었다".
이상이
이야기에 따른 이 책의 대요이다. 그러나 니체가 왜 고대 페르시아의 전설상의 예언자의 이름을 이 책의 주인공의 이름으로서 빌려왔는가. 니체에
의하면 이 고대의 예언자는 도덕적 선악의 창조자이다. 거기서 니체는 그의 주인공에게 "성실함 때문의 도덕의 자기 초극자"라는 의의를 부여하기
위해서 짜라투스트라라는 이름을 빌린 것이다. 즉 니체에 의하면 기독교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세계와 역사에 대한 그 도덕적 해석이고, 그러한
것으로서의 기독교는 종래의 도덕을 대표하지만, 이 기독교적 도덕 그 자체가 인간의 성실함을 고도로 발달시키고, 그리고 이 성실함 때문에 도덕 그
자체가 초극되기에 이르는 것이 그의 이른바 "도덕의 자기 초극"인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의 근본적인 사상에 대하여 해설하기로 한다.
기독교의 도덕적 가치에 대표되는 초월적 가치가 참다운 실재라고 믿어지고, 그것에 의하여 이제까지 사람들이 질서있는 공동생활을 보내왔으나 그러한
신앙이 점차로 허물어지고 초월적 가치가 실은 허무가 아닌가 하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결과, 인간의 공동생활이 그 근거를 잃고 현실생활이
본질적으로 권력의지의 싸움의 세계로서의 양상을 갖는 것이 폭로되기에 이른 현대의 위기적 상황, 그것이 니체의 이른바 "신의 죽음"이라는
니힐리즘적 상황이다.
그러한 현대의 니힐리즘적 상황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서 도리어 그것을 있는 그대로 확인하려는 그의 유례없는
실존적 성실함에서 나온 사상이 "권력에로의 의지"라는 그의 사상이다. 그의 "초인"사상의 근본적 의의도 인간의 실존적 존재방식을 우리들에게
호소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각자가 자기의 현재의 존재방식을 뛰어넘어서 자기대로의 있어야 할 방식을 실현해 가는 것이 긴요한 것이다, 라고 이
사상은 우리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라는 그의 사상도 또한 니힐리즘과 그것의 초극이라는 양면을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이 같은 무의미한 것의 되풀이이고 살아있어도 아무런 보람이 없다는 절망이 때때로 우리들의 인생을 위협하지만 그것이 이 사상의
니힐리즘적인 면이다. 한편 인생의 단 하나의 순간일지라도 끝없이 충실하게 산다는 것, 즉 그러한 순간이 영원히 되풀이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
없을만큼 유의미하게 산다는 것, 그것으로부터 이 순간이 존재하기 위해서 꼭 필요로하는 인생의 기타 모든 견디기 어려운 순간에 관해서도 그것의
영원회귀를 의욕하게 될 때, 이 사상이 포함한 니힐리즘은 극복되고, 이 사상의 운명애적인 긍정적인 면이 여기서 비로소 진정으로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 출처 : 세계의 사상, 고영복, 사문연, 2002.5.20, 사회문화연구소
1. 신의 죽음을 알고 있는 자, 짜라투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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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과 심연을 오르내리며 마침내 몰락의 길을 택하는 자, 짜라투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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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가 그의 나이 서른이 되었을 때,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정신과 고독을 즐기며 십 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며 살았다. 하지만 마침내 그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어느 날 아침 동이 트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양 앞으로 걸어 나가 태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너, 위대한 별이여! 네가 아무리 빛을 비추어 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존재인 내가 없었다면 너의 행복은 무엇이겠는가? "
지난 십 년 동안 너는 나의 동굴까지 떠올랐다. 그러나 나와 나의 독수리와 나의 뱀이 없었더라면 너는 자신의 빛과 그 빛의 길이 싫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침마다 너를 기다렸고 너로부터 얻는 그 넘쳐남으로 너에게 축복을 보냈다.
