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앵두 먹는 법
앵두를 오래 먹는 법은 따먹지 않는 거다
한 주먹 우물거려도 앵두씨나 가득할 것을
싸돌아다니는 닭들 목구멍이나 막히게 할 것을
툇마루에 그림자 하나 앉혀놓고 눈으로 먹는 거다
보리알만해진 눈곱 곁에 앵두알 눈동자를 짝지우는 거다
눈동자 속으로 날아드는 새들의 노랫소리까지 받아먹는 거다
앵두 뺨을 훔치는 소만 망종의 달빛까지 핥아먹는 거다
앵두 뺨과 앵두 이파리의 솜털이 내 귓불에도 돋아나게 하는 거다
그리하여 달빛 앵두인 양 날 훔쳐보는 시람하나 갖는 거다
나 몰라라 슬그머니 앵두 이파리 뒤쪽에 숨어
혼자 날아온 새처럼 깃이나 다듬는 거다
처음 만나는 눈길인 양 쌍꺼풀만 깜작이는 거다
돌아앉아 앵두가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나직이 우는 거다
도깨비 기둥
당신을 만나기 전엔,
강물과 강물이 만나는 두물머리나 두내받이, 그 물굽이쯤이 사랑인 줄 알았어요
피가 쏠린다는 말, 배냇니에 씹히는 세상 어미들의 젖꼭지쯤으로만 알았어요
바람이 든다는 말, 장다리꽃대로 빠져나간 무의 숭숭한 가슴 정도로만 알았어요
당신을 만난 뒤에야, 겨울밤
강줄기 하나가 쩡쩡 언 발을 떼어내며 달려오다가, 또 다른 강물의 얼음 진군과 맞닥뜨릴 때!
그 자리, 그 상앗빛, 그 솟구침, 그 얼음 울음, 그 빠개짐을 알게 되었지요
당신을 만나기 전엔,
얼어붙는다는 말이 뒷골목이나 군인들의 말인 줄만 알았지요 불기둥만이 사랑인 줄 알았지요
마지막 숨통을 맞대고 강물 깊이 쇄빙선을 처박은 자리, 흰 뼈울음이 얼음기둥으로 솟구쳤지요
당신을 만난 뒤에야,
그게 바로 도깨비기둥이란 걸 알았지요. 열 길 물속보다 깊은
한 길 마음만이 주춧돌을 놓을 수 있다는 것을
강물은 흐르는 게 아니라 쏠리는 것임을.
알았지요, 다 얼어버렸다는 것은 함께 가겠다는 것.
금강(金剛)기둥으로 지은 울음 한 채, 하늘 주소까지
옆걸음
전깃줄에 새 두 마리
한 마리가 다가가면 다른 한 마리
옆걸음으로 물러선다 서로 밀고 당긴다
먼 산 바라보며 깃이나 추스르는 척
땅바닥 굽어보며 부리나 다듬는 척
삐친 게 아니다 사랑을 나누는 거다
작은 눈망울에 앞산 나무 이파리 가득하고
새털구름 한 올 한 올 하늘 너머 눈 시려도
작은 몸 가득 콩당콩당 제짝 생각뿐이다
사랑은 옆걸음으로 다가서는 것, 측근이라는 말이
집적집적 치근거리는 몸짓이 이리 아름다울 때 있다
아침 물방울도 새의 발목 따라 쪼르르 몰려다닌다
그중 한 마리가 드디어 야윈 죽지를 낮추자
금강초롱꽃 물방울들 땅바닥을 적신다
팽팽한 활시위 하나가 하늘 높이
한 쌍의 탄두를 쏘아올린다
아프니까 그댑니다
암에 걸린 쥐 앞에 열두 씨앗 놓아둡니다
성한 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씨알 쪽으로
병든 쥐가 시름시름 다가가 그러모읍니다
오물오물 독경하듯 앞발로 받듭니다
병든 어미 소를 방목합니다
건강한 소들은 혀도 디밀지 않는 독풀
젖통 출렁이며 허연 혀로 감아챕니다
젖은 눈망울로 뿌리째 뽑아먹습니다
그대 향한 내 병은 얼마나 깊은지요
그대 먼 눈빛에서 낟알을 거둡니다
그대 마음의 북쪽에 고삐를 매고
살얼음 잡힌 독풀을 새김질합니다
내가 아프니까 비로소 그댑니다
작명의 즐거움
콘돔을 대신할
우리말 공모에 애필(愛必)이 뽑혔지만
애필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결사적인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중 한글의 우수성을 맘껏 뽐낸 것들을 모아놓고 보니
삼가 존경심마저 든다
똘이옷 고추주머니
거시기장화
밤꽃봉투 남성용고무장갑
정관수술사촌 올챙이그물
정충검문소
방망이투명망토 물안새
그거 고래옷 육봉두루마기
성인용풍선 똘똘이하이바
동굴탐사복 꼬치카바
꿀방망이장갑 정자지우개 버섯덮개
거시기골무
여따찍사 버섯랩 올챙이수용소 쭈쭈바껍데기
솟아난열정 내가 막는다
가운뎃다리작업복 즐싸
고무자꾸 무골장군수영복
액가두리 정자감옥
응응응장화 찍하고나온놈이
대갈박고기절해
아, 시 쓰는 사람도 작명의 즐거움으로 견디는 바
나는 한없이 거시기가 위축되는 것이었다
봄 가뭄에 졸아붙은 올챙이 눈, 그 작고 깊은 끈적임을
천배쯤 키워놓으면 바로 콘돔이거니, 달리 요약 함축할 길 없어
개펄 진창에 허벅지까지 빠지던 먹먹함만 떠올려보는 것이었다
애보기글렀네 짱뚱어우비 개불장화를 나란히 써놓고
머릿속 뻘구녕만 들락거려보는 것이었다
하늘 접시
시골 엄니를 위해
누님은 에어컨과 스카이 라이프를 달아드리고
아우는 텔레비전과 청소기를 사드렸는데,
맏아들인 나는 병아리 눈곱만큼 나오는
전기료와 벙어리 전화세 내드리는 게 전부다
그런데 누님은 누님이시다
누님이 달아드린 그 위성 케이블이
치매 걸린 광줄댁,
풍 맞은 대밭머리 아주머니,
수다와 버캐가 전문인 박달자 할머니까지,
동네 과부들을 어머니 방에 다 모이게 하는 것이다
모두 모여 벌건 대낮에
훌러덩 식식거리는 영화를 꼴깍꼴깍 보고 계신다
이 집 텔레비는 원제 저리 다 벗겨 놨댜?
