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야왕국의 초대 국왕 및 왕후인 김수로(지성 분)와 허황옥(서지혜 분). | |
ⓒ MBC |
가야왕국의 건설자 김수로의 일대기를 그린 MBC 드라마 <김수로>(매주 토일 오후 9시 45분 방송)에서는 그와 허황옥의 인연이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처음에는 김수로가 허황옥을 우연히 구출해주고 나중에는 허황옥이 생명의 빚을 갚는 과정에서 생겨난 두 사람 사이의 감사와 신뢰가 이제는 서서히 사랑으로 발전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물론 드라마 <김수로> 속 내용은 거의 다 허구다. 등장인물들의 러브라인에 관한 부분은 특히 그렇다. 기본적인 뼈대만 빼놓으면 거의 대부분이 허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드라마 속 김수로와 허황옥의 인연에 주목할 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서기 48년에 웨딩마치를 울린 실제 부부인 동시에 가야왕국의 초대 국왕 및 왕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들이 당시의 관념으로 보더라도 '상당한 물리적 거리'를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한 세계적 커플이기 때문이다.
김수로는 유라시아대륙 북방의 흉노족 출신이고 허황옥은 유라시아 남방의 인도인 출신이었다. 그런 그들이 유라시아 동쪽의 가야에서 하나가 되었으니, 이들의 만남은 당시로서도 세계적 뉴스가 될 만한 사건이었다.
진짜 부부 김수로-허황옥, 대화는 어떻게 했을까
김수로와 허황옥의 사례를 포함해서, 민족과 출신지가 서로 다른 두 남녀의 국제결혼 뉴스를 접할 때마다, 우리가 품는 의문 중 하나는 '처음에 어떻게 의사소통을 했을까?'라는 것이다. '말이나 제대로 통했을까?'하고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김수로와 허황옥은 처음에 어떻게 의사소통을 했을까? "남녀가 만나는데 무슨 언어가 필요했겠느냐?"며 이 문제에 대한 탐구를 아예 포기하려 하지 말고, 현존하는 사료와 그것으로부터 도출되는 객관적 정황을 기초로 두 남녀의 의사소통 문제를 추적해 보기로 하자.
고려 전기인 1075~1084년 사이에 편찬된 가야 역사서인 <가락국기>에 따르면, 김수로와 허황옥이 처음 만난 때는 가야 건국 7년째인 서기 48년이었다. 바닷길을 통해 가야에 상륙한 허황옥은 가야 측이 신부를 위해 마련한 임시 궁궐 앞에서 김수로와 처음 대면했고, 그 날 밤에 임시 궁궐의 침실에서 남편과 첫날밤을 보냈다. 단둘만이 남은 침실 공간에서, 허황옥은 김수로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이며,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입니다. 나이는 16세입니다."
▲ 드라마 <김수로>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허황옥(서지혜 분). | |
ⓒ MBC |
이들 사이의 언어가 가야어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중국 역사서인 <후한서>나 중국 사천성의 암각(巖刻) 자료 등을 토대로 할 때, 허황옥은 가야에 오기 1년 전인 서기 47년까지만 해도 티베트와 중국 내륙의 경계지대인 사천성(2008년 대지진 발생 지역)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김수로는 어떠했는지 몰라도 적어도 허황옥의 경우에는 가야어를 배울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가야어를 배웠음을 추론케 하는 간접적 자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 가야어를 몰랐다면, 어떻게 이들이 가야 토착민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었겠느냐?"고 질문할 수도 있지만, 가야 건국 당시만 해도 중국대륙-한반도-일본열도 등을 무대로 국제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김수로·허황옥과 가야 토착민들은 상인이나 통역 등을 매개로 얼마든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정황을 고려할 때, 이들이 가야어를 몰랐다 해도 가야 땅에서 사는 데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가야어를 익혔을 것이라고 볼 만한 정황이 별로 포착되지 않는다. 따라서 '가야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들 중에서 어떤 언어가 김수로와 허황옥 사이의 언어가 되었을지'로 우리의 논의를 압축하는 게 바람직하리라 본다.
중국어와 흉노어를 쓴 김일제의 후예들
드라마 <김수로>에서도 언급되고 있듯이, <한서> <삼국사기> 같은 문헌 사료나 <문무왕릉비문> <대당고김씨부인묘명> 같은 비문 사료 등을 종합하면 김수로는 흉노족의 일파인 제천금인족(祭天金人族)에 속한 김일제의 후예로 판단된다.
중국 한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한서>에 따르면, 한나라 제7대 황제인 한무제(재위 기원전 141~87년) 때에 전쟁에서 패해 한나라에 끌려온 흉노 왕족 김일제는 황제의 신임을 바탕으로 영향력 있는 제후의 자리에 오르는 등 중국에서 성공적인 정착을 이룩했다. 김일제를 시조로 하는 최초의 김씨 가문인 김일제의 후예들은 산동반도를 거점으로 집안의 영향력을 보전하면서 기원전 66년 이후에는 단독으로 한나라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왕망이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운 서기 8년 이후에도 왕망과 고도의 유대관계를 갖고 권세를 유지한 김씨 가문은, 한나라 황실의 후예들이 신나라를 멸망시키고 후한(後漢)을 세운 서기 25년 이후로 중국 역사에서 사라졌다. 김씨 가문이 역사무대에 컴백한 것은 그로부터 17년 뒤인 서기 42년 가야 건국 때였다.