보라! 나는 너무도 많은 꿀을 모은 벌처럼 나의 지혜에 지쳤다. 그러므로 이제는 나에게 손 내미는 자들이 있었으면 한다. 나는 이 지혜를 베풀어 주고 나누어 주려고 한다. 인간들 가운데서 현명한 자들이 다시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기뻐하고 가난한 자들이 다시 자신들의 넉넉함을 기뻐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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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 위하여 나는 저 깊은 밑바닥으로 내려가야만 한다. 저녁마다 바다 저편으로 떨어져 아래의 세상을 비추어 주는 너처럼, 너 넘쳐흐르듯 풍요로운 별이여! 나는 너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처럼 몰락해야 한다.
그러니 나를 축복해다오. 그대 고요한 눈이여! 질투심 없이 큰 행복조차도 바라볼 수 있는 너! 넘쳐흐르고자 하는 이 잔을 축복하라! 황금빛 물이 흘러나와 너의 환희를 온 누리로 비추어줄 이 잔을!
보라! 이 잔은 다시 비워지기를 바라고,짜라투스트라는 다시 인간이 되고자 한다.
이렇게 하여 짜라투스트라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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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는 홀로 산을 내려 갔다. 아무도 그와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나 숲 속으로 들어섰을 때 한 노인이 갑자기 그의 앞에 나타났다. 숲 속에서 풀 뿌리를 캐 내려고 자신의 신성한 암자를 떠난 노인이었다. 그런데 노인이 짜라투스트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방랑자는 낯설지가 않구나. 몇 해 전 이곳을 지나갔지. 그의 이름이 짜라투스트라라고 했었지. 그런데 그도 변했군. 그때는 자신의 재를 산속으로 가지고 갔는데 오늘 그대는 자신의 불을 골짜기 아래로 나르려고 하는가? 방화범의 형벌이 무섭지도 않은가?
그래, 분명히 짜라투스트라구나. 두 눈은 맑아지고 입가의 역겨움은 깨끗이 사라졌어 아이가 되었군. 마치 춤추는 사람처럼 걷고 있구나.
짜라투스트라는 변하였다. 아이가 되었구나. 잠에서 깨어난 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 잠든 사람들한테로 가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그대는 마치 바다 속에 있는 듯 고독 속에서 살았고 그 바다가 그대를 품어 주었다. 그런데도 아아, 슬프구나. 그대는 육지로 오르려 하는가? 아아, 슬프구나. 그대는 다시 자신의 육신을 짐처럼 끌고 다니려 하는가?”
짜라투스트라는 대답했다. "내가 인간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오."
노인이 말했다. "내가 숲과 황야를 헤메고 다닌 것 또한 인간들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제 나는 신을 사랑하지. 인간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나에게 인간은 너무나 불완전한 존재야. 인간에 대한 사랑은 나를 파멸시킬 테지"
짜라투스트라는 대답했다. "사랑에 대해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소. 단지 나는 인간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을 뿐이오.” 노인은 말했다.“인간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말라. 오히려 그들에게 무언가를 빼앗아 그것을 그들에게 나누어 가지도록 하게. 그것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즐거운 일일 테니. 그대가 좋다면 말이야. 그리고 그대가 인간들에게 무언가를 주고자 한다면 자선을 베풀되 그 또한 그들로 하여금 애걸하도록 만들게”
짜라투스트라는 “아니요”하고 대답했다. “적선을 받을 만큼 나는 가난하지 않소”
노인은 그의 말을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그대의 선물을 받아들일지 시험해 보게! 그들은 은둔자를 불신하며 우리가 선물을 주려고 왔다는 것을 믿지 않네. 거리를 지나는 우리의 발자국 소리가 그들에게는 너무 크게 들리지. 그러니 인간들에게 가지 말고 숲 속에 머물게. 아니 차라리 짐승들에게 가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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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숲에서 무슨 일을 하시오?” 짜라투스트라가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나는 노래를 만들고 그 노래를 부르네. 나는 노래를 만들고 웃고 울고 중얼거리며 이렇게 신을 찬양하지. 그런데 그대는 우리에게 어떤 선물을 가져왔는가? “
이 말을 듣고 짜라투스트라는 노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말 했다. "내가 당신에게 드릴 것이 무엇이 있겠소! 그러니 당신에게서 그 무엇을 빼앗는 일이나 없도록 어서 나를보내주시오" 이렇게 하여 두 사람, 노인과 사나이는 웃으면서 서로 헤어졌다. 두 명의 소년처럼 웃으면서.