어이쿠, 어이쿠, 저 양코배기들 방아 찧는 것 좀 봐
풍 맞은 몸으로 흉내내려니 반쪽만 에로배우다.
굳은 한쪽 팔다리는,
주책 좀 그만 떨라니까!
젊어 떠난 서방이 엉거주춤 옷섶 추슬러주는 듯하다
풍 맞고야 앞서 간 남편과 몸을 섞다니,
누님은 역시 누님이시다
함박꽃 틀니들,
공옥진 초청공연이 따로 없다.
웃음바다에 둥둥둥 떠가는 치매의 복사꽃잎들,
떠돌이 약장수에게 약 들여놓는 일도 없어졌다
이제 나는 노파 전용 영화관의 맏아들이다.
돌아가시기도 전에 벌써 스카이 라이프라니!
짠하기도 하지만,
누님은 역시 누님이시다.
녹슨 처마 끝 천국의 접시여
하느님도 세상 재미가 쏠쏠하신가
새털구름 불콰한 하늘접시여
돌아서는 충청도
울진에다 신접살림을 차렸는디,
신혼 닷새 만에 배 타고 나간 뒤 돌아오덜 않는 거여
만 삼년 대문도 안 잠그구 지둘르다가
남편 있는 쪽으로 온게 여기 울릉도여
내 별명이 왜 돌아서는 충청돈 줄 알어?
아직도, 문 열릴 때마다 신랑이 들이닥치는 것 같어
근데 막걸릿집 삼십년, 남편 비스무르한 것들만 찾아오는 거여
그때마다 내가 횅하니 고갤 돌려버리니까 붙어댕긴 이름이여
그래도, 드드륵! 문 열리는 소리가 그중 반가워
그짝도 내 남편인 줄 알았다니껜
이 신랑스런 눔아, 잔 받어!
첫 잔은 저짝 바다 끄트머리에다가 건배하는 거 잊지 말구
그 끝자럭에 꼭 너 닮은 놈 있응께
참 빨랐지 그 양반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녁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악필
월남전 다녀온 해부터
고엽의 떨리는 손으로 쓴 아홉 권의 일기장
그의 영정 아래, 마지막 장이 펼쳐져 있다
"염주는 가슴 쪽으로 굴릴 수밖에 없다
좌가 크다 두고 온 아들이 눈에 밟힌다"
악필이 더 있다
흰 페인트로 대문 앞에 써놓은 주차금지
차주가 돼본 적 없으니 필적만 주차해왔다
담벼락에 써놓은 소변금지, 가위는 한껏 녹슬어 이가 빠졌다
페인트 글씨도 폐인이 되었다 초록 대문에 쓴 개조심
육개월 만에 잡아먹었으니 붉은 개조심만 남았다
악필 중의 악필, 정말 으르렁대는 듯하다
하나 더 있다
백열전구에 매달아놓은 우체국통장
표지에 써놓은 유언, "비밀번호는 네 생일이다
장례 치르고 남은 돈은 엄마 드려라"
어찌 아들을 찾아 상복을 입힌단 말인가?
또 있다 부의나 조의는 없고
빼뚤빼뚤 이름자만 쓴 봉투 몇, 한결같이 악필이다
봉투의 여백이 시베리아 등짝이다
악다구니 셋이 소주를 마시고 악필 다섯이 고스톱을 치는
추운 밤이다 인력시장에 나가봐야 한다고
컵라면에 덜덜덜 뜨건 물을 붓는
문상 이틀째 새벽이다
한 일(一) 두 이(二) 석 삼(三) 여덟 팔(八)
주름살만은 당찬 추사체다
면면(面面), 명필 중의 명필이다
이웃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으니
두부장수는 종을 흔들지 마시고
행상트럭은 앰프를 꺼주시기 바랍니다
크게 써서 학교 담장에 붙이는 소사 아저씨 뒤통수에다가
담장 옆에 사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한마디씩 날린다
공일날 운동장 한번 빌려준 적 있어
삼백육십오일 스물네 시간 울어대는
학교 종 한번 꺼달란 적 있어
학교 옆에 사는 사람은 두부도 먹지 말란 거여
꽁치며 갈치며 비린 것 한번 맛볼라치면
버스 타고 장터까지 갔다 오란 거여
차비는 학교에서 내줄 거여 도대체
목숨이 뭔지나 알고 분필 잡는 거여
호박넝쿨 몇 개 얹었더니 애들 퇴학시키듯 다 잘라버린 것들이
말 못하는 담벼락 가슴팍에 못질까지 하는 거여
애들이 뭘 보고 배울 거야 이웃이 뭔지
이따위로 가르쳐도 된다는 거여
[출처] 473. 이정록 -『정말』|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