이 같은 역사를 고려해볼 때, 가야 땅에 출현한 김씨 가문의 구성원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는 한어(漢語, 중국어)나 흉노어였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중국 땅에서 최소 100년 이상 국가경영에 참여한 가문이므로, 중국어를 상당히 능숙하게 구사했을 것이라는 점에는 별다른 의문이 없다. 한편, 한나라에 끌려온 뒤에도 산동반도를 거점으로 자기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한 점을 볼 때, 이들이 흉노어를 어느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으리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한국어와 고도의 유사성 보이는 고대 인도어
▲ 김수로와 결혼하기 위해 가야 땅에 상륙하는 허황옥(왼쪽에서 네 번째). 사진은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국립김해박물관 맞은편의 대형 벽화다. | |
ⓒ 김종성 |
그럼, 허황옥 측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허황옥은 어떤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까? 김병모에 따르면, 본래 인도반도의 아요디야(아유타)에 살던 허황옥의 조상들은 기원전 1세기에 중앙아시아 쿠샨족의 침략을 받아 오늘날의 사천성 지역으로 이동해서 소수민족 주거지를 형성했다. 김수로와 허황옥이 만나기 1년 전인 서기 47년에 중앙정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해서 정착지를 빼앗긴 허황옥 집안의 사람들은 양자강을 따라 바다를 건너 가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김병모는 주장하고 있다.
김병모가 이같은 '허황옥 루트'를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날의 사천성에 허씨 집성촌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그곳에 허황옥이 살았음을 보여주는 암각 자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인도반도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쌍어문(두 마리 물고기가 마주보는 무늬)이 허씨 가족들이 머문 인도-중국-가야의 도시들에서 똑같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김병모의 주장에 대해 반론도 존재하지만, 그의 학설이 가장 유력할 뿐만 아니라 한국 김해시나 인도 아요디야(아유타)시에서도 그의 연구성과를 근거로 가야 유적지들을 조성해놓았기 때문에 김병모의 주장을 따르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확실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김병모가 분석한 허황옥의 이동 루트를 근거로, 우리는 가야 땅에 출현할 당시의 허황옥이 고대 인도어와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허황옥 가문이 기원전 1세기에 인도반도를 떠났는데도 이들이 서기 1세기인 48년까지도 여전히 인도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 언어학자 강길운은 '아버지=아바치', '엄마=암마', '도령=도렌' 등 1300여 개의 어휘에서 한국어와 고대 인도어(드라비다어)가 고도의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어와 고대 인도어가 비슷하다는 점은, 1874년에 프랑스 선교사 달레가 쓴 <조선교회사>나 1906년에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가 쓴 <한국어와 드라비다 제어의 비교문법>에서 이미 지적된 바 있다.
고대 인도어가 한국어에 영향을 준 점이나, 허황옥 가문이 서기 47년까지도 중국 경내에서 소수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중국 정부에 대항한 점을 볼 때, 우리는 서기 48년에 가야 땅에 출현한 허황옥이 여전히 고대 인도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도 아요디야(아유타)를 떠나 중국에 정착한 후에도 여전히 자기들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집단생활을 유지했기에, 가야 땅에 도착한 허황옥이 자신을 '아유타국 공주'라고 소개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첫날밤 대화, 중국어로 이뤄졌을 가능성 커
▲ 김해시 전하교 앞에 있는 쌍어문. 인도반도와 가야 땅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쌍어문을 형상화한 조각물이다. | |
ⓒ 김종성 |
그러므로 서기 48년까지 중국에 살다가 가야에 도래한 허황옥이 한어(漢語)를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데에는 별무리가 없다. 다만, 허황옥의 경우에는 인도 출신들로 구성된 소수민족 구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중국어 구사능력이나 발음이 상당히 서툴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은 점들을 종합해볼 때, 김수로의 경우에는 중국어는 능숙하지만 흉노어는 서툴렀고, 허황옥의 경우에는 고대 인도어는 능숙하지만 중국어는 서툴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공통적인 언어는 중국어이므로, 첫날밤에 단둘만의 공간에 남게 된 김수로와 허황옥의 의사소통을 매개하는 데에 사용된 언어는 중국어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할 수 있다.
다만, 두 사람 사이에는 중국어 수준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최소 100년 이상 중국 사회의 주류로 산 김일제 가문의 후예인 김수로의 중국어는 일반 한족의 중국어와 별반 차이가 없었겠지만, 소수민족 구역에서 중국 정부에 대항하면서 생활한 허황옥의 중국어는 아무래도 서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출처: 오마이뉴스 2010.08.06 (금) 오전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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