그러나 혼자 있게 되자 짜라투스트라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저 노인은 숲 속에 있어서 아직 신이 죽었다는 소식조차 듣지 못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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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를 사랑하고 그 안에서 초인이 되려는 자, 짜라투스트라
짜라투스트라는 숲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로 들어섰을 때 그는 시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줄타기 광대의 공연이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려 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인간인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이제까지 모든 존재는 자신을 넘어서 그 무엇인가를 창조해왔다. 그런데도 그대들은 이 위대한 밀물의 한 가운에서 썰물이 되기를 원하는가? 자신을 극복하기 보다는 오히려 동물로 되돌아가기를 원하는가?
인간에게 있어 원숭이가 무엇인가? 웃음거리 혹은 견디기 힘든 수치이다. 초인에게 있어서 인간 또한 꼭 그와 같은 존재, 즉 웃음거리 혹은 견디기 힘든 수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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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초인은 대지의 뜻이다. 그대들의 의지는 말해야 한다. 초인이 이 대지의 뜻이 되어야 한다고! 나의 형제들이여, 간곡히 바라노니 <<대지에 충실하라.>>그리고 하늘 위의 희망에 대해 말하는 자들을 믿지 마라! 그들은 스스로 알들 모르든 독을 타서 퍼뜨리는 자들이다.그들은 삶의 경멸자들이며 말라 죽어 가는 자들이며 스스로 중독된 자들로, 이런 자들에게 대지는 지쳐 버렸다. 그러니 그들이야 죽든 말든 상관하지 말라!
예전에는 신에 대한 모독이 최대의 모독이었다. 그러나 신이 죽었으므로, 신에 대해 모독을 저지른 자들도 함께 죽었다. 이제 가장 무서운 것은 이 대지를 모독하고 탐구할 수도 없는 것의 신비한 것의 심장을 대지의 뜻보다 더 높이 존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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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인간은 더러운 강물이다. 더러워 지지 않으면서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이려면 우리는 스스로 바다가 되어야 한다.
보라,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초인은 바다이며 그 속에서 그대들의 커다란 경멸은 가라앉을 수 있다. 그대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로 위대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위대한 경멸의 순간이다. 그대들의 행복, 그대들의 이성과 그대들의 덕이 역겨워지는 순간인 것이다.
보라,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초인이 바로 번갯불이며 바로 광기인 것이다.짜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했을 때 사람들 중 한명이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줄타기 광대에 대해서 이제 실컷 들었다. 그러니 이제 그 자를 보여 달라! " 그러자 모든 사람들은 짜라투수트라를 비웃었다. 그러나 줄타기 광대<U style="text-underline: #0000ff single">1)</U>는 이 말을 자신을 두고 한 것이라 생각하고 곡예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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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아닌 과정이기에 더욱 사랑스러운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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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군중을 바라보던 짜라투스트라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하나의 밧줄이다.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줄 가운데 서 있는 것도 위험하며 뒤돌아보거나 멈춰 서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의 위대한 점은 그가 다리(과정)일뿐 목표가 아니라는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데 있다.
나는 사랑한다. 다른 삶은 모르고 몰락하는 자로서 살 뿐인 자를. 왜냐하면 그는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다가올 미래의 세대를 옹호하고 인정하며 지나간 과거의 사람들을 구제하는 자를. 그러한 자는 오늘의 세대와 함께 파멸하고자 하기 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자신의 신을 사랑하기에 그를 징벌하는 자를. 그런 자는 자신의 신의 분노로 말미암아 파멸하려는 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상처를 입어도 그 영혼의 깊이를 잃지 않으며 작은 체험만으로도 멸망할 수 있는 자를. 그런 자는 이렇게 하여 즐거이 다리를 건너간다.
나는 사랑한다. 자기 자신을 잊은 채 세상 모든 것을 자신 안에 간직할 만큼 그 영혼이 넘쳐 흐르는 자를.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은 그의 몰락의 계기가 된다.
나는 사랑한다. 자유로운 정신과 자유로운 가슴을 가진 자를. 그런 자에게 머리는 그저 가슴에 있는 내장일 뿐이다. 그러나 그 가슴은 그를 몰락으로 몰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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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만한 교양과 얼음의 미소를 가진 최후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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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는 말을 마치고 나서 잠시 침묵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저들은 서 있으며 웃기만 하는구나. 저들은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나의 입은 그들의 귀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 자신들을 이토록 자랑스럽게 만든 이것을 그들은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그들은 그것을 교양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교양이란 것이 있어서 그들을 양치기보다 뛰어나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경멸이라는 말을 듣기 꺼려한다. 이제 나는 그들의 긍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나는 이제 그들에게 가장 경멸스러운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최후의 인간(last man) 이다. 그리하여 짜라투스트라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세워야 할 때다. 이제는 가장 높은 희망의 씨를 뿌려야 할 때다. 인간의 대지는 아직도 씨를 뿌리기에 충분할 만큼 비옥하다ㅡ그러나 이 대지는 언젠가 말라 버려 그 맥을 잃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시는 이 대지로부터 큰 나무들이 자라지 못하게 될 것이다.
슬프다!인간이 더 이상 별을 탄생시키지 못할 때가 오겠구나! 슬프다! 자기 자신을 더 이상 경멸할 줄 모르는, 경멸스럽기 그지없는 인간들의 시대가 오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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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나는 그대들에게 최후의 인간을 보여주겠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창조는 무엇인가? 동경은 무엇인가? 별은 무엇인가?" 최후의 인간은 이렇게 물으며 눈을 깜빡거린다. 그러자 대지는 작아지고 그 위에서 모든 것을 작게 만드는 최후의 인간들이 뛰어다닌다. 이 종족은 벼룩처럼 근절시킬 수가 없다. 최후의 인간이 가장 오래 사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을 찾아냈다” 최후의 인간들은 이렇게 말하며 눈을 깜박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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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살기 힘든 지방을 떠났다. 인간에게 따스함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아직도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사람과 몸을 비비고 있다. 인간에겐 따스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돌보아 줄 양치기는 없고 가축 떼만 있을 뿐! 모두가 평등을 원하고 모두가 평등하다. 자기 자신이 모두와 다르다고 느끼는 자는 스스로 병원으로 가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모두 영리하며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조롱에는 끝이 없다. 그들은 다투기도 하지만 금새 화해한다. 그러지 않으며 위가 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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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사람들의 고함소리와 환호성이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사람들은 외쳤다.
“아, 짜라투스트라여! 우리에게 그 최후의 인간을 보여달라. 우리를 그 최후의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 그러면 당신에게 초인을 선사하겠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환호하며 웃어댔다. 하지만 마음이 서글퍼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생각했다. 저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그들의 귀를 위한 입이 아니다.
아마 나는 너무 오랫동안 산속에 살면서 시냇물과 나무들에게만 귀를 기울였나 보다. 나의 영혼은 흔들림이 없고 이른 아침 무렵의 산처럼 밝다. 그러나 저들은 나를 차갑고, 끔직한 농담이나 하는 냉소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제 그들은 나를 쳐다보면서 웃고 있다. 또한 그들은 웃으면서 나를 증오하기까지 한다. 그들의 웃음에는 얼음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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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너무도 많은 자들이 결혼이라고 부른 것. 아 그것을 나는 어떻게 부를까. 아, 짝을 이루고 싶어하는 영혼의 궁핍함이여! 아, 짝을 이루고 싶어하는 영혼의 가엾은 안일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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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너의 자신을 견디어 내지 못하며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들은 너희의 이웃을 유혹하여 사랑하도록 만들고, 그들의 과도로 자신을 미화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예찬하려할 때 증인을 끌여들인다.....너희들에 대해 좋게 생각하도록 그 증인을 유도하고 나서 너희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한다... 어떤 사람을 자신을 찾기 위해 어떤 이는 자신을 잊기 위해 이웃으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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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이진 않습니다만, 구석에서 음침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속삭이는 불평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뭔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약한 것은 대단한 공적으로 바꾸어 놓는 거짓말이 일어나고 있어요”
-계속 이야기 하게! “무력함을 선량함으로 바꾸고, 겁많은 비겁을 겸허로 바꾸며 증오를 품은 채 상대방에게 복종하는 것을 순종으로 바꿉니다. 약자의 비공격성을 ...인내라는 발림말로 바꾸고 그것을 덕이라고까지 합니다”
-계속 이야기하게! “그들은 자신들의 비참함이 신에 의해 선택받은 표시하고 합니다. 왜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장 사랑하는 개를 때린다하는, 그래서 이러한 비참함도 하나의 준비나 시련, 훈련으로 생각하고.. 심지어 축복이라고 부르기조차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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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가진 가치와 가치 감각의 모든 영역을 꿰뚫어 보기 위해 그리고 여러 관점과 판단을 가지고서 높은 곳에서 사방을 보고, 낮은 곳에서 모든 봉우리를 보며, 한 구석에서 천하를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 비판자나 회의주의자, 독단론자, 역사가. 시인, 수집가. 여행자, 수수께끼 해독자. 도덕주의자. 예언자. 자유주의자등 거의 모든 유형의 인간이 되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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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자, 완전한 자, 부동한자, 충족자, 그리고 불멸자에 대한 가르침을 나는 악이라고 부른다. 불멸이라는 것은 한낱 비유에 불과하다. 최상의 비유라면 불멸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생성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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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찾을 뿐, 시체를 찾지 않으며 가축 떼나 신자들을 찾지도 않는다. 또한 창조하는 자는 새로운 가치를 새로운 서판에 써넣으며 함께 창조할 자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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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는 오랫동안 잤다. 아침놀뿐만 오전 한나절의 햇살도 그의 얼굴 위로 지나갔다. 마침내 그는 눈을 떴다. 짜라투스트라는 놀란 눈길로 숲과 그 고요함을 바라보았고 놀라 눈길로 자기 내면을 살펴보았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뭍을 발견한 선원처럼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한줄기 빛이 떠올랐다. 내게는 길동무가 필요하다. 내가 원하는 곳은 같이 갈 살아있는 길동무 말이다. 지금 내가 짊어지고 있는 가는 죽은 길동무나 시체가 아니다. 나를 따라올 살아있는 길동무가 필요하다. 그들 스스로 내가 가려는 곳으로 따라오고자 하는 길동무가 필요하다.
한줄기 빛이 떠올랐다. 짜라투스트라는 이제 군중이 아니라 길동무들에게 말하려 한다. 짜라투스트라는 기껏 가축이나 돌보는 양치기라든지 개가 되어서는 안된다.
-보라! 저 착하고 의로운 자들을! 그들은 누구를 가장 미워하는가? 그들이 떠받들어온 가치들을 적어 놓은 서판을 부수는 자, 그 파괴자와 범죄자를 가장 미워한다. 사실은 그가 바로 창조하는 자인데도 말이다.
보라! 저 온갖 믿음의 신자들을! 그들은 누구를 가장 미워하는가? 그들이 존중하는가치들을 적어놓은 서판을 부수는 자, 그 파괴자와 범죄자를 가장 미워한다. 사실은 그가 바로 창조하는 자인데도 말이다.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찾을 뿐, 시체를 찾지 않으며 가축 떼나 신도들을 찾지도 않는다. 또한 창조하는 자는 새로운 가치를 새로운 서판에 써넣으며 함께 창조할 자를 찾는다.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그리고 함께 수확할 자를 찾는다. 창조하는 자 앞에서 만물은 익어서 수확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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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하는 하는 길동무를, 자신의 낫을 갈 줄 아는 자를 찾는다. 그들은 파괴자요, 선과 악을 경멸하는 자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야 말로 수확하는 자요, 축제를 벌이는 자들이다. 짜라투스트라는 함께 창조하고 함께 수확하며 함께 축제를 벌일 자를 찾고 있다. 그가 가축 떼, 양치기, 시체와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양치기가 되어서도 무덤 파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된다. 다시는 군중과 말하지 않으리라. 죽은 자와 말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나는 창조하는 자, 수확하는 자, 축제를 벌이는 자와 함께 하리라. 그들에게 무지개를 초인에 이르는 계단을 모두 보여주리라.
혼자 있는 은둔자들에게 그리고 둘이서 지내는 은둔자들에게 나의 노래를 들려 주리라. 그리고 일찍이 들어본 적 없는 것을 들을 귀를 가진 자, 그 자의 마음을 나의 행복으로 가득 채워 주리라. 나는 나의 목표를 향해 나의 길을 가련다. 그리하여 나의 길이 그들에게는 몰락의 길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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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는 많은 나라와 많은 민족을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민족들 의 선과 악을 발견했으며 지상에서 선과 악보다 더 큰 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민족에게 선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다른 민족에게는 웃음거리나 치욕으로 여겨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많은 것들이 여기서는 악이라고 불리고 저기서는 자줏빛 영광으로 장식됨을 보았다. ...참으로 인간들은 그들 자신에게 모든 선과 악을 부여했다. 참으로 그들은 어느 누구로부터 선과 악을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선과 악이 천상의 음성으로 그들에게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인간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우선 사물에다가 가치를 부여했다. 인간은 먼저 사물에다가 그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인간, 즉 평가하는 자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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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평가란 곧 창조가 아닌가. 이 말을 들어라. 그대 창조하는 자들이여!평가된 모든 사물에게는 평가 그 자체가 보물이며 귀중품이다. 가치 평가를 통해 비로소 가치가 생겨난다. 그러므로 그러한 평가가 없다면 인간이라는 호두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이 말을 들어라, 그대 창조하는 자들이여! 가치의 변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창조하는 자의 변화를 말한다. 창조하는 자가 되려는 자는 언제나 파괴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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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벗이 되기 위해서는 그 벗을 위해서 전쟁도 할 수 있어야 한다. . 그리고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적이 될 수도 있어야 한다. 자신의 벗에 대해서 적으로서 존경할 줄 알아야 한다. 그대는 그대의 벗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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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이웃 사람 주위로 몰려가 귀에 듣기 좋은 미사여구의 말들을 한다. 그러나 내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그대들의 이웃 사랑은 그대들 자신에게 좋지 않은 사랑일 뿐이다. 그대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여 이웃 사람들에게로 달아난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의 덕을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의 몰아 현상의 정체를 꿰뚫어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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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에게 이웃사랑을 권하란 말인가? 차라리 나는 그대들에게 이웃으로부터 도피하여 오히려 가장 멀리 있는 자를 사랑하기를 권한다. 바로 가까이 있는 자들에 대한 사랑보다는, 가장 멀리 있는 자들, 미래의 인간들에 대한 사랑이 더욱 고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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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자신을 견디어 내지 못하며 그대들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대들은 이웃을 유혹하여 사랑하도록 만들고 이웃의 착각을 이용하여 그대들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그대들이 온갖 부류의 이웃과 그 이웃의 이웃을 견디어 내지 못하길 바란다. 그리하여 그대들은 그대들 자신으로부터 그대들의 벗과 그 벗의 넘쳐 흐르는 가슴을 창조해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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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자신을 찾으려고 이웃에게로 가고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을 잃고 싶어서 이웃에게로 간다. 그대들 자신에 대한 이 좋지 않은 사랑은 그대들의 고독을 일종의 감옥으로 만들어 버린다.
-나의 제자들이여. 이제 나 홀로 나의 길을 가련다. 너희들도 이제 한 사람 한 사람씩 제 갈 길을 가라! 내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진실로 너희들에게 권하거니와 나를 떠나라. 그리고 짜라투스트라에 저항하여 스스로를 지켜라. 더 바람직한 일은 짜라투스트라의 존재를 부끄러워하는 일이다. 그가 너희들을 속였을 지도 모르지 않는가 (선사하는 덕에 대하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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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제자로만 머문다면 그것은 선생에 대한도리가 아니다. 너희들을 어찌하여 내가 쓰고 있는 월계관을 낚아채려 하지 않는가? 너희들은 나를 숭배한다. 그러나…신상에 깔려 죽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 너희들은 짜라투스트라를 믿고 있다고 말하려는가? 그러나 짜라투스트라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너희들은 나의신자이다. 그러나 신자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너희들에게 명하노니 이제 나를 버리고 자신을 찾도록 하라. 너희가 모두 나를 부인하고 나서야 나는 다시 너희들에게 돌아오리라. 언젠가 너희들은 나의 벗이 되어야 하고 새로운 희망의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 (선사하는 덕에 대하여 중에서)
-나는 그대들에게 이웃이 아니라 벗을 가지도록 가르친다. 벗은 그대들에게는 이 대지 위에서의 축제요, 다가올 초인에 대한 예감이어야 한다.
나는 그대들에게 벗을 가르친다. 그 마음 속에 세계가 선의 껍질로서 완성되어 있는 벗에 대하여, 다시 말해 언제나 완성된 세계를 선사할 수 있는 창조적인 벗에 대하여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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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모든 은둔자에게는 너무나 많은 심연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 사람의 벗과 그 벗의 높은 경지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벗을 위한다면 그 벗을 위해 전쟁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는 적이 될 줄도 알아야 한다. 자신의 벗에 대해서도 적으로 존경할 줄 알아야 한다. 그대는 그대의 벗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단 말인가? 그대의 벗에게서 자신의 최강의 적을 찾아야 한다. 그대의 벗에게 적대할 떄 그대는 마음으로 그대의 벗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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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이라면 미루어 짐작하는 일과 침묵하는 일에 있어서 대가가 되어야 한다. 그 모든 것을 보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대의 벗이 깨어 있을 때 무슨 행동을 하는 지는 그대의 꿈을 통해 알도록 하라.
그대의 동정은 미루어 짐작하는 일이어야 한다. 우선 그대의 벗이 동정을 원하는 지를 알아야 한다. 아마도 그대의 벗은 그대의 불굴과 영원의 눈길을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대의 벗에 대한 동정은 단단히 껍질 속에 숨겨두어야 한다. 그것을 깨무는 동안 그대의 이빨 하나쯤은 부러질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대의 동정이 섬세하고 감미로운 것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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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그대의 벗에게 맑은 공기이며 고독이며 빵이고 약인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묶고 있는 쇠사슬은 풀지도 못하지만 그 벗에게는 구원자가 될 수 있다. 그대는 노예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벗이 될 수 없다. 그대는 폭군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벗을 가